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7년 녹둔도 전투는 "패전인가?"

선조는 과연 찌질하기만 한 군주였을까? 에서 트랙백.
읽다 보니, 녹둔도에서 충무공의 죄과와는 관계없이 전투 자체는 패전이라고 보시는 분들이 적지 않은것 같아 첨언합니다.


1. 일단 녹둔도에 대해 잘 알려진 기록은 선조수정실록입니다.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요한 부분은 강조 처리 합니다)

《 선수 021 20/09/01(정해) / 적호가 녹둔도를 함락시켜 둔전이 폐지되다 》
적호(賊胡)가녹둔도(鹿屯島)를 함락시켰다. 녹둔도의 둔전(屯田)을 처음 설치할 적에 남도(南道)의 궐액군(闕額軍)을 예속시켜 경부(耕夫)로삼았는데 마침 흉년이 들어 수확이 없었다.
이 해에 조산 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에게 그 일을 오로지 관장하게 하였는데가을에 풍년이 들었다. 부사 이경록(李慶祿)이 군리(軍吏)를 거느리고 이순신과 추수를 감독하였다.
추도(楸島)의호추(胡酋) 마니응개(?尼應介)가 경원(慶源) 지역에 있는 호인의 촌락에 화살을 전달하고서 군사를 숨겨놓고 몰래 엿보다가 농민이들판에 나가고 책루(柵壘)가 빈 것을 보고 갑자기 들어와 에워싸고 군사를 놓아 크게 노략질하였다. 수호장(守護將)오형(吳亨)·임경번(林景藩) 등이 포위를 뚫고 책루로 들어가다가 모두 화살을 맞아 죽었다.
마니응개는 참루(塹壘)를뛰어넘어 들어오다가 수장(戍將) 이몽서(李夢瑞)에게 사살되었다. 적호(賊胡)가 10여 인을 살해하고 1백 60인을 사로잡아갔다. 이경록·이순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적 3인의 머리를 베고 포로된 사람 50여 인을 빼앗아 돌아왔다. 병사(兵使)이일(李鎰)이, 이순신에게 죄를 돌림으로써 자신은 벗어나기 위하여 형구를 설치하고 그를 베려 하자 순신이 스스로 변명하기를,“전에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신보하여 더 보태주기를 청하였으나 병사가 따르지 않았는데 그에 대한 공첩(公牒)이 있다.” 하였다.
이일이 수금하여 놓고 조정에 아뢰니 ‘백의 종군(白衣從軍)하여 공을 세워 스스로 속죄(贖罪)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상이수병(戍兵)이 죽은 것을 애도하여 호당(湖堂)에 명하여 시를 지어 조문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둔전(屯田)이 폐지되었는데, 논하는이들은 정언신(鄭彦信)이 실책(失策)한 것으로 탓하였다.
이순신이 순변사(巡邊使)의 휘하에 종군하여 반로(反虜)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아서 드디어 죄를 사면받았는데 이로부터 유명해졌다.
【원전】 25 집 570 면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군사-전쟁(戰爭) / *군사-부방(赴防) / *사법-탄핵(彈劾) / *농업-전제(田制) / *인물(人物)

에로거북이님이 말씀하신 대부분의 내용은 여기에 해당합니다.
다른 사료의 기록은 어떨까요.


2. 선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선조 21권, 20년(1587 정해 / 명 만력(萬曆) 15년) 10월 10일(을축) 2번째기사
북병사가 적호가 침입했을 때 군기를 그르친 경흥 부사 이경록 등을 가두었다고 보고하다

북병사(北兵使)가 치계하였다.
“적호(賊胡)가 녹둔도 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경흥 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 과 조산 만호(造山萬戶)이순신(李舜臣) 이 군기를 그르쳐 전사(戰士) 10여 명이 피살되고 1백 6명의 인명과 15필의 말이 잡혀갔습니다. 국가에 욕을끼쳤으므로 이경록 등을 수금(囚禁)하였습니다.”

【태백산사고본】 11책 21권 16장 A면
【영인본】 21책 438면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사법-탄핵(彈劾)

이 사건에 대한 사후처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조 21권, 20년(1587 정해 / 명 만력(萬曆) 15년) 10월 16일(신미) 1번째기사
비변사가 이경록과 이순신을 잡아올 것을 청하자 백의종군 시키다

이경록(李慶祿) 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태백산사고본】 11책 21권 16장 B면
【영인본】 21책 438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정(軍政)

선조실록의 기록은 두 가지 측면에서 수정실록과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경흥부사 이경록이 함께 거론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조 처리한 대목입니다.
과연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라는 부분을 "패배" 라고 볼 수 있을까요?
참고로 선조는 "진짜 패전" 에 이렇게 대응했습니다.

