책과 노는 방법. 자폭뭉치


*일단 개인적 경험담입니다.

댓살 적부터 몸 상태가 엉망이었던 L씨는 자연스럽게 책과 접할 기회가 남들보다는 많은 편이었습니다.
햇빛을 조금만 심하게 받아도 발갛게 열이 오르는 바람에 나가 놀지도 못하고, 어린 아이의 TV란 오후 네시 반 부터 시작하는 존재인지라 TV 시작 전까지는 할 일도 없었습니다. 몸 안좋으면 레고 블럭 가지고 놀기도 힘들고, 드물게 보는 비디오는 쉽게 식상해지고...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책으로 손이 갈 수밖에 없더군요.

그런 상황에서 손에 잡히는 거라면 역시 100권판 어린이용 문고소설.
처음에는 당연히 그림도 별로 없이 글자만 빽빽한 녀석이 죽도록 싫었습니다. 할머니나 어머니가 젖병물고 다니던 시절부터 동화책을 졸려 죽겠는데 짜증날 정도로 (...흐릿하나마 기억에 남을 정도면 나름대로 트라우마였나봅니다) 읽어주시다 보니 책에 대한 거부감 자체는 없다시피 했지만, 당장 글자만 빡빡하고 책장을 넘기는 재미도 없는 (빨리 못읽으니까요) 책 따위에 흥미붙일 만큼 한가하지는 (...)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섯살인가 여섯살인가... 문고판 소설을 그림이나 보려고 (어릴때는 문고판 삽화가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꺼내들었는데, 열 페이지를 채 넘기기도 전에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복권으로 된 동화책과 만화책에서는 전혀 본 적 없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분명 같은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 사이사이에 뭔가 다른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책 자체는 그림책보다 작은 주제에! (...)
처음에는 동화책이나 만화책에서 읽었던 책들만 찾아서 생략된 내용을 발견하는 놀이에 흥미를 붙였는데, 그러다 보니 차츰 차츰 그냥 책 자체를 읽게 되는 사례도 늘어나더군요.

그리고 책장의 1/3 쯤을 읽어가다 보니 새로운 놀이 방법도 발견했습니다. 은근히 책 내용이 겹친다는 걸 눈치챘던 겁니다.
와트/풀턴 위인전에서 나온 증기선이 다른 책에도 나오고,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왔던 제우스는 이 이야기 저 이야기에 아빠로 등장(...)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그러다 보니 그렇게 이어지는 부분을 찾아내는데도 재미를 붙여서, 결국 그 해에 100권 전서를 완독해 버렸습니다.
집안 사정이 (누구 때문에) 그리 좋지 못하다 보니 책을 자주 사 읽기는 무리가 있고... 읽을만한 새 책이 떨어져서 결국 이듬해가 되기 전에 100권 전집 완독에 재도전.

 그런데 이번에는 옛날에 읽었던 책이 다르게 보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모르고 지나치던 단어나 이야기나 인용이나 비유가 다른 책들을 읽으면서 어느정도는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어린 맘에는 그게 마냥 신기하더군요.
결국 또 완독. 이쯤 되니 달리 학원이니 학습이니 안받아도 자연스레 속독도 가능해 지고, 한번 읽었던 책은 속독하면서 계속 앞 내용을 떠올려야 하다 보니 두번째로 읽을 때는 기억도 잘 남는 - 꽤 유용한 버릇도 정착해 버렸습니다.

게다가 한두해 전까지만 해도 어려워서 때려쳤을법한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쉬워보입니다.

결국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전집을 세 번 이상 (쥘 베른의 이야기나 라이트 형제 위인전 같은 재미있는 낱권은) 읽고 올라갔습니다. 덕택에 영희와 철수가 하하호호 하는 교과서는 지겨워 죽는줄 알았다지요.

지금 와서 이런 저런 책들을 재미있어 하는 것도, 어릴때 느꼈던 저 사이클의 연장선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흥미를 붙이고, 흥미를 붙인 뒤에 깊이 들어가고, 그 과정에서 체득한 이해를 다른 곳에 응용하는데 흥미를 붙이고, 그러면서 한단계씩 수준을 올리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고, 진부하다면 진부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은 천성도 소질도 재능도 아닙니다. 그저 재미를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마 책 좋아하시는 다른 분들도 대부분 비슷한 과정을 밟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졸견입니다만,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일반적인 독서 거부 현상(...)도 설명이 되지 않을까요.
흥미를 붙일 만한 계기나, "책과 노는 방법" 을 체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딱딱한 텍스트를 접하게 되면 거부감이 생기는 것은 당연지사. 그것을 강제성을 띈 압박과 함께 겪는다면 책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겁니다.
공부때문에, 일 때문에 책 읽을 여유가 없다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재미있으면 그 시간 쪼개서라도 볼걸요?

정말 일반인들의 독서를 유도하고자 한다면, 쓸데없이 있어 보이는 책 던져주지 말고 진입장벽이 낮고 쉽게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책들이 우선적으로 추천/권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책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도 함께 퍼져야 하겠지요.
물론 그 책이 폐쇄적인 사이클 내에서만 돌아가는 흥미본위라면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을 겁니다. 적당히 다음 단계로 이어질 최소한의 정보 정도는 포함되어야 할테고...그 조건만 충족된다면 책의 형태가 라노베가 되건 문고판이 되건 타블로이드가 되건 E북이 되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책의 형식은 정보와 이야기를 담는 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 말입니다.

