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0년 전인 1555년.
소위 을묘왜변으로 알려진 대규모 왜구침략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실록은 당시의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해설을 위해 제가 가끔 끼어들기성 주해를 첨부합니다)
《명종 018 10/05/30(계해) / 전라도 방어사 김경석이 군관 남정을 보내 장계를 올리니 사정전에세 인견하다 》
전라도 방어사(全羅道防禦使) 김경석이 군관(軍官) 남정(南井) 보내 장계(狀啓)를 가지고 올라왔으므로 상이 사정전(思政殿)에서 인견(引見)하였다. 상이 남정을 앞으로 다가오도록 하여 이르기를,
“서로 싸울 때의 일과 보고 들은 일을 자세하게 말하라.”
하니, 남정이 아뢰기를,
“당 초에 왜적(倭賊)들이 영암(靈巖)에 와서 향교(鄕校)를 차지하고 있을 적에, 적장(敵將)인 자는 성전(聖殿)의 위판(位版)을모시는 교의(交倚)에 앉아 명령을 내리고 있고 누른 빛깔의 기(旗)를 든 선봉(先鋒)인 자가 그 기를 낮추었다 높혔다 하여 마치우리 군사를 부르는 것과 같은 모양을 하였고 또 칼과 창을 휘두르고 박수(拍手)치며 소리를 질렀는데 그 소리가 천지를진동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당시 쳐들어온 왜적은 단순한 "해적" 이 아니라 영주급이라는 뜻입니다.
여 염(閭閻)의 사람들이 모두 성 안에 모여들어서 처음에는 순찰사와 방어사가 내려온다는 소문을 듣고모두들 이를 믿으며 안정되어 있다가 왜적들의 떠드는 소리를 듣고서는 기가 꺾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주장(主將)이 군관을시켜 통유(通諭)하여 동요되지 않도록 하고, 또한 군중(軍中)에 전령(傳令)하기를 ‘나아가 싸우는 사람은 살고 물러나는 사람은죽을 것이다. 너희들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없는가.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한결같게 가져야 한다. 물러서다 죽는 것이 어찌 나아가싸워 살게 되는 것만 하겠는가.’ 하니, 한참 만에 사람들의 마음이 저절로 안정되었습니다.
필생즉사, 필사즉생, 어디서 많이 들어본 구언이지요. 사실 오자병법에서 나왔으니 누가 인용해도 문제 없는 말이긴 합니다만, 중요한건 이게 아니고...바로 다음 부분입니다.
그 이튿날 왜적들이 모두 동문(東門) 밖에 모여 칼을 빼들고 날뛰며 위세를 보이므로 주장이용맹스럽고 건장한 활 잘 쏘는 사람 15명을 뽑아 적들의 기세를 살펴보며 접전(接戰)하게 하려 하니 왜적들이 되돌아 서서 서로희롱하는 짓을 하며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을 보이었습니다. 우리 군사가 장전(長箭)을 쏘자 칼로 받아쳐 맞추지 못하게 하다가편전(片箭)을 쏘자 왜인(倭人)들이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이, 이자식들 뭡니까.
(참고사진: 유엽전)
그러니까...대충 이런 걸 칼로 쳐내셨단 말이지요. 네에.
아무리 길이 80cm 정도의 유엽전이라지만, 최고 초속 75m라면 왠만큼 멀리 날아가도 180km/h 는 된다고요?
화살 쳐내는 것 자체는 수련 열심히 하면 못할건 없겠지만서도... 분명 조선군이 집중사격 했을텐데 그걸 받아쳤다니 조금 사기스럽긴 하네요. 왜구 아저씨들. 소드맛스타 확정.
...그런 아저씨들을 쫒아내버리는 편전이란 것도 무섭긴 마찬가집니다만.
참고로 이 왜구 아저씨들이 어떻게 되었냐 하면...
신이 전주(全州)의 효용군(驍勇軍) 6명과 함께 향교를 살펴보니, 왜장(倭將)이 위판 모시는 교의에 걸터 앉아 있기에 신이 편전을 쏘자 화살이 그가앉아 있던 옆의 기둥에 맞았는데 우리 군사가 일시에 모두 쏘아 그의 왼쪽 다리를 맞추자 왜장이 칼로 자기 휘하(麾下)들을 치므로칼에 맞은 사람들이 모두 다쳤습니다. 주장이 화전(火箭)을 쏘도록 했었는데 마침 서풍(西風)이 크게 일어 화전이 빠르게 나가므로승세를 타고 쫓아가니 왜적들이 모두 향교로 들어갔습니다. 우리 군사들이 쏘아대는 화살이 비 오듯 하자 적들이 드디어 기세를 잃고무너져 도망하므로 인하여 적의 머리 1백 4급을 베고 또 패하여 도망하는 적을 쫓아가 6급을 더 베었는데 나머지는 모두 사방으로흩어졌습니다.
신이 나올 때에 좌도 방어사(左道防禦使) 남치근(南致勤) 및 병사 조안국은 패하여 도망하는 도적을 추적하려 하여 작천(鵲川)에 진을 쳤는데, 작천은 병영(兵營)·강진(康津)·영암이 서로 만나는 데입니다. 주장은 추격하려 하다가 왜적들이 이 틈을 타고 성으로 들어오게 될까 싶으므로 감히 추격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화살 맞고 쫒겨나긴 했습니다. (...)
그나저나 결국엔 "조선군이 왜군을 육박전으로 이긴 사례" 네요.