선조 17권, 16년(1583 계미 / 명 만력(萬曆) 11년) 2월 9일(임진) 1번째기사
북병사가 경원부와 안원보가 함락되었다고 보고하자 김수와 양사의를 베라고 명하다

북병사(北兵使)의 서장에 ‘ 경원부 와 안원보(安遠堡) 의 성이 함락되었다.’고 하였다. 상이 경원부사 김수(金璲) 와 판관양사의(梁士毅) 는 성을 지키지 못하였으므로 잡아오더라도 별도로 물을 일이 없는 이상 바로 진전(陣前)에서 목을 베어군율(軍律)을 진작시키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다만 병사(兵使)로 하여금 베게 할 것인가, 아니면 순찰사가 내려간 뒤에 베도록 할것인가에 대하여 대신들에게 물었는데, 대신들의 논의는 순찰사가 내려가서 안핵(按覈)한 후에 목을 베는 것이 온당하다고 하였다.
밤에 큰 눈이 몇 자씩 내려 인마(人馬)가 통행할 수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9책 17권 1장 B면
【영인본】 21책 384면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사법-탄핵(彈劾) / *과학-천기(天氣)

선조 17권, 16년(1583 계미 / 명 만력(萬曆) 11년) 2월 12일(을미) 1번째기사
성을 함락당한 김수 등을 목베어 군율을 엄히 하라는 전교
 
 전교하였다.
“예로부터 군령(軍令)을 엄하게 하지 않고서 나라를 제대로 다스린 자는 없었다. 김수(金璲) 등을 평상시와 같이 순찰사가 내려가서 추고하여 계문한 다음 조치하도록 하였는데 패군(敗軍)하여 성을 함락당한 장수에 대해서 어찌 오래도록 왕법(王法)을 지체할 수 있겠는가. 빨리 선전관을 보내어 그들의 목을 베라.”
 
【태백산사고본】 9책 17권 3장 A면
【영인본】 21책 385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정(軍政)

선조 17권, 16년(1583 계미 / 명 만력(萬曆) 11년) 윤2월 5일(무오) 1번째기사
선전관 이극신이 김수의 형을 집행했다고 보고하다
 
선전관(宣傳官) 이극선(李克善) 이 김수(金璲) 의 형을 집행한 후 서울에 들어와 아뢰기를,
“신이 지난달 24일 행영(行營)에 도착하여 전지(傳旨)를 북병사 이제신 에게 보였더니, 대체로 사수(死囚)의 형을 집행하는 데는 반드시 3일을 지나고 나서 집행하는 것이지 바로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므로 3일을 기다렸다가 26일 해시(亥時)에 형을 집행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선전관이 내려갔는데도 즉시 형 집행을 하지 못하게 한 이제신 의 죄가 더 중하니 그를 추고하도록 전지(傳旨)에 그 조항을 추가 기입하고, 이극선 도 함께 금부(禁府)에 내려 추고하라.”
하였다. 이극선 은 처음에는 공죄(公罪)를 적용하여 장 일백(杖一百)으로 결정하였는데 사간원이 죄가 가볍다 하여 파직할 것을 청하였고, 뒤에 사헌부에서는 또 그 죄가 군율(軍律)을 그르친 죄인데도 금부(禁府)에서는 표신(標信)을 계류(稽留)시킨 것으로만 조율(照律)했다 하여 다시 조옥(詔獄)에 내려 추고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장 일백에 유 삼천리(流三千里)로 조율하고 공의(功議)1024) 에 따라 각각 1등씩 감하였다.
 
【태백산사고본】 9책 17권 8장 B면
【영인본】 21책 387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정(軍政)

그냥 베어버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목 늦게 벤다고 담당자 곤장에 파직까지 일사천리입니다.
사간원과 사헌부가 너무 심한거 아니냐고 하는데도 결국 그대로 밀어붙인것이 당시의 선조입니다.
참고로 이때 사형당한 김수는...

