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양요-제네럴 셔먼호 격침 사건 간단 정리 (3) - 신영중군 이현익 납치 메모뭉치

평양양요-제네럴 셔먼호 격침 사건 간단 정리 (2)

7월 10일 평양 감영을 출발한 신영중군 이현익과 평양서윤 신태정 일행은 7월 11일 늦은 저녁에 신장포구 인근에서 셔먼호와 조우했다. 당시 그들이 향하고 있던 곳은 셔먼호가 정박한 것으로 알려진 사포구 인근이었으므로, 그동안 다시 상류로 이동한 것이다.
다음날을 전후해 셔먼호와 조우할 것으로 예측했던 중군 일행은 야간에 문정을 실시하는 대신 예정대로 하루를 더 기다리기로 했다.
12일이 되자 이현익과 신태정은 대동한 영리와 형리를 보내 앞서 문정을 실시하도록 했다.
 이때 대표관원인 둘이 나서지 않은 것은 자신들이 직접 문정을 실시하기 전에 사전 정보를 취합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셔먼호의 진입은 워낙 사건이 빠르게 이어진 탓에 바로 옆 고을에서 문정을 한 내용을 반복해 묻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황해도와 평안도의 연계도 충분치 못했다.
게다가 중군과 서윤의 품계를 고려할 경우 (각각 종2품-정3품 품, 종4품이다) 평양권 내에서는 평안감사 박규수나 평안병사 이용상 이하에서 문정을 실시할 수 있는 최고 관원으로서, 사실상 대행의 임무를 띄고 있다.
따라서 본격적인 문정을 실시하기 전에 휘화 권원을 보내 정보의 기실을 따지는 것은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이다. 실제로 실록 등에는 12일 문정을 이현익 등의 문정이 아닌 "신태정의 보고" 로 적고 있다.
12일 문정의 내용은 실록과 계록, 평양사실, 역진양박청정형자 등등의 내용이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사실상 대동소이하다. (이하 셔먼 측의 내용은 S, 조선 측의 내용은 C, 실록에서 확인 가능한 내용은 강조 처리)

S: 우리는 서양 사람으로 단지 통상과 무역을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용무가 없다. 행상차 7월에 산동을 떠나  황해도와 황주를 거쳐 왔는데 평양 구경을 겸해 성성대인을 만나고자 한다. 배 안에 많은 양물을 실었는데, 귀국의 토산과 교환하고 싶다.
C:  무역하는 한 가지 문제로 말하면 법적으로 엄하게 금지되어 있으며, 또한 지방관이 마음대로 허가해 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교역은 황조(청나라)에서 법으로 금하는 것이다.
S: (토머스의 발언이다) 6월 21일에 청나라에서 나온 자문이 있는데, 귀국은 무슨 이유로 교역을 금지하는가? 우리는 그 뒤에 왔으니 교역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손으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며)  귀국은 무엇 때문에 주교와 신부, 그리고 귀국의 천주교인들을 쫒는가? (혹은 살해했는가?)
C: 귀국인들이 허가 없이 아국에 침범하고 숨어 지내며 아국의 간사한 자들과 반역을 음모했으니 처형함이 마땅하다.
S: (역시 토머스) 지금 우리 예수교는 천도를 체험하고 인심을 바르게 하여 나쁜 풍속을 교화시키기 때문에 인의충효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
C: 이 두 가지 종교 (천주교, 예수교) 는 모두 우리나라에서 법으로 금하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감히 마음대로 익히지 못한다.
S: 프랑스의 대선은 이미 왕경으로 갔으나 우리 배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몹시 분노하고 있으므로 약탈을 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 배는 무역을 원한다.
C: 대선이 왕경에 갔다고 하는 의도를 알 수 없다. 언제 철수할 것인가? (대답 없음)
S: 황주에서 얻은 식량으로 겨우 며칠을 보냈으니, 쌀과 고기, 달걀, 장작 등의 지원을 바란다.
(이상 실록, 계록, 역진양박청정형자 내용 취합 및 순서별 편집)

