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종군은 "중형" 인가? 메모뭉치

1587년 녹둔도 전투는 "패전인가?" -에서 셀프 트랙백.

당시 조정의 정세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사건 당사자인 충무공과 이경록에게 내려진 백의종군이 과연 어떤 형벌인가에 대해서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이 내용에 대해서는 송우혜씨의 훌륭한 정리가 있습니다만, 일단 제 의도와는 다른 내용인데다 단순 Ctrl + C & V 도 내키지 않으니 (...) 약간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1. 일단 송우헤씨의 글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만 옮겨보겠습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일 행궁의 시위가 너무 적어 체모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궐내의 시위 장사와 의금부 관원 등을 모두 백의종군시켜 처벌하였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5년 5월 22일조).

양사가 아뢰기를, "사변이 일어난 뒤로 군율이 해이해졌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장수를 일일이 벌 주기가 어려워 매양 백의종군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이미 극도로 구차해졌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5년 8월 18일조).

"군율을 위반한 변장과 수령들을… 백의종군시키는 것도 형벌을 감해주는 것인데..." (선조실록 선조 30년 8월 15일조)

"사은사(謝恩使)(로서 중국에 가기)를 회피한 정명해를 전례에 따라 백의종군토록…"(광해군일기 광해군 4년 12월 1일조).

"임금이 기우제 지내려고 북교(北郊)에 거둥할 때 길을 잘못 인도한 훈련대장 장붕익을 백의종군토록…" (영조실록  영조 1년 7월 23일조).

...무언가 굉장히 사소하고 구차한 내용들이 나열됩니다.
실제로 송우혜씨는 "조선왕조에서 죄를 범한 무장에게 가했던 처벌은 여러 종류로서 각기 차등이 있었다. 가장 중형이 니탕개의 난에서 보듯 장수에 대한 '처형' 이었고, 그 아래로는 귀양을 보내는 '유배'가 있고, 그보다 약한 처벌은 '파면'이었다. 백의종군은 '파면'보다도 더 미약한 아주 가벼운 처벌로서, 정확히 말해자면 '보직 해임'의 처벌이었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2. 하지만 보편적인 인식 상의 백의 종군은 목숨만은 건진 채 모든 관직과 품계를 버린 채 일반 사병과 같이 강제로 군문에 복무해야 하는 치욕스런 형벌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대게 충무공의 1597년 두번째 백의종군이 준 이미지에 기인한 바가 큽니다.
당시 충무공은 국문을 받고 사형까지 갔다가 정탁의 결사적 반발("...그때 의논이 준엄하여 사람들이 모두 목을 움츠리고 있었는데 정탁만이 차자를 올려 순신의 무죄를 극력으로 말하여 죽지 않게 되었다" :국포쇄언) 로 백의종군에 처해집니다. 앞서 송우혜씨가 거론한 백의종군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중형의 모습입니다.
이하는 1597년 백의종군에 대한 기록들입니다.

이순신을 한 차례 고문하고 사형을 감하여 삭탈관직하고 충군(充軍)하였다
- 問一次。減死削職充軍。

삭탈관직후 충군, 여기에서 삭탈관직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관직의 회수 및 무품화이고 충군은 (일반적으로 백의종군이라 알려진) 죄 지은 벼슬아치의 군역입니다.
참고로 압송 이전의 충무공은 정 2품 상계인 정헌대부- 즉 대감이었지만, 7월 23일 작성된 통제사 임명교서는 정 3품 상계인 절충장군...영감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즉 이 시기에 충무공의 품계는 삭탈관직을 통해 과거 품계가 인정되지 않고  박탈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선조 27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9일(정사) 7번째기사
비변사가 경상우도 병사 조대곤 등의 잉임을 청하다
 
비변사(備邊司)가 아뢰기를,
 (상략)... "김해 부사(金海府使) 서예원(徐禮元) 은 가는 곳마다 패전하였으니 용서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창 왜적과 대치하고 있는 때이니 우선 백의 종군(白衣從軍)시켜 뒷날에 공을 세우도록 하시고 후임자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차출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13책 27권 26장 A면
【영인본】 21책 508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외교-왜(倭) / *군사(軍事)

동시기 서예원 등의 경우에는 품계가 유지되었습니다.
즉 백의종군은 충무공의 두번째 사례처럼 "그 형이 중도에 감해진"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품계가 유지되는 형벌- 혹은 상황에 따라 선택이 가능한 형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충무공의 경우에도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권율이 이순신에게 진주에 가서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게 하였는데 얼마 뒤에 다시 기용되었다.  - 연려실기술 17권 中