선조 14권, 13년(1580 경진 / 명 만력(萬曆) 8년) 윤4월 3일(신축) 2번째기사
순무 어사 김성일이 올린 장계에 따라 변장으로 충실한 김수 등을 당상관으로 삼다

함경도 순무 어사(巡撫御史) 김성일(金誠一) 의 장계로 인해, 변장(邊將)으로서 그 직책을 충실히 다한 혜산 첨사(惠山僉使)김수(金璲) 를 당상관으로, 영건 만호(永建萬戶) 우응신(禹應辰) · 정현룡(鄭見龍) · 김광옥(金光玉) 등을 선전관으로 삼도록하교하였다.
 
【태백산사고본】 8책 14권 2장 A면
【영인본】 21책 360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일처리 잘한다고 대폭 승진해서 첨사에서 부사까지 확 뛰어올라갔던 인물입니다.
즉 선조가 굉장히 변덕스러워서 종잡을수가 없거나 자신이 찍어둔 사람에게만 극단적 편애를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면 (맞나요?) 녹둔도를 털린 충무공은 목과 몸이 분리될수밖에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아마 중신들도 김수의 예에서 보듯이 굽실거리거나 부추겼겠지요)
즉, 당시 선조 휘하 조정은 녹둔도의 전과를 "패전" 이라고 보지 않거나, 적어도 "대패"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3. 그리고 현장에서 충무공의 상관이자 또다른 책임자였던 - 그리고 함께 백의종군을 명 받은 경흥부사 이경록은 이후에도 실록에 등장합니다.

선조 23권, 22년(1589 기축 / 명 만력(萬曆) 17년) 8월 16일(신묘) 2번째기사
이조에 김원룡은 허수아비 같아서 탐라를 맡길 수 없다고 전교하고 이혼 등의 제수를 명하다

정사(政事)가 있었다. 이비(吏批)에게 전교하기를,
“ 김원룡(金元龍) 은 허수아비와 같은 사람이라 탐라(耽羅) 를 맡길 수 없다. 이경록(李慶祿) 을 죄폐(罪廢)된 중에 기용한것은 비록 재주를 아끼는 뜻에서 나왔으나 패군(敗軍)한 장수를 서용된 지 며칠 사이에 당상관(堂上官)으로 뛰어올리면정체(政體)가 전도(顚倒)될 것이다. 할 수 없다면 이혼(李渾) 을 제주 목사로, 손인갑(孫仁甲) 을 가덕포첨사(加德浦僉使)로, 이경록 을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삼으려 하니, 잘 의처(議處)하라.”
하니, 회계하기를,
"성교(聖敎)가 지당하시어 의논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2책 23권 10장 A면
【영인본】 21책 461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일단 여기에서는 죄폐, 패군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긴 합니다만...위계를 고려해 바로 중임을 맡기지 않았을 뿐, 조정 내에서 상당히 주목받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충무공만이 특혜를 받았던 게 아니었던 겁니다.
결국 이경록은 백의종군후 2년도 채 되지 않아 부사로 이동하고...

선조 23권, 22년(1589 기축 / 명 만력(萬曆) 17년) 8월 17일(임진) 1번째기사
제주 목사에 이경록을 제수하라는 전교

정사(政事)가 있었다. 이비(吏批)에게 전교하였다.
“제주 목사에 이경록 을 제수하라.”

【태백산사고본】 12책 23권 10장 B면
【영인본】 21책 461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하루가 지나 제주 목사직을 받습니다.
과연 이런 파격적인 인사가 "패배의 책임자" 에게 합당한 것일까요.
게다가 중신들은 굽실굽실일 뿐 선례를 논하며 반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3. 하지만 녹둔도가 여진족 러쉬에 털린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후에 시전부락에 조선공병 기병이 출동해 철거 및 평탄화작업을 한 것은 제쳐놓겠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렇게 관대할까요.
선조실록에는 이미 선례가 있습니다.

