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성군 이운룡 신도비 전문 메모뭉치


이하는 임진년 왜란 당시 옥포만호였던 율성군 이운룡의 신도비 내용입니다.
대게 이런 내용은 과장과 첨삭이 일반적이라 내용 자체를 그리 신뢰하기 어려운 것이 적지 않습니다만, 내용 중에 원균 쪽 파트를 포함해 몇 가지 재미있는 부분이 있어 교차대조해 보기 전에 아예 전문을 옮겨싣습니다.

출처는 재령이씨 종친회입니다.




증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 행효충장의선무공신가선대부도총부부총관포도대장
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 行效忠仗義宣武功臣嘉善大夫都總府副總管捕盜大將
삼도수군통제사식성군이공신도비명 병서
三道水軍統制使息城君李公神道碑銘 竝序

우리 선조대왕조의 임진난때에 충무공 이순신이 왜적을 동남 해중에서 크게 섬멸시키고 명성이 조선과 중국에 떨쳐서 중흥의 제일 원훈이 되었는데 처음에서 끝까지 충무공을 좌우에서 보좌하여 기계를 내어 승리하게 된 것은 후세에서 말하는 사람이 충무공을 일컬을 적에 반드시 그 둘째 손가락을 꼽는 사람은 식성군 李公이 그 분이시다.
公은 영남의 청도군 출신인데 선대의 세계는 재령에서 나왔으니 載寧君 문하시중 우칭의 후손이다. 휘는 운룡(雲龍)이고 자는 景見이다. 나이 24세에 무과에 올라 선전관에 임명되었는데 서애 유선생이 병조판서에 재직하면서 邊鎭의 방비가 허소한 이유로써 공의 재간을 천거하여 옥포만호로 삼고는 경상우수사 원균에게 예속케 하였다.
이때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니 조정과 민간이 편안해져서 직무를 태만하면서 전쟁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원균이 갑작스럽게 해상에 왜적의 변고가 있어서 부산진과 동래성이 모두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진영을 버리고 피난하려고 하므로 공이 항언하기를 "「使君은 나라의 중책을 맡고 있으니 의리상 마땅이 경내를 고수하여 死節해야만 할 것이오 이 지역은 곧 전라 충청의 요충이니 이 지역을 잃게 되면 전라 충청을 잃게 될 것이요 지금 우리 군졸이 비록 피폐할지라도 그대로 保守할 수가 있을 것이요 또 듣건대 전라 수군이 건재하고 그 수사인 이순신은 명장이라고 하니 구원을 청하여 함께 해로를 막는다면 남방의 일은 성공할 수가 있을 것이요 계책이 이 일보다 좋은 것은 없는데 이 일을 아니하고 어디로 가려고 하오 하니 원균은 이를 어렵게 여기면서 누가 능히 나를 위하여 전라도에 심부름을 갈 사람이 있겠는가"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율포만호 李英南이 평소부터 이순신과 서로 알고 있으니 심부름을 보낼만하오」하니 원균이 그대로 따랐다. 이영남이 순신의 군영에 가서 그가 온 이유를 상세히 말하니 순신이 즉시 부하의 병졸을 거느리고 그가 창조한 거북선과 전선(戰船) 80척을 이끌고서 원균과 노량에서 만났으며 李億棋도 또한 전라우수사의 병졸을 거느리고 뒤따라 이르렀다.
처음에 원균이 이미 使者(이영남)를 발송시켜 놓고도 오히려 의심과 두려움을 품고서 군대를 옮겨 남해로 향하여 가다가 전라 수군을 보고는 또한 돌아오게 되었다. 이에 경상 전라의 양군이 서로 전후에서 협격(挾擊)하게 되었는데 공이 선봉장이 되어 5월 십일에 적을 옥포양중(玉浦洋中)에서 만나 분격하여 이를 크게 깨뜨리고 적선 50척을 불살라 부수었으며 또 영등양(永登洋)에서 싸워 적선 10여척을 불살라 버렸다. 다시 사천의 당포에 있는 적을 추격하여 이를 패퇴시키니 군대의 성세가 더욱 크게 떨쳐졌다.
六월에 적을 추격하여 진해양에 이르니 적은 수군으로서 사면에 떼지어 옹위(擁衛)받으면서 선상에 층루(層樓)와 와옥(瓦屋) 지은 것이 3척이나 되는데 기치(旗幟)와 번당(幡幢)의 노란빛과 푸른빛이 번쩍 번쩍 광채가 나서 보는 사람이 눈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공은 영등포만호 禹致績과 함께 종일토록 힘을 다하여 싸웠으며 대포로서 그 누선(樓船)을 깨뜨렸다.
날이 어두워 사졸들이 매우 피곤해 졌으므로 퇴각하려고 하였다. 공은 우치적을 불러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퇴각할 수 없다고 하고는 철색(鐵索)을 사용하여 적선의 남은 것을 연달아 끌어당겨 해중에 와서 이를 뒤엎으니 적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다가 물에 빠져서 서로 송장을 베고 죽었으며 전쟁에서 얻은 금은 보화와 병장기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七월에 적이 또 전선 수백척을 모아 가지고 見乃梁을 지나려고 하는데 공아 계책을 써서 먼저 병졸로써 적군의 강약을 시험헤 보고는 두 세 번 교전한 후에 퇴각하는체 하면서 적을 외양(外洋)으로 유인하고는 배를 돌려 맞아 공격하였는데 순신의 군대가 그 후면을 공격하니 포화가 바닷물을 끓게 하였다. 적병 수만명을 죽였는데 바닷물이 모두 붉게 되었다. 그 후 6일만에 또 安骨浦中에서 적의 누선 30척을 쳐 깨뜨리니 적이 이로부터 감히 內洋으로 들어오지 못하였다. 전라 충청의 해상 수송로가 막히지 않은 것은 공의 힘이었다.