소위 을묘왜변으로 알려진 대규모 왜구침략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실록은 당시의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해설을 위해 제가 가끔 끼어들기성 주해를 첨부합니다)
《명종 018 10/05/30(계해) / 전라도 방어사 김경석이 군관 남정을 보내 장계를 올리니 사정전에세 인견하다 》
전라도 방어사(全羅道防禦使) 김경석이 군관(軍官) 남정(南井) 보내 장계(狀啓)를 가지고 올라왔으므로 상이 사정전(思政殿)에서 인견(引見)하였다. 상이 남정을 앞으로 다가오도록 하여 이르기를,
“서로 싸울 때의 일과 보고 들은 일을 자세하게 말하라.”
하니, 남정이 아뢰기를,
“당 초에 왜적(倭賊)들이 영암(靈巖)에 와서 향교(鄕校)를 차지하고 있을 적에, 적장(敵將)인 자는 성전(聖殿)의 위판(位版)을모시는 교의(交倚)에 앉아 명령을 내리고 있고 누른 빛깔의 기(旗)를 든 선봉(先鋒)인 자가 그 기를 낮추었다 높혔다 하여 마치우리 군사를 부르는 것과 같은 모양을 하였고 또 칼과 창을 휘두르고 박수(拍手)치며 소리를 질렀는데 그 소리가 천지를진동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당시 쳐들어온 왜적은 단순한 "해적" 이 아니라 영주급이라는 뜻입니다.
여 염(閭閻)의 사람들이 모두 성 안에 모여들어서 처음에는 순찰사와 방어사가 내려온다는 소문을 듣고모두들 이를 믿으며 안정되어 있다가 왜적들의 떠드는 소리를 듣고서는 기가 꺾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주장(主將)이 군관을시켜 통유(通諭)하여 동요되지 않도록 하고, 또한 군중(軍中)에 전령(傳令)하기를 ‘나아가 싸우는 사람은 살고 물러나는 사람은죽을 것이다. 너희들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없는가.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한결같게 가져야 한다. 물러서다 죽는 것이 어찌 나아가싸워 살게 되는 것만 하겠는가.’ 하니, 한참 만에 사람들의 마음이 저절로 안정되었습니다.
필생즉사, 필사즉생, 어디서 많이 들어본 구언이지요. 사실 오자병법에서 나왔으니 누가 인용해도 문제 없는 말이긴 합니다만, 중요한건 이게 아니고...바로 다음 부분입니다.
그 이튿날 왜적들이 모두 동문(東門) 밖에 모여 칼을 빼들고 날뛰며 위세를 보이므로 주장이용맹스럽고 건장한 활 잘 쏘는 사람 15명을 뽑아 적들의 기세를 살펴보며 접전(接戰)하게 하려 하니 왜적들이 되돌아 서서 서로희롱하는 짓을 하며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을 보이었습니다. 우리 군사가 장전(長箭)을 쏘자 칼로 받아쳐 맞추지 못하게 하다가편전(片箭)을 쏘자 왜인(倭人)들이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이, 이자식들 뭡니까.
(참고사진: 유엽전)
그러니까...대충 이런 걸 칼로 쳐내셨단 말이지요. 네에.
아무리 길이 80cm 정도의 유엽전이라지만, 최고 초속 75m라면 왠만큼 멀리 날아가도 180km/h 는 된다고요?
화살 쳐내는 것 자체는 수련 열심히 하면 못할건 없겠지만서도... 분명 조선군이 집중사격 했을텐데 그걸 받아쳤다니 조금 사기스럽긴 하네요. 왜구 아저씨들. 소드맛스타 확정.
...그런 아저씨들을 쫒아내버리는 편전이란 것도 무섭긴 마찬가집니다만.
참고로 이 왜구 아저씨들이 어떻게 되었냐 하면...
신이 전주(全州)의 효용군(驍勇軍) 6명과 함께 향교를 살펴보니, 왜장(倭將)이 위판 모시는 교의에 걸터 앉아 있기에 신이 편전을 쏘자 화살이 그가앉아 있던 옆의 기둥에 맞았는데 우리 군사가 일시에 모두 쏘아 그의 왼쪽 다리를 맞추자 왜장이 칼로 자기 휘하(麾下)들을 치므로칼에 맞은 사람들이 모두 다쳤습니다. 주장이 화전(火箭)을 쏘도록 했었는데 마침 서풍(西風)이 크게 일어 화전이 빠르게 나가므로승세를 타고 쫓아가니 왜적들이 모두 향교로 들어갔습니다. 우리 군사들이 쏘아대는 화살이 비 오듯 하자 적들이 드디어 기세를 잃고무너져 도망하므로 인하여 적의 머리 1백 4급을 베고 또 패하여 도망하는 적을 쫓아가 6급을 더 베었는데 나머지는 모두 사방으로흩어졌습니다.
신이 나올 때에 좌도 방어사(左道防禦使) 남치근(南致勤) 및 병사 조안국은 패하여 도망하는 도적을 추적하려 하여 작천(鵲川)에 진을 쳤는데, 작천은 병영(兵營)·강진(康津)·영암이 서로 만나는 데입니다. 주장은 추격하려 하다가 왜적들이 이 틈을 타고 성으로 들어오게 될까 싶으므로 감히 추격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화살 맞고 쫒겨나긴 했습니다. (...)
그나저나 결국엔 "조선군이 왜군을 육박전으로 이긴 사례" 네요.
덧글
* 요즘은 중갑 착용하는 시대도 아닌데, 편전을 특수부대용 무성병기로
활용할 순 없을려나... (효율적인 사법이 아직 복원되진 않았지만...)
그때의 전쟁용 각궁은 이미 맥이 끊겼고 레저용으로 약한 거만 이어지고 있음.
게다가 원래 활이라는 것이 곡사이기 때문에 무를 숭상하며 평생 칼질하다 죽는 일본 무사면 쳐낼수도 있겠네요.
게다가 얘네 갑빠가 의외로 좀 억세서 활로는 잘 뚫리지 않았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