선조 21권, 20년(1587 정해 / 명 만력(萬曆) 15년) 10월 4일(기미) 1번째기사
녹둔도를 개간했던 병조 판서 정언신이 적호의 빌미가 되었다며 죄를 청하다
 
병조 판서 정언신(鄭彦信) 이 아뢰기를,
 “ 녹둔도(鹿屯島) 에 논밭을 일군 일은 전부 신에게서 발의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적호들이 침범해 와 사람과 가축들을 약탈해 갔다는 소문을 들었으니, 이는 모두 신의 그릇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일입니다. 먼저 신을 다스려 조야(朝野)에 사과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 녹둔도 는 오랑캐의 지역과 너무 가까워 오랑캐들이 침입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로서 처음부터 이같은 일이 생기리라는 것을 우려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본도(本島)는 조종조 때부터 우리의 농장이었는데, 경이 군량이 어려운 형편에 놓인 것을 목도하고 백성들을 들여보내 농사를 짓도록 한 것인데 이것이 어찌 잘못인가. 설사 차질을 빚었다고 하더라도 지혜로운 사람도 많은 생각 중에 반드시 한 번은 실수하는 법이니, 경이 국사(國事)에 마음을 다하는 충성에야 어찌 손상됨이 있겠는가. 내 어떻게 경에게 허물을 주어 국사를 돌보지 않고서 방관하는 자들의 웃음거리로 만들어 주겠는가. 부디 이것 때문에 스스로 위축되지 말고 알면서도 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21권 15장 B면
【영인본】 21책 437면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사후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조 187권, 38년(1605 을사 / 명 만력(萬曆) 33년) 5월 29일(임인) 2번째기사
서성과 김종득의 죄를 논하고 그 후임자에 대해서 의논하다

(상략)...상이 이르기를,
“둔전도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육진(六鎭)에는 반드시 둔전을 할 만한 곳이 없기 때문에 전일 정언신(鄭彦信) 이 녹둔도(鹿屯島) 에 둔전을 설치했다가 끝내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둔전도 쉽지는 않다.”
하자, 영경 이 아뢰기를,
녹둔도 의 경우 크게 벌렸던 까닭에 성공하기 어려웠으나, 지금은 각 진보(鎭堡)에 각각 군사를 늘려 편리한 대로 실행한다면 군량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충국(趙充國) 도 한편으로는 수비하고 한편으로 둔전하였으니, 지금 그 계모를 따라 둔전을 설치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하략)
 
【태백산사고본】 104책 187권 18장 B면
【영인본】 25책 74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군사(軍事) / *외교(外交) / *농업-전제(田制) / *호구-이동(移動) / *인물(人物)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4. 마지막으로...실록이 아닌 제승방략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녹둔도(鹿屯島)

조산보(造山堡)에 소속되어 있다.