원균은 이번 싸움에 여러 장사(將師)들이 얻은 전리품인 적의 수급을 수거해서 조정에 계문하여 자기의 공로로 삼았는데 남해현령 기효근(奇孝謹)은 싸움을 시작하자 배를 이끌고 퇴각해 달아났다. 공은 군법으로써 논죄하기를 청했으나 원균은 듣지 않았으며 효근의 선물을 사사로이 받고서 도리어 효근을 편들었다. 공은 이로부터 이를 개의하지 않으니 순신이 이 일로서 원균을 정직하게 여기지 않고 공을 현명하게 여겼다. 이해 가을에 가덕포에 진출하여 진을 치고서 군대의 위세를 보이면서 부산에 가까이 가니 부산에 있는 적이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려 했으나 감히 출전하지 않았다.
癸巳년(1593)에 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비로소 체부(體府 : 體察使의 駐營)에 공의 공로를 올리고 또 공을 천거하여 자기 후임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며 체찰사 李元翼이 순찰차 공을 특별히 불러보고 위유(慰諭)하였다.
乙未년(1596)에 공로에 대한 상으로 통정대부로 가자하였으며 丙申년(1596)에는 웅천(熊川)현감에서 동래현령으로 임명되더니 조금 후에 경상좌수사에 임명되었다. 이보다 먼저 명나라에서 심유경(沈惟敬)을 보내어 왜적과 더불어 화친을 하니 왜적이 점차로 군대를 철수하여 가는데 공은 그들의 허위을 헤아려 알고서 鹽浦에 진을 쳐서 병사를 교련하고 전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면서 늘 왜구가 침범해 올 것처럼 경계하였다.
丁酉년(1597)에 加藤淸正이 서생포에 있으면서 통역자에 묻기를 " 듣건대 명장 한 사람이 右道 바다에서 왔다고 하는데 수사(水使 :이운룡)가 이사람인가 " 하면서 마음속으로 공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이 해에 원균이 충무공을 대신해서 통제사가 되었으나 패전하여 죽고 한산진(閑山陳)이 적에게 빼았겼다. 도원수 권율이 공을 격서(檄書)로 불러서 화산군 권응수와 함께 영천의 창암에서 적을 섬멸하게 하였다. 이 해 겨울에 명나라 경리 楊鎬를 따라 대왕암에서 진격하여 도산을 포위하였다.
明年(1598) 가을에 다시 명나라 장수를 따라 경주에 이르러서 적병 4명을 포로로 잡아 그들의 입을 통하여 관백(關白:풍신수길을 말함)이 이미 죽고 그 나라에서 내란이 있는 것을 알고는 먼저 군사를 정돈하여 부산양에서 돌아가는 적을 쫓아 공격하였다. 적이 가고난 후 군사를 돌이켜 엤 水營에 들어가서 백성을 불러모아 둔전을 설치하고 賊地를 수리하여 모두 완비하게 되었다. 그 해 가을에 어떤 일로서 파면되었는데 한음 이덕형공이 영남체찰사가 되어 공이 해로를 잘알고 있는 이유로서 불러와서 막장(幕將)을 삼고는 사무를 자문 처결하였다. 함께 해상의 영루를 두루 살펴보고는 조정에 계청하여 좌수사로 복직시켰다. 조금 후에 母부인의 병세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서 빨리 고향에 가서 살폈더니 통제사 柳珩이 진영을 이탈한 것이라 하여 탄핵하여 잡아와 옥에 가두었다가 곤장을 쳐서 서생포로 귀양보내었다. 그가 옥에서 나오자 모부인께서 과연 회생하지 못하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원통히 여겼는데 조금후에 귀양에서 풀려 집으로 돌아왔다.
甲辰년(1604)에 공을 효충장의 선무공신으로 책록하고 식성군(息城君)으로 봉하고 사물(賜物)을 규정과 타이 불사하였다.
