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양요 - 제네럴 셔먼호 격침 사건 간단 정리 (4) 셔먼호 침몰 메모뭉치

평양양요-제네럴 셔먼호 격침 사건 간단 정리 (3) - 신영중군 이현익 납치


성배 중군과 보트를 잃은 셔먼호는 양각도 인근의 방수성 앞에서 정박했다.
중군 납치와 위협사격으로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인질이었던 이현익을 잃은데다,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 때 수심을 관측해줄 보트마저 잃은 셔먼호는 그 상황에서 물러나거나 인근에 정박한 채 무의미한(할) 시위를 계속하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셔먼호 측은 "머물러 있는다 해서 뚜렷한 돌파구가 나올 리가 없는데도" 여전히 정박 상태를 고수했다.
당시 셔먼호의 의사결정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셔먼호 지휘자들의 면면과 그 정황을 본다면 "쉽게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 정도는 대략적으로 짐작이 가능하다.
일단 선주 프레스턴은 메도우즈 상사와 계약 하에 투자를 받아 조선으로 온 터라 처음부터 쉽게 물러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배 자체는 자신의 것이라 해도 실려있는 화물 자체는 상사의 투자로 마련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무 성과 없이 퇴각한다면 선주 일행은 대량의 배상금과 오명을 포함한 치명적인 타격-최악의 경우 파산과 무단항행에 따른 체포-를 각오해야 했다.
토머스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그의 행동은 소속단체인 런던 선교회나 직속 상관인 에드킨스의 방침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어서, 지난 해와 같이 "최소한의 성과" 라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귀환 후 상당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덧붙여 자신들의 허위증언이나 납치와 같은 "범죄" 가 국제문제가 될 경우 (수교국도 아니니 가능성은 낮지만) 자신들이 법적인 처벌을 받을수도 있었다.
이런 갖가지 제약들은 사실상 항해 초기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 분명해진 상황에서도 계속 "어려운 결정" 을 주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프랑스 함대의 원정과 이로 인한 정세 변화" 를 기다렸다는 추정도 있지만, 지나치게 희망적인 추정일듯 하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조선 측에서는 경계를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납치 사건이 벌어진데다 (사상자는 없었지만) 상호간 위협사격도 있었던 만큼, 당시 시점에서 추가적인 문정과 협상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따라서 평양측의 대응은 병력을 대기시킨 채 셔먼호의 동향을 감시함과 동시에, 무력 시위로서 셔먼호를 퇴각시키거나 격퇴하는 방향으로 모아졌다.
21일이 되자 박규수는 철산부사 백낙연과 그 휘하를 현지에 합류시키고, 파출된 이현익을 대신해 현장의 신영 병력을 인솔케 했다.
두 병력은 양각도 인근 상하류의 시야가 좋은 곳에 포진하여 셔먼호 감시에 착수했다. (계록에 따르면 이때 수많은 백성들도 강변에 모였다고 한다)

조선의 병력 집중을 확인한 셔먼호측은 보다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22일이 되자 셔먼호는 화력을 동원해 해안을 포격하는 한편, "상선" 의 식량을 약탈했다.
이공격에서 조선인 7명이 사망하고 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장계에서는 단순히 "我人" 이라 적고 있으나, 이하에서 "백성에게 상해를 입혔다" 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민간인 사상자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계록에서는 유사한 내용을, 적호기 등에서는 민간인 사상자 발생을 적시하고 있으므로 민간인 피해 자체는 분명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실록에서는 상선(商船이다) 을 공격해 그 물품을 약탈했다고 기록하며, 일성록에서는 탈상선지식량이라는 문구로 상선 공격과 식량 탈취를 분명히 하고 있다. 공식 기록에서 조운선과 상선을 분명히 구분하여 기록한다는 점, 그리고 조운선 망실과 같은 정부 물자의 손해 시 그 내역 기록이 남는다는 점 등을 고려할 경우 이때 공격당한 배는 말 그대로 어염상선이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보트를 잃어버린 셔먼호가 "민가" 를 약탈한 사례는 없어도, "민간"을 약탈했던 사례는 분명히 실재하는 셈이다.)
참고로 역진양박청정형자에서는 "백성을 살해하며 재물을 약탈해가고 총포를 마구 쏘아대다 얕은 물에 걸렸다" 고 기록했고, 일본에 보낸 서신에서는 "서양배가 평양부 양각도에서 물건을 약탈하고 사람을 살해하며 가축을 죽였다" 와 같은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사실관계가 앞서 적은 것과 같으므로 추가적 인용은 생략한다.