【고사(故事)】
계미년(癸未年 1583, 선조 16)에 오랑캐가 변란(變亂)을 일으킨 이후에, 감사(監司) 정언신(鄭彦信)이 녹둔도(鹿屯島)에 군량미(軍糧米)를 저축하는 둔전(屯田)을 설치하고자 하여, 경흥 부사(慶興府使) 원호(元豪)로 하여금 땅을 개간(開墾)하여 둔전(屯田)을 설치하게 하였다. 그러나 본부(本府)의 힘이 모자라, 경작(耕作)하는 땅은 매우 적었다.
병술년(丙戌年 1586, 선조 19) 경에 조정(朝廷)에서 선전관(宣傳官) 김경눌(金景訥)을 보내어 ‘둔전관(屯田官)’이라 호칭하고 녹둔도(鹿屯島) 가운데에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남도(南道)에서 군적(軍籍)에 빠진 노예(奴隸)들을 농군(農軍)으로 삼고, 농기구(農器具)와 밭을 가는 소[耕]을 많이 들여보내어 땅을 널리 개간하고 곡식을 심었으나, 마침 흉년(凶年)이 들었기 때문에 군량미를 제대로 보충하지 못하였다.
다음해 정해년(丁亥年 1587, 선조 20)에 조산보 만호(造山堡萬戶) 이순신(李舜臣)으로 하여금 그 둔전을 아울러 맡아보게 하고, 지난해의 방법에 의하여 둔전(屯田)을 경작(耕作)하게 하였다.
가을철 9월에 이르러 경흥 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景祿)이 그가 관할하는 관내(管內)의 연호군(煙戶軍)을 이끌고 녹둔도(鹿屯島)에 들어가서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곡식을 수확(收穫)할 즈음에, 추도(楸島)에 살고 있던 번호(藩胡) 마니응개(尼應介)와 사송아(沙送阿) 등이, 무이보(撫夷堡) 지경에 살고 있던 시전(時錢)의 중추(中樞) 하오랑아(何吾郞阿)와 추장(酋長) 후통아(厚通阿)·혼도(渾道) 등과, 아오지보(阿吾地堡) 지경에 살고 있던 추장(酋長) 김금이(金金伊)와, 경원진(慶源鎭) 지경에 살고 있던 거추(巨酋) 이청아(伊靑阿)·여처(如處)와, 심처(深處)의 우디캐[知介] 종족 등에게 전통(箭通)을 보내어 여러 오랑캐들을 불러모아서 추도(楸島)에 군사를 숨겨 둔 뒤에, 녹둔도의 수호(守護)가 고립되고 허약한 것을 보고 농민(農民)들이 들판에 흩어져서 일할 때에 여러 오랑캐들을 동원하여 갑자기 쳐들어왔다. 그들은 먼저 기병(騎兵)으로 하여금 와서 목책(木柵)을 포위하게 한 다음에, 병사들을 풀어놓아서 크게 약탈하였다.
수호장(守護將) 급제(及第) 오향(吳享)과 감타관(監打官) 임경번(林景藩) 등이 그들의 세력이 큰 것을 보고서 힘으로써 능히 적에게 항거(抗拒)하지 아니하고, 말을 풀어놓은 다음에 포위망을 뚫고 도망하였다.
그러나 오향(吳享)은 적과 싸우다가 죽었고, 임경번(林景藩)은 화살을 가지고 목책(木柵) 안으로 들어가서 이경록(李景祿)·이순신(李舜臣)과 함께 힘을 합하여 적들에게 항거(抗拒)하여 싸웠으나, 그도 또한 적의 화살을 맞아서 죽었다. 이때에 목책(木柵) 가운데에 있던 장사(將士)들이 모두 농장(農場) 머리로 도망하여 나가고, 남아 있는 사람은 몇 사람이 없었으므로 장차 지탱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여러 장수(將帥)와 관리(官吏)들이 아주 죽을 각오로 싸워서 목책(木柵)이 함락되는 것을 면할 수가 있었다.
추장(酋長) 마니응개(尼應介)는 참호(塹壕)를 뛰어넘어 쳐들어와서 장차 목책(木柵)을 뛰어넘고자 하였으나, 급제(及第) 이몽서(李夢瑞)가 화살 한 대를 쏘아서 거꾸러뜨리고, 그 나머지 적도(賊徒)들도 또한 화살에 맞은 자가 많았으므로, 적들이 군사를 돌이켜서 후퇴하여 가버렸다. 이순신(李舜臣)과 이경록(李景祿)이 군사를 이끌고 적들의 후미(後尾)를 공격하여 농민 50여 명을 빼앗아 돌아왔고, 적호(賊胡)의 머리를 3급(級)을 참(斬)하였고, 호마(胡馬) 1필을 빼앗아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 군사가 적어서 능히 끝까지 적을 추격(追擊)할 수가 없었다.
농민(農民)과 장사(將士) 가운데 적에게 사로잡힌 자가 1백 60여 명이었고, 살해(殺害)된 자도 또한 10여 명이었다. 그러므로 조정(朝廷)에서 죄를 의논할 적에, 이경록(李景祿) 등을 잡아다가 그 죄를 심문(審問)하였으나, 임금이 특별히 그들을 용서하여 백의 종군(白衣從軍)하게 하여, 공로(功勞)를 세워서 스스로 충성을 다하게 하였다.
이해 겨울철 11월 초하룻날[初吉]에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이 순찰(巡察)하다가 경흥진(慶興鎭)에 이르러, 비밀히 군관(軍官)으로 하여금 조산보(造山堡)에 가서 오랑캐[虜人]이 그곳에 아직 있는지 없는지를 몰래 정탐하게 하고, 두만강(豆滿江)의 얼음이 단단한지 아니한지를 조사하여 살펴보게 한 다음에, 우후(虞候) 김우추(金遇秋)를 위장(衛將)으로 정하고, 행영(行營)의 군사(軍士)와 경흥진(慶興鎭)의 경내(境內) 군사 모두 4백여 기(騎)를 부서를 나누어 편성하여, 얼음이 언 곳을 통하여 어둠을 틈타 두만강을 건너가서, 새벽녘에 추도(楸島)의 번호 부락(藩胡部落)을 습격하여 17막사[廬舍]을 불태워버리고 오랑캐의 머리 33급(級)을 베어서 돌아왔다.

글쎄요, 제 눈이 이상한 건지..."분전" 은 보여도 "패전" 은 보이질 않는군요.