12일 문정은 몇 가지 측면에서 지난 문정과 구별된다. 교역 요청과 천주교인 처형에 대한 문의 및 항의. 그리고 프랑스 함대의 거론 등은 기존의 내용과 대동소이 하지만, 공식적인 접촉 (민간설에는 10~11일 사이 성경 유포 시도가 있었다 한다) 가운데 최초로 프로테스탄트를 소개하고 포교 의도를 나타낸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계속 프랑스를 자국처럼 이야기 한것과 달리 (실제로 조선측에서는 황해도에서 승무원중 법국인이 없음을 확인했음에도 프랑스인 처형에 대해 "귀국"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12일 문정에서는 "프랑스 함대는 약탈을 하겠지만 우리는 교역을 원한다" 고 발언하여, 자신들을 프랑스 함대와 구별하고 있다.
수 일만에 셔먼호 측의 발언이 변화한 것은, 본격적인 협상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평양부와의 최초 접촉이라는 점이 작용했거나, 선 내에서 의견 조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정을 마친 셔먼호는 보트를 내려 상류로 보내 수심을 측량한 뒤, 13일에 다시 시동을 걸고 만경대까지 진출했다.
계록에 따르면 이때 박규수는 "지방관이 지급한 것이 엉성함을 면치 못했다" 며 "황급한 상황에 법례만을 고수할 수 없으니" 지방관의 물자와 별도로 감영에서 물자를 내보내라" 고 지시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호의와 우호적 태도로 물러나게 하는 것이 평양 측의 기본적인 방침이었던 것이다.
박규수 자체도 조선 최초로 해국도지를 접했던 소수의 집단에 속할 정도로 친 서방적인 경향이 있었지만, 이런 대응책은 조정 전반의 대체적 성향과 동일한 것이었다.
실제로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던 그 시간에, 강화도에서도 영국 상선이 정박해 통상을 요청해 왔는데 이에 대한 조정의 기본 시책은 "엄중한 말과 친밀한 마음으로 효유하기를 반복하여 돌려보낸다" 는 것이었다.
대원군을 잘 알고, 평양으로 부임한 지 반 년이 채 되지 않아 중앙의 정세에 밝은 박규수 역시 이런 전반적 방침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경향은 환재록이나 동진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물자의 추가 지급과 같은 호의적인 정책에도 불구하고 셔먼호 측의 반응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13일에는 이현익이 신태정과 함께 직접 만경대에서 셔먼호 문정을 시도했다. 이 문정에 대한 내용은 평양사실이 기록하고 있는데, 대부분 12일 문정과 비슷한 (+ 그러나 대폭 생략된) 내용 뿐이다.
이현익 측은 외국과 교역을 법으로 금하고 있으며, 상국의 허가 없이는 교역이 불가능하다고 재차 반복하며, 대신 부족한 물품만은 넉넉히 공급하겠다고 했다.
이때 특기할만한 것은 "최난헌과 조능봉 등은 순종하는 뜻이 있었으나 선주와 재주(프레스턴과 호거스인듯) 는 무역을 고집했다" 는 부분이다. 교차검증이 불가능한 내용이긴 하나 사실이라면 이때부터 항해정책에 대한 선내의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물자 보급에 대해서도 감사의 의사는 표했으나 뒤로 교역을 하지 않는다며 야료를 부렸다고도 한다.
만경대에서 하루를 더 지낸 셔먼호는 15일에 보트를 내려 만경대에 상륙했다. 보트에는 노군 4인을 제외하고 셋이 탑승했는데, 그 중 하나는 토머스였다.
그들은 만경대에 올라 지형을 정찰했다. (만경대는 평양성에서 20리 가량 떨어져, 육안으로 성의 위치를 확인 가능한 곳이다)
평양사실은 이때 이현익이 상륙한 인원들을 추격하려 했으나, 신태정이 이를 만류했다고 적고 있다.