선조 30년 7월 26일 / 도원수 권율이 한산도의 군사 상황을 보고하고 이순신의 파견을 건의하다
  7월 21일에 성첩(成貼)한 도원수 권율의 서장에 아뢰기를,
(상략) "... 이순신(李舜臣)에게 흩어져 도망한 배를 수습하도록 사량으로 들여보내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원전】 23 집 269 면
  【분류】 *군사(軍事) / *외교-왜(倭)

무려 관직도 없는 충무공이 군사를 수습하고 있습니다. (그걸 따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도 선조 빠돌이 권율이, 선조가 그렇게 잡아죽이려던 충무공을 기용하자고 합니다.
물론 이런 내용을 상황의 특수성을 고려한 권율의 특혜나 목숨을 건 독단으로 볼 수도 있을겁니다.

하지만 난중일기에 따르면 충무공은 일개 비장 신분으로6월 8일, 17일, 19일 등 3회에 걸쳐 권율과 독대했으며, 그간에 권율이 수군에 대해 묻자  정중히 회피기동을 시전했습니다.
그러면서 무려 "이희남과 변존서, 윤선각을 자신에게 불러올려달라고 합니다."
 이 가운데 이희남과 윤선각은 충무공의 수행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미 현직에 있는 무관을 수행을 위해 불러올린다는 건, 일개 비장에 대한 처우라고 보기 어려운 사례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충무공의 품계가 그대로 유지되었거나 정 3품으로 낮아진 상태라면, 같은 정 2품 정헌대부였던 권율이 충무공을 예우한 것은 동 품계 간의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거나 "약간의 예우"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당연히 수행원의 요구나 무관직 상태에서의 직무 수행/보조 등도 자연스럽게 해석이 가능합니다.

물론 품계에 대한 부분은 정황증거 뿐이므로 정확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만...(사실 제가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T-T) 품계 문제와 관계 없이 그 가혹했다는 두번째 백의종군조차도 알려진 것에 비해 상당히 여유로운 환경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3. 즉 백의종군에 처해지며 품계까지 박탈당하는 것은 극히 특이하고 드문 사례입니다.
아예 품계에 손이 닿지 않은 건 아닙니다만, 그 경우엔 품계 박탈이나 변동에 대한 별도의 기록이 존재하는 편입니다.
따라서 충무공의 첫번째 백의종군은 품계가 박탈되지 않은- 단순한 직위 해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참고로 일반적인 패전의 경우 (백의종군은 아닙니다) 당연히 직위해제 후 압송이 뒤따라야 합니다.

성종 22년 실록을 보면...


성종 250권, 22년(1491 신해 / 명 홍치(弘治) 4년) 2월 6일(임자) 2번째기사
사간 권경우가 조산보에서 대패한 책임을 물어 만호도 국문할 것을 건의하다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권경우(權景祐) 가 와서 아뢰기를,
“신이 영안도 안접 종사관(永安道安接從事官) 이예견(李禮堅) 을 보니, 말하기를, ‘적(賊)이 침입하여 와서 조산보(造山堡) 를 포위하였는데 수비(守備)가 없는 것을 알고 성중(城中)에 함부로 침입하자, 만호(萬戶)는 피하여 숨어버리고, 성(城)은 함락되었는데...(중략)...당시 우후(虞候)가 정예병(精銳兵) 수백명을 거느리고 무이보(撫夷堡) 에서 방수(防守)하였는데, 보(堡)의 군사도 많았으며 조산(造山) 과의 거리는 겨우 1식(息)22998) 정도였으며, 나사종 은 경흥(慶興) 에서 1식(息) 남짓한 거리에 있었으면서도 오히려 가서 구원(救援)하였지만, 우후는 가까운 지역에 있으면서 와서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절도사(節度使)도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행영(行營)에 있었으니, 조산(造山) 같은 경우라면 멀리 떨어져 있어 미쳐 구원할 수 없었겠지만, 경흥(慶興) 은 바로 가장 아래의 지역이며, 적(賊)이 경원(慶源) 서편 근처의 해안의 따라 내려와서 5식(息) 남짓한 노정(路程)을 지나야만 조산보(造山堡) 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행영(行營)과 경원(慶源) 과의 거리는 3식(息)에 지나지 않으니, 절도사가 만약 변고를 듣고 빠르게 경원 의 요해처로 가는 길목으로 달려가 적이 되돌아가는 길을 차단(遮斷)하였다면 틀림없이 살아남은 무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에서 치욕(恥辱)을 당한 것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습니까? 관찰사(觀察使) 허종(許琮) 도 분(憤)을 내어 이예견(李禮堅) 을 보고 말하기를, ‘이 길이 요해처[要衡]이라고 절도사에게 이전에 말하였는데도 이번에 요격(邀擊)22999) 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매우 한(恨)스럽게 여긴다.’고 하였다 합니다. 절도사·우후·평사(評事)는 이미 잡아오도록 명하였습니다. 만호(萬戶)도 함께 잡아와서 국문(鞫問)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하략)
 