덧글

  • 학생 2008/11/01 08:21 #

    지질지질~_~
  • Luthien 2008/11/02 01:29 #

    수질수질~ (?)
  • 에로거북이 2008/11/01 08:31 #


    장문의 멋진 포스팅 정말 잘 읽었습니다. ^^ 트랙백도 감사드리구요.

    제가 좀 역사의 문외한이라 떠돌아 댕기면서 여기저기서 읽고 기억에 의존해(;;) 사는데 이렇게 멋지게 정리된 포스팅이 있으니 다음엔 여기서 증거를 퍼오면 되겠군요.

    그런데 "분전은 보여도 패전은 아니보였다" 고 하시는데.....

    제가 볼 땐 패전 맞습니다. "조선병사들이 죽고 개척민이 끌러갔거든요."

    정황은 누가 보아도 분전 이지 패전'이 아니지만 성난 개척민들이나 조정의 추궁 앞에 북병사 이일한텐 죄를 뒤집어 씌울 '희생양'이 필요하죠.

    이것은 마치 생계형 범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비슷합니다. 가난한 소년가장 장발장이 배고픈 동생들을 위해 빵 한조각 훔친 죄 ... 절도 맞죠. 5년형입니다.

    선조의 위대함은 이런 정치지형 속에서 우두머리로서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고 장발장에게 "이것은 생계형 범죄이니 절도형을 면한다" 라고 선고했기 때문입니다. 어리고 배고픈 장발장을 감옥에 보내는 게 아니라 판사가 배상하고 책임지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결국 선조는 충무공의 목숨을 구하고 그해 가을 시전부락 토벌전에 참여시킵니다. 시전부락 토벌전은 녹둔도 전투의 정말 멋진 복수전이었죠. 충무공은 여기서 공을 세워 당당하게 복직하게 됩니다.

    마치 패장을 처벌하지 않았던 로마식 합리주의 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멋진 포스팅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
  • Luthien 2008/11/02 01:41 #

    그러면 명량해전도 인근 피난민들이 살해당하고 3명이 죽었으니 패전인가요?
    제승방략 부분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절대적 병력 열세 하에서도 본진은 끝내 털리지 않았고, 그래서 진 외곽의 가을걷이 양민들만 당한겁니다.
    방어전의 입장에서 보자면 작전적 거점인 목책과 후방의 진까지 뚫리지 않은 만큼 명백한 성공 사례입니다.
    억지로나마 문제점을 짚는다 해도 사전 경보 및 경비의 부족으로 민간인 소개에 실패한 것 정도입니다. 그나마 오향과 임경번 등이 분전하며 분산된 병력과 백성을 일부나마 회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외려 그 와중에도 철수하는 여진 애들 뒤를 쳐서 일부나마 구했으면, 군사적 입장에서는 승전이라고 보기는 어려워도 절대 패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자신이 기획한 녹둔도 둔전이 털렸다며 죄를 청할 정도로 녹둔도에 애착이 많았던 정언신은 이후 유성룡보다도 먼저 충무공을 천거했습니다. 자기가 지어둔 진지가 정말 장수 실책으로 털렸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 계원필경 2008/11/01 10:08 #

    다만 현재 녹둔도 자리는 섬이 아닌 육지가 되어 러시아 연방 공화국 영토에 포함되어 버렸지요...(러시아랑 중국, 북한 사이에 국경선을 정리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 Luthien 2008/11/02 01:41 #

    그건 다른 이야기로. :p
  • 꽃장비 2008/11/01 10:58 #

    /에로거북이

    일단 저는 역사에 조금 흥미만 있는 사람임을 밝혀둡니다.
    위 사료만 읽어서는 말씀하시는 선조의 위대함을 알기는 어렵지 않나요. 사료에 나와있는 전공은 마냥 패전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뿐더러, 다른패전을 한 사람은 득달같이 목이 날라갔고, 이경록같은 사람이 나중에 초고속 승진을 한것을 보면, 결국 녹둔도전투의 사후처리에는 일정부분 정치적인 계산이 들어간 것이 아닐까 합니다.