...기본상식도 안되는 이야기를 너무 장황하게 늘어놔서  죄송합니다.

ps: 문고판과 함께 읽었던 게 예림당의 어린이용 과학만화인 왜? 시리즈. 이건 10권을 모두 권당 100번 가까이 읽었던 것 같은데, 덕택에 고등학교 과정까지 매우 유용했습니다.  과학 쪽 시험공부 그거 먹는건가요 우걱우걱.

pps: 그런 면에서 진정한 독서의 적 가운데 하나가 초등학교 독후감.



덧글

  • tranGster 2008/09/02 11:21 #

    으흠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최근들어 느끼는 독서의 재미는 불과 1달전에 읽었던 내용이 다시 읽어 보면, 좀더 심화되고 다른 내용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일 것 같습니다. 어릴적에 읽었던 책도 마찬가지고요.
    특히나 삼국지를 읽으면 그렇더군요. 읽으면 읽을 수록 다르더군요
  • Luthien 2008/09/03 22:04 #

    요즘은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 재도전 후 절망하고 있습니다.
    이 책 이렇게 어려웠나...
  • 愚公 2008/09/02 11:26 #

    그런 면에서 진정한 독서의 적 가운데 하나가 초등학교 독후감. 2
  • Luthien 2008/09/03 22:04 #

    그런 면에서 진정한 독서의 적 가운데 하나가 초등학교 독후감. 3
  • 하야웨이 2008/09/02 12:57 #

    진짜 재밌었지요 ㅠㅠ 그렇게 보는거, 그런데 독서록 나온 이후로부터 안보는 책... 가끔가다 만화책이나 NT노벨이나 보고 몇자 끄적이고, 장편 소셜 펼쳐보다 마는...
  • Luthien 2008/09/03 22:05 #

    그놈의 독서록이 사람 많이 버렸습니다...
  • 묘련 2008/09/02 13:54 # 삭제

    생각해보니...제 경우엔 어린시절 전래동화가 너무 좋아서 너덜거리도록 읽은게 재미를 붙이는 계기가 된 것 같네요.( ..) 그 이후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학*사)이 집에 생겼는데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결혼한 이후의 이야기도 있다거나... 다른 책에서 보지 못한 이야기들이 잔뜩 들어있어서 굉장히 좋아했더랬...(잠시 회상모드..)

    이래서 미카엘 엔데라거나 환상소설류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는걸지도....
  • band 2008/09/02 14:59 # 삭제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가다가다 보면 만화나 망가??로 빠지기도 합니다.

  • Luthien 2008/09/03 22:05 #

    저처럼 양립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
  • No13 2008/09/02 16:01 #

    어렸을 적에 도서관에 한번쯤 가보는게 소원이었드랬죠. 만화에서처럼 집채만한 책장으로 가득찬..
    개인적으론 소설이나 (본격적인) 이론서보단 그 중간쯤 되는 에세이 같은 걸 좋아하는데 동네 서점엔 그런게 별로 없었던 지라..
    그리고 아직까지 그 소원은 실현되지 않았다던가요 뭐라던가요.
    (대학교 도서관엔 가봤지만 반은 참고서고 반은 소설이었다는 우울한 현실이...)
  • Luthien 2008/09/03 22:06 #

    도서관이야말로 꿈의 섬
  • 2008/09/02 19:19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미미르 2008/09/02 22:42 # 삭제

    저 같은 경우는 화장실에서 읽는걸 참 좋아해서 건강에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고보니 지루할꺼 같은 위인전도 지금생각해보면 참 재미있게 읽었네요
  • Luthien 2008/09/03 22:06 #

    그거 위험하다지요 (...)
  • 정호찬 2008/09/02 23:09 #

    XX대에 안하면 평생 거지꼴로 살다 죽으니 당장 해야할 일 같은 처세술 책하고

    시험 공부용이랍시고 문학 소설들 '핵심 요점'만 추려놓고 뒤에 해설 달아놓는 문학 전집의 탈을 쓴 참고서부터 싸그리 태워버려야 합니다.
  • Luthien 2008/09/03 22:06 #

    그놈들은 분서당해도 쌉니다!
  • paro1923 2008/09/03 01:23 # 삭제

    제 경우도, 밖에 나가 놀기보단 안에 틀어박혀있다 보니 책을 절로 읽게 되더군요.
    대학 들어와서 인터넷 접하기 전까진 공부보다 '읽기 위해' 뭐든지 막 봤죠.
    (요즘은, 책에서 많이 멀어졌지만...)

    ...다만, 제 기억에 남는 첫 책이란 게, 하필 6살 때 다락에서 발견한
    두께가 30센티 넘는 한 권짜리 종합가정백과사전... (...)
    상식, 요리부터 관상, 관혼상제, 해몽까지 총망라... (- 먼산)
  • Luthien 2008/09/03 22:06 #

    ...그거 잡상식 늘리는데 유용하지요.
    아직도 모 사립학교에서는 졸업 전까지 브리태니커 다 읽으라고 시킨댑니다.
  • 시로코 2008/09/03 16:02 # 삭제

    -_-; 저도 책 꽤나 좋아하고 많이 읽었습니다만, 하버마스나 프랑스 철학자들 책을 읽을때는 왠지 짜증스러워요....
  • Luthien 2008/09/03 22:07 #

    들뢰즈 갯강귀! 이긴 하지요.
    그래도 하버마스는...(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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