【태백산사고본】 38책 250권 4장 A면
【영인본】 11책 689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외교-야(野) / *군사-병법(兵法) / *군사-군정(軍政) / *역사-사학(史學)

실제 패장의 경우 압송하여 국문으로 책임을 묻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충무공은 압송대상에 해당하지 않고 잠시 투옥되었다가(선조 21권, 20년-1587정해/명 만력 15년/10월 10일 을축 두번째) 장을 맞고 풀려나와  4개월 후에 진행된 이일의 시전부락 레이드에서 우위의 좌화열장으로 참가합니다.
즉 처분-백의종군이 확정된 이후에 여전히 "급제 이순신" 으로서 현직에 종사했음을 의미합니다.

관직은 폐해도 품계는 폐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관직이 없더라도 상황에 따라 품계에 맞는 기존의 - 혹은 다른 업무를 수행한다.

...가장 비슷한 예라면 유럽 국가들의 "일시 예비역 편입" 즉 명예형과 비슷한 경우로 보입니다.
물론 백의종군의 경우에는  사례별로 형태가 워낙 다양해 섣부른 판단은 어렵습니다만,  적어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죽는것보다 조금 나은" 치욕적 형벌과는 거리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술 + 졸려서 막 쓰다지우다 쓰다지우다 한 글이라 아마 오류 좀 나올겁니다. 지적해주시면 깬 뒤에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덧글

  • 오토군 2008/11/02 10:34 #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백의종군 기간동안 88 전투비차대에 끌려가서 복무하셨다고 알고 있…(매버릭 소나기다 우훗~)
  • 에로거북이 2008/11/02 11:03 #

    헛 그런 일급기밀을

    "비차, 이것이 넘어가면 역사가 뒤바뀐다"

    비차아아아아아~~ ( BICHAAAAR~! )


    "이 급제 나리, 후방 오시(午時) 방향에 적 비차!"

    "회피하라~"

    "조준, 조준되었나이다!!"

    "화염혼란체 발사~"

    ... 그렇게 기지로 구사일생 귀환했다는 이야기
  • 오토군 2008/11/02 12:52 #

    http://weffenss.egloos.com/456350

    당시 통상대감님은 최초에는 구루세이다를 타셨다가 이것이 격추 된 이후 충격을 받은 조정이 기존 2선급 비차로 이루어져있던 88 전투비차대에 신형기인 제공十를 배치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응?)

  • 금린어 2008/11/02 23:40 #

    백의종군은 명예형이죠. 알록달록 색동옷이 사회적 지위를 말해주는 조선시대에, 하얀옷 입고 업무보려니 얼마나 쪽팔리겠습니까.

    선조도 이순신의 단점에 대해 귀신처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백의종군 2번이나 당한넘'이란 식의 비난도 하지 않았죠. 만약 백의종군이 '불멸'등에 나오는 수준의 심한 형벌이었다면(막 하급무관들이 야자트죠) 여기저기 많이 가져다 썼겠죠.
  • Luthien 2008/11/03 01:38 #

    사실 꽤 복잡합니다. 저도 확신을 못하는 부분이 몇 있기도 하고요.
  • 아문 2008/11/03 00:28 #

    그런데 경국대전에 백의종군에 관한 조목은 없나요?
  • Luthien 2008/11/03 01:39 #

    한줄도 안나옵니다. 보시다시피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영되는 "관례" 일 가능성조차 배제할수 없습니다.
  • 三天포 2008/11/03 01:40 #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절차대로 하기엔 급했던걸까요?
  • Luthien 2008/11/03 01:43 #

    전혀요. (...)
  • 三天포 2008/11/03 01:48 #

    왜란 당시엔 생각보다 그리 급한 상태는 아니였단건가요?
  • FELIX 2008/11/03 03:43 #

    백의종군은 법적으로 정해진 법률이 아니라 그때그때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한게 아닐까 합니다.

    사실 선조는 저 녹둔도전투 때문에 충무공에게 하트를 직격당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비변사나 3사에서 전라좌수사까지의 초고속승진을 반대할때 충무공을 밀어준 뒷배경이 바로 선조자신이었으니까요.
  • paro1923 2008/11/04 00:00 # 삭제

    역시, 2차 백의종군 전의 그 혹형은
    자꾸만 츤츤대는 통상에게 삐진 선조의, 애증어린 구애공세였단 말인가...?!!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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