    로마식합리주의나 위대함같은 것과는 거리가 좀 있는걸로 보입니다.
  • Luthien 2008/11/02 01:43 #

    문제는 서출임금 사사건건 딴죽걸던 애들이 이상하게 녹둔에 입을 다문다는 겁니다.
    심지어 임금이 녹둔도 때문에 우울하다는 시제를 내걸었을때까지 얌전히 비통비통이나 적어 바칩니다. 녹둔도 사후처리는 선조의 정치감각을 논하기 전에 "매우 상식적인 것" 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곤충 2008/11/01 11:36 # 삭제

    백의 종군이라는게..... 어쩌면 직위해제가 아니라 보직해제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다른 곳으로 전출전에 잠깐 풀어놓는 정도...?
  • Luthien 2008/11/02 01:44 #

    백의종군도 백의종군 나름입니다. 이 주제는 다음 포스팅으로.
  • 행인1 2008/11/01 17:35 #

    그다지 복잡하지도 않은데 희생양에다가 생계형 범죄까지 튀어 나오다니...;;;
  • Luthien 2008/11/02 01:44 #

    일단은 보는 사람 나름입니다만...
  • rezen 2008/11/01 18:48 #

    선조가 머리 엄청 좋은 양반이었고 국방문제에 관심많아서 여러가지로 애많이 쓴것도 사실이죠. 그런데

    어째서 저거 설명하는데 어렵게 생계형, 로마가 나오는지 잘 이해가 안가네요. 또한 기습당한 상황에서 60명으로 기병2천 여명 상대로 싸워 최종적으로 반격까지 성공시켜 적을 격퇴시킨 전투는 패전이 아니죠.
  • Luthien 2008/11/02 01:44 #

    머리가 좋지 않은 쪽으로 좋았달까요.
  • 에로거북이 2008/11/01 19:53 #


    중과부족의 상황에서도 열심히 싸운 게 맞고, 훗날 시전부락 토벌전과 같은 흔퀘한 승리로 설욕도 했던 녹둔도 전역에 대한 이야기라 어떻게 그걸 패전이라 하겠는가..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 듯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건 녹둔도 전투를 '패전'이라 본다는게 아니라 당시 충무공의 상관들 중에 이를 '패전'으로 몰아 말단 장수 충무공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길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걸 선조가 현명하게 막았다는 것이죠. 물론 약간의 정치적 안배는 있었던 것 같지만

    <이충무공유사>에 다음과 같히 전하고 있습니다.

    " 이일은 적이 침범하게 했다는 이유로 죄를 얻을까 염려한 나머지, 순신을 죽여서 입막음하려고 순신을 수감해놓고는 참형시키려고 하였다. 그러자 군리(軍吏)들이 빙 둘러서서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술잔을 권하니, 순신이 정색하여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인데, 마시고 취하면 무엇 하겠느냐.”하고, 술잔을 거절하였다. "

    그리고는 정(廷)에 나가 변론을 하였는데, 이일이 순신에게 패군(敗軍)의 정상을 공술하게 하자, 순신이 이를 거절하며, 말하기를, “나는 녹도의 군졸이 단약(單弱)하기 때문에 누차 군졸을 늘릴 것을 청하였으나, 주장(主將)이 허락하지 않았다. 군부(軍簿)가 여기에 있으니, 만일 조정에서 그 사실을 알면 죄가 나에게 있지 않을 것이다. 또 나는 힘껏 싸워서 적을 물리치고 쫓아가 우리 쪽 사람들도 다시 빼앗아 돌아왔는데, 패군으로 논죄하려고 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는데, 사기(辭氣)가 엄장하여 좀처럼 패군의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일은 부끄러운 생각에 기가 꺾이어 그를 죽이지는 못하고 결박한 채로 압송하여 조정에 보고하니, 상이 순신의 죄가 아님을 살피고 이르기를, “순신의 죄는 패군에 비할 바는 아니니, 백의종군(白衣從軍)하면서 스스로 공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충무공유사는 공식 인정되지 않는 야사에 불과할까요? 그건 저도 문외한이라 잘 모르겟습니다만

    최소한 유사에 따르자면 충무공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처형될 위기에 가셧던 것은 사실인 듯 합니다.


    p.s. 제가 이일처럼 녹둔도 전투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ㅎ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이일이 충무공을 억울하게 패전으로 몰고 간 것을 비판하고 선조의 현명한 판단을 칭찬하는 것이죠.