다음 날인 7월 16일에는 셔먼호가 흡탄까지 진출했다.
참고로 평양사실은 이날 셔먼호가 한사정으로 올라가자 중군 이현익이 이를 추적했고, 셔먼호가 보트를 내려 닻줄로 중군을 납치했다고 적고 있다. 적호기, 동진일기 등에서도 유사한 내용을 확인 가능하며, 대미 공식 문서인 의황해도관찰사미국인조회와 환재집에서는 "중군이 매일 배를 타고 셔먼호를 문정하였는데, 하루는 셔먼호에서 철쇄를 던져 중군의 배를 끌어갔다" 고 기록하여 보트 운행 중 갈고리와 밧줄로 끌어당겨 납치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실록에 따르면 이때 중군과 함께 배에 있던 시종 유순원과 통인 박치영 등을 거론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보면 수행 하인 두명 가량이 이현익과 함께 억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실록을 근거로 19일 납치설을 주장하기도 하나, 19일에 납치되었을 경우 납치와 최초의 교전, 구출 등이 단 하루 만에 일어나야 한하지만, 정작 장계에서는 "서윤이 그들의 배 옆에 가서 밤새도록 효유하였지만, 끝내 돌려보내 주지 않았다" 고 하고 있으니, 최소한 만 하루 이상은 지났다고 보아야 한다.
게다가 박규수의 장계 역시 자세히 살펴보면 19일은 사건의 일시 보다는 "보고 시기" 임을 알 수 있다. 이후 박규수에게 셔먼호 사건을 직접 옮겨적인 이종원이 동진일기에서 "중군이 나흘 만에 구출되었다" 고 적은 것을 보면, 실질적으로 이현익의 납치 시기는 16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편 패강록에서는 좀 더 다른 내용을 적고 있다. "평안감사의 분부로 문정에 나선 진사 안상흡 (安尙洽 이다) 이 셔먼호의 선원들을 뭍으로 유인한 뒤 모두 살해한다는 내용을 적은 문서손에 들고 셔먼호에 접근하자 셔먼호가 보트를 내려 그 문서를 탈취한 후 그 내용을 보고 중군을 납치했다" 는 것이다. 이를 두고 박규수가 자신의 실책을 덮기 위해 기록을 조작했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패강록의 기록을 온전히 신뢰하기는 어렵다. 패강록 자체가 "납치와 파출이라는 치욕을 겪은 이현익이 불러주는 것을 아들이 받아적은 기록" 인데다, 그것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정황적으로 많은 문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박규수가 적극적 구휼을 명한지 사흘이 지나는 동안 셔먼호 공격 정책을 채택할 만한 뚜렷한 사건이 없었다. 조정의 방침이 내려온 것도 아니며 감영에서도 군졸의 동원이나 이에 대한 토의가 일절 남아 있지 않다. 실질적으로 병력이 대거 동원된 것은 7월 18~19일 사이이다.
게다가 중군을 현장 책임자로 파견해 문정과 감시를 전담시키고 세세한 방침을 일일이 지시하던 박규수가 갑자기 최하급 관료를 보내 따로 문정을 실시한다는 것은 사실상 위계질서를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이다.
공격과 관련된 문서를 지니고, 그것도 손에 들고 문정을 위해 접근했다는 부분은...