己巳년(1605)에 조정에서 서울로 불러 올리고 도총부부총관 포도대장 겸화기제조에 임명하고 비변사 당상을 가직하여 조정의 기무에 참문하게 되었다. 조금 후에 외직으로 나가서 통제사가 되어 3년동안을 있었는데 요로에 있는 사람의 무고를 당하여 체직되어 집에 돌아왔는데 곧 비변사의 천거로 함경도병마사로 임명되었다. 공은 북방의 군무가 결점이 많은 것을 보고는 별대의 기병을 창립하고 갑산산성을 수축하였다. 임기가 차서 다시 충청수사로 임명되었다.
庚戌년(1610) 7월 2일에 병으로 집에서 별세하니 향년 49세였다. 부고가 위로 알려지니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지의금부사의 관작을 증직하였다. 그 해 10월에 법귀산 선영의 아래에 장사를 치렀는데 후일에 의령군 기강 웅산(雄山)에 이장하였다. 공의 고(考: 아버지)는 몽상(夢祥)이니 남해현령인데 증직은 병조참판 재령군이며 조부는 우(友)이니 부령(富寧)부사인데 증직은 병조참의이며 증조는 영원(英元)이니 제용감正인데 증직은 통례(通禮)이다. 아들은 엄(儼)이니 관직은 평택현감 사헌부감찰이고 딸은 사인박위(朴瑋)에게 시집갔다. 공은 비록 가문이 대대로 무예에 종사하였지마는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하였다. 천자(天姿)가 온화하고 침착하여 평상시에는 신실(信實)스러운 장자(長者)다웠으며 위난에 임하거나 제변(制變)을 요할 때에는 신채(神采)에 날카로움이 나타났다. 강한 구적중(寇賊中)에 드나들면서 분격하여 자신은 돌보지 않고서 싸울 때 마다 공(功)이 있었다. 내가 일찍이 국조의 역사를 살펴보니 해상의 전후 수십여 전첩(戰捷)이 모두 충무공의 사실에만 있고 공은 참여되지 아니했으니 대개 충무공이 대장이 되고 공은 부장(副將)이 된 까닭으로 이를 간략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공이 원균에게 힘껏 찬조한 한마디 말씀이 있지 않았다면 충무공이 반드시 전라의 중진을 떠나서 영남으로 부원하지 않했을 것이다. 공이 충무공의 내원(來援)을 있게 하지 않했다면 원균이 도주함으로써 전라 충청을 잃게 될 것이고 전라 충청을 잃게됨으로써 적의 함선은 서울의 한강으로 바로 달려 갔을 것이다. 공과 우치적 등 여러 장수들이 힘을 다해 싸워서 앞장서는 일이 없었다면 비록 충무공의 침착한 기지와 정묘한 계락이 있더라도 장차 그 요기(妖氣 : 재화 곧 倭賊을 말함)를 신속히 소탕하는 공로를 그와 같이 뛰아나게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한(李翰 : 唐代의 史官)이 비록 허원(許遠)을 위해서는 전기를 쓰지 안 했지마는 그러나 허원이 장순(張巡)을 추대하여 주장(主將)으로 삼았으니 허원이 공로가 어찌 뜻밖에 장순의 아래에 있겠는가 애석하게도 전란이 평정된 날에 나라의 정권을 잡은 이는 公의 이런 사실로써 임금에게 면알하여 아뢰는 이가 없었고 봉상시에는 시호(諡號)내리는 일을 논의하지도 아니하여 녹훈이 삼등공신에 그치게 되었으며 또 그 후사가 영낙고단(零落孤單)하므로 신도에 마땅히 비석(碑石)이 있어야 할 것인데도 글을 짓는 이가 없었다.
公의 족후손 현덕(鉉德)이 이를 위하여 개연히 여기고는 택당 이식(李植, 호 澤堂)공이 찬술한 묘비명(墓碑銘)을 가지고 와서 한 마디의 말을 해주기를 간곡히 청하는데 내가 사람이 보잘 것이 없는 줄을 잘 알지마는 그러나 다만 택당의 설을 전술할 뿐이고 창작한 것은 아니니 이것이 혹시 크게 분수에 지나침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마침내 그 사적을 술하고는 명(銘)으로서 뒤에 붙인다.
명(銘)은 이러하다.