  • Luthien 2008/11/02 01:45 #

    앞댓글 그대로 붙이겠습니다.
    문제는 서출임금 사사건건 딴죽걸던 애들이 이상하게 녹둔에 입을 다문다는 겁니다.
    심지어 임금이 녹둔도 때문에 우울하다는 시제를 내걸었을때까지 얌전히 비통비통이나 적어 바칩니다. 녹둔도 사후처리는 선조의 정치감각을 논하기 전에 "매우 상식적인 것" 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에로거북이 2008/11/01 20:01 #


    찬찬히 읽어보니 제가 의견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오해를 살 만한 부분이 보이는군요. 특히 리플중에 '패전 맞다'고 한 부분 같은건 말이지요.

    근데 제가 이일의 환생도 아니고 충무공이 억울하게 패전의 누명을 쓰셧다고 생각하는 쪽인데 어떻게 패전 맞다는게 진심으로 한 말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이게 어떤 시각으로 보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충무공이 근무하셧던 녹둔도에서 방어선이 뚫리고 개척민이 끌려가고 병사들이 전사했던 것은 사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차 책임자가 충무공인 것도 맞죠. !!

    이일 같은 입장에서는 얼마나 떠넘기기 좋은 명분이겠습니까.


    그저 충무공이 워낙 강직하셧고, 이일이 한번 더 생각했고, 선조가 현명하게 대처했던 것이 다행인 것이지요.


    참고로 백의종군은 형벌 아닌가요? 패전 아닌데 조정에서 형벌을 내렸을까요?

  • rezen 2008/11/02 01:27 #

    단순히 예고없는 공격이었고 포로 나오고 전사자 나왔다고 패전이면 패전아닌 전투는 찾아보기 힘들겁니다.

    백의종군 자체는 당해도 품계 유지되고 현직 수행할 수도 있는 명예형에 불과합니다. 두번째 백의종군때는 삭탈 관직까지 따라와서 그렇게 된거지만 첫번째는 단순한 명예형이었습니다.
  • Luthien 2008/11/02 01:51 #

    소대가 고수중인 진지가 대대급 공세를 받았습니다.
    진지는 대파, 소대도 상당 병력을 잃었습니다.
    자, 여기에서 책임은 소대장에게 있을까요, 아니면 대대급 공세를 예상/대비하지 못한 대대장 이상 지휘관에게 있을까요?
    실제로 이일은 (처벌받지도 않았지만) 시전부락 토벌 전까지 조정 일부 실료들에게 한소리 듣기도 했습니다. 그나마도 4개월 후에는 쏙 들어가 버렸지만요.
  • 에로거북이 2008/11/02 15:59 #


    많은 분들이 뭔가 심각하게 오해하시는거 같은데,

    ( 제가 오해를 사게 표현을 했다면 그건 제 잘못인듯 싶습니다 )

    전 "충무공의 녹둔도 전투는 패전이었다 "라고 말하는게 아닙니다.

    '억울하게 패전으로 몰렸다', '일차적 책임을 충무공에게 돌리는건 일견으론 일리가 없진 않다' 라고 했지 ,

    저 개인적으로는 절대 녹둔도 전투를 패전으로 보지 않습니다.

    바보가 아닌바에야 그걸 패전으로 보겠습니까??? ...;;

    ( http://ktmd0c.egloos.com/1035772 제 원래 포스팅에도 보면 전부 '녹둔도 전투' 라고 적어 놓았지 '녹둔도 패전' 이라고 적어 놓지 않았습니다. )

    제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불행히도 당시 이일 때문에 충무공이 억울하게 패전 장수 취급을 받아 하마터면 처형당할뻔 했고,

    선조가 그걸 구해주었다는 것이죠.




    지금 상황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고, '상식적인 일' 맞습니다만,

    현실 정치가 매번 상식적이고 당연하게 흘러간다고 보시는가요?

    충무공처럼 열심히 싸웠는데 결과적으론 적을 못막아 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같혀서 옥리들이 불쌍히 여기면서 술을 권하는데 처형 날자만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저는 오히려 '하늘 같은 상관'이자 '책임 미루기의 달인' 이일 덕분에 애매하게 목 달아날 가능성이 훨 컸던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고 봅니다만.....

    조선 북병사의 높은 지위와 권한을 생각해 보십시오.
  • Luthien 2008/11/02 16:55 #

    이일이 모함한것까진 사실인데, 조정에선 그걸 죽일 일도 여기지도 않았고 정식으로 문책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시 현장지휘관의 책임을 물었을 뿐입니다.
    제가 누차 강조하는 것은 애초에 죄를 물을만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억울하게 충무공만 뒤집어 쓴것도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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