(감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 짤로 대체)

게다가 이후 조선측과의 접촉에서 자신의 생존권이 걸린 공격 문제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고, 단지 교역만을 비난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매우매우 크다.
한편 평양지에서는 셔먼호 측이 중군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며 편지를 써서 보낸 뒤 중군이 배에 오르자 납치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는데, 역시 패강록과 같은 정황상의 문제로 신뢰하기 어렵다.
(중군 납치 사유에 대한 추정은 실제 사례를 인용하기 위해 후술한다)
중군을 납치한 셔먼호는 다음 날인 7월 17일 한탄으로 올라 정박하고, 한사정에 여덟 명이 탑승한 보트를 대어 네 명이 상륙했다. 사실상 문정 책임자가 된 신태정은 이때 뭍에서 접촉해 문정을 했는데, 이때도 셔먼호 측은 교역을 허가할때까지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를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록에서는 "서윤이 그들의 배 옆에 가서 밤새도록 효유하였지만, 끝내 돌려보내 주지 않았다" 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대목을 고려할 경우 신태정이 계속 우리 중군쨩 내놓으라능 이현익의 석방을 요구하자, 이때 공식적으로 이현익의 처우와 셔먼호의 목적에 대한 직접적 토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평양사실에서도 17일에 셔먼호가 한탄에 정박하자 신태정이 셔먼호 측 지휘자들을 호출했으며, 한사정 앞에서 협상을 벌였다고 적고 있다. 신태정은 "역으로 이자들을 억류하여 중군과 교환하려 했지만 그러지 않고 예로 대하면 중군을 돌려주려 했지만 상대가 더욱 사납게 굴었다" 고 후술했다.
협상이 무산되자 셔먼호 측에서는 다시 19일에 황강정 전방까지 이동하며 대완구와 조총을 난사했고, 황강정 앞에 정박한 후 다섯 명이 탄 보트를 내려 오탄까지 진출시켜 수심을 재려 했다. 조선군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소식을 접한 평양 사람들도 강변에 모여 보트를 향해 우리 중군쨩 돌려달라능 "우리 중군을 돌려보내라!" 고 항의했다. 실록에 따르면 종선에서는 "성안에 들어가야 결과가 있을 것이다" 라고 응수했는데, 이때 성난 사람들이 마구 돌을 던져 댔다.
(그간 상륙기록을 보면 보트의 노 담당이 4명, 따라서 나머지 1명은 조선어를 할 줄 아는 토머스였을 것이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이현익 납치의 목적은 "협상을 위한 강제적 수단" = 즉 인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역진양박청정형자에서는 셔먼호 측이 중군 석방에 대해 "쌀 천 섬과 금, 은, 인삼을 제공하라!" 고 요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황상 가능성은 높으나 교차대조할 기록이 없다.
평양지는 셔먼호가 아예 보트에 중군을 태워 사격을 가하지 못하게 방패로 썼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으나, 이 역시 그리 신뢰하기는 어렵다.
여하간 셔먼호의 보트가 계속 수심관측을 계속하자, 성에서 나온 교졸들이 이를 방해하기 위해 활과 총을 동원해 공격을 가했다.
이때 보트에 타고 있던 다섯 명은 보트를 버리고 헤엄쳐 모선에 복귀했다. 이 기록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으나 실제로 이후 모든 기록에서 보트 사용 사실이 사라지고, 셔먼호도 수심 측량과 상류로의 이동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실제로 이때 보트가 조선군 측에 탈취된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보트를 잃은 셔먼호는 양각도 아래로 물러나 닻을 내렸고, 조선군은 탈취한 종선을 상류에 두었다.
실록에 따르면 그날 오후 퇴직 장교인 박춘권이 이현익이 거느리고 있던 교졸 몇을 이끌고 배를 몰아 셔먼호에 기습 돌입, 중군을 구출했다. 이때 시종 유순원과 통인 박치영 등은 구출하지 못하고 강물로 뛰어내려 실종되었던 것 같다.
사실 중군은 납치 못지 않게 탈환작전에 대해서도 다양한 기록들이 있다. 적호기에서는 박춘권이 나서 협상을 벌이려 하자 셔먼호 측에서 보트를 돌려갈라고 했다. 박춘권 등이 보트를 찾는 사이에 교전이 발생하자 셔먼호가 중군을 살해하려 했는데, 이때 보트를 구해 온 박춘권이 중군을 뛰어내리게 해 목숨을 건졌다고 적고 있다.
평양사실은 셔먼호가 종선을 구하고자 오탄에 접근해 쌍방에 공방이 있을 때 중군을 수행하던 자가 셔먼호 곁에 배를 대어, 중군이 그 배에 뛰어내려 돌아올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적호기와 비슷한 내용을 적고 있다.
판타지 소설 평양지는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박규수가 중군을 구출할 묘안을 찾자, 박춘권이 자원해 길다란 편지를 써 셔먼호에 던져두었으며, 그들이 편지를 읽는 사이에 박춘권이 뱃전에 소선을 대고 중군을 몰래 불러내 구출했다고 한다.
아마 실제 구출 사건의 내력은 실록-계록-적호기-평양사실의 내용에 가까울 것이다.
중군이 무사히 구출되자 평양부는 셔먼호와 추가적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보고, 대 셔먼호 정책을 강경 노선으로 완전히 전환하고, 평양 인근의 전력까지 호출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되어서도 철산부사 백낙연은 완전히 합류하지 않았다)
한편 구출된 신영중군 이현익은 기습에 대응하지 못해 납치당한데다, 관직의 상징인 인신을 "구출과정에서 물에 빠뜨렸다" 하여 일단 파출시키고 조정에 그 뜻을 물었는데, 조정측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교했다.