옛날의 임진 癸巳년에 국운이 간난(艱難)하였네 섬의 적괴(賊魁)가 난리를 일으키니 수로 육로 두 방면으로 침공해 왔다 해면에서는 더욱 강하여 고래처럼 노후(怒吼)하고 돼지처럼 돌진하였네 열진이 뿔뿔이 흩어지니 풍문만 듣고서 넋을 잃었네 이 때에 식성군은 만호란 낮은 관직에 있었네 흉중의 도략(병법을 말함)은 풍부하였지마는 한 보루의 책임자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이에 주장(主將 : 원균)에게 적병을 격파할 계책을 알렸다. 전라도에 군사를 청해 와서 서로 합세하여 적을 격멸하자 했다 전라 수군은 기세가 산악처럼 웅장하였네 옥포에서 칼날을 겨루었고 한산에서 살촉을 씼었도다 바다 가운데서 오전하니 포화가 바다 물을 끓게 하고 붉게 하였네 괴사가 죽게 되니 형세가 산모퉁이가 무너진 듯 하였네 체부에서 功을 알리니 조정 대관들이 놀라서 안색이 변했네 왕의 행차가 멀리 용만 북쪽에서 돌아왔네 종사(宗社)가 재차 편안해졌고 강토(彊土)가 깨끗해졌네 왕은 감탄하면서 말씀하시길 그대의 공적을 가상히 여겨 아경(亞卿: 참판급의 관직)을 뛰어 승진시키고 맹부(盟府)에 공훈을 기록하게 하라 융단(戎壇)을 참문하였다. 음우(陰雨 : 전란의 징조)를 잊지 못함은 강토가 막중하기 때문이다. 나가서 웅진을 지키니 큰 기와 긴 창을 세웠네 군졸을 교련하고 둔전을 설치하니 성벽의 정채가 일신되었다 남방의 왜적은 성심으로 복종하고 북방의 호우는 두려워서 굴복하였다. 다만 공의 해전 대첩은 충무공도 그 자리를 양보했는데 부장이 된 까닭으로 숨겨져서 역사에 기재되지 아니했으며 또한 자신이 별세한 후에도 그 시호가 내려지지 아니했다. 삼백년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공론이 모두 애석히 여겼네 사실을 고증함에는 이택당의 비문이 넉넉히 말해주네 내가 전술하여 명(銘)을 만들어 이 비석에 새기게 되었노라 이로서 후인에게 알리니 지나는 사람은 경의(敬意)를 표할 지어다. <식성군실기에서 >

덧글

  • 데프레 2008/09/24 12:39 # 삭제

    이운룡은 충무공이 특별히 신임했던 인물로 어떻게보면 충무공의 수제자격의 인물이죠. 이영남도 그렇지만 이운룡도 원균밑에서 엄청나게 고생했죠.ㅡ_ㅡ;;
    그리고 이운룡이 해전에서 조정의 상찬을 받지 못한 이유중의 하나가 정운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바로 이순신의 측근이였다는 점이었죠.ㅡㅡ;;
    이순신이 난중일기에서 이운룡을 평하기를 "내 뒤를 이어 삼도수군을 이끌만한 재목이다."고 햇죠.
    관직명에서도 나타나듯 훗 날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합니다.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자리에 이순신의 사당인 제운당을 세운이가 이운룡입니다.
  • Luthien 2008/09/26 08:18 #

    관련 글을 하나 쓰려다 말려다 하고 있는데...우야될지 모르겠습니다.
※ 이 포스트는 더 이상 덧글을 남길 수 없습니다.


트위터+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