“중군(中軍)이 그들 배에 붙잡혀가 곤욕을 당한 것은 그 잘못한 바를 논하여 마땅히 엄하게 감처(勘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이 뜻밖에 벌어져 미처 손 쓸 수가 없었으니, 이는 우직하고 지략이 부족한 소치에 지나지 않으니 또한 어떻게 깊이 책망할 것인가?
그러나 수치를 끼친 것은 크니, 그 벼슬에서 체차시키고 통진 부사(通津府使) 양주태(梁柱台) 를 차하(差下)하여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되, 조정에 사직하는 것은 그만두고 역마(驛馬)를 주어 밤을 새워 내려가게 하라"

그러나 정작 가장 큰 치욕인 인신 탈취에 대해서는 평양사실과 평양록이 한 목소리로 "납치와 함께 빼앗겼다" 고 적고 있으며, 납치당한 이현익 본인이 스스로 구술한 패강록에서조차 "납치후 탈취"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로 보아 구출 과정에서 빠뜨렸다 - 피치못할 상황에서 분실되었다 - 는 박규수의 보고는 어느정도 이현익을 감싸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인질을 잃은 셔먼호는 방수성 앞으로 내려간 후 그 위치를 고수했으며, 동원되기 시작한 조선군 병력들은 인근 강변을 포위했다.
그러나 북상중 셔먼호의 위협 사격과 중군 구출 당시의 교전을 제외하면 여전히 양측은 먼저 손을 쓰려 하지 않고 있었다.

한줄 요약 : 어머커플링



덧글

  • 슈타인호프 2008/12/06 21:16 #

    어릴적 제가 읽은 "아동용" 역사책에는, 적진 군관 박춘권이 상자를 들고 배 위에 올라가서는

    "이건 폭탄이다! 중군을 내놓지 않으면 이 배를 당장 날려버리겠다!"

    고 위협하여 이현익을 구출했다는 버전도 있었습니다. 그건 원전이 뭐일지 궁금해지는군요.
  • Luthien 2008/12/07 02:23 #

    글쎄요. 적어도 전 못본 내용 (...)
  • paro1923 2008/12/06 23:58 # 삭제

    하기사, 관인으로서 생포당한 전적은 치욕적이긴 하겠죠.
    하지만, 감싸주려던 환재 대감과 떠넘기기하려던 이현익의 모습이 어째... (...)
  • Luthien 2008/12/07 02:23 #

    환재가 감싸주었다는 것도 이현익이 떠넘겼다는 것도 가능성 높은 추정으로만 받아들여 주세요. 보통 저렇게 하는게 저 시대엔 비교적 흔했던듯도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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