백낙연과 신태정의 교전 보고를 받은 박규수는 단순 시위만으로는 셔먼호가 물러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를 박규수의 월권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애초에 중앙의 방침은 "군사와 관련된 모든 일은 도신에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좋을 대로 처리하는 것" 이었던 만큼, 월권이나 중앙정부 지령 무시(?)설 등은 단순한 트집에 불과하다.
계록에 따르면 1차 공격은 화공과 화력전의 병행이었다.
그러나 작은 배에 불을 질러 떠내려 보내는 화공은 셔먼호 측에서 밧줄로 엮은 그물을 늘어뜨려 화선이 뱃전에 닿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판타지 소설 평양지에 따르면 이때 박규수가 이수열이라는 자를 찾아 계책을 물었는데, 이수열은 며칠 내에 강물이 줄어 이양선의 거동이 어려워 지면 하륙해 식량을 약탈할 길만 막아도 승리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평안도가 홍수 피해를 입었다는 점(-_-), 그리고 셔먼호가 이미 보트를 잃어 헤엄쳐 올라오는 것 외에는 상륙할 방도가 없으니 사실상 약탈은 불가능하다는 점 등을 감안할 경우 이 역시 소설에 가까운 내용으로 보인다.
하지만 22일의 화공은 셔먼호측에 분명한 위기감을 심어준 것이 분명하다. 다음 날인 7월 23일에 셔먼호는 본격적으로 하류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야간 기동은 치명적이었고, 곧 좌초되었다.
같은 날 지속된 포격을 통해 총수 (병사임) 김봉조가 선상의 승무원 한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뒀다.
그날 박규수는 셔먼호의 탄약이 거의 떨어졌으며, 얕은 여울에 좌초되어 있으니 사로잡기는 어려워도 승산은 있다는 보고를 올렸다.
하지만 셔먼호는 그 자리에서 계속해 화기를 사용해 조선측을 공격했다. (사상자는 없었다)
조선 측도 총과 활을 동원해 공격을 지속했지만 선상 구조물에 몸을 숨긴 채 저항하는 선원들에게 위해를 가하기 어려웠다.
계록에서는 이후 셔먼호가 활 두 바탕 가량을 물러났다고 적고 있는데, 이때 제한적으로 좌초 상태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본격적인 이동을 실시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여전히 교역 의지를 지니고 있거나 (...) 총수 김봉조의 저격으로 항해에 관련된 주요 선원이 사살되거나, 만 하루에 걸친 장시간 교전으로 선원 전원이 피로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박규수는 공격이 좌절되자 23일자 밤 장계를 통해 "이양선의 높이가 석 장이나 되어 성을 공격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군공을 아뢰는 일이 늦어지고 있다" 는 내용을 보고했다. 하지만 숙고하더라도 달리 나올만한 방안이 없었고, 박규수는 결국 다시 한번 화공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박규수는 다음 날 장계 가운데 ""배의 제도가 몹시 견고하여 총창으로 타파하기 어려우니, 승리를 거둘 방책으로 화공보다 나은 것이 없으므로 신영 겸중군 및 평양서윤과 숙의하고 강구하여 방략을 확정하였삽더니..." 라며 화공 결정 사실을 보고했다.
한편 조금씩 이동하던 셔먼호는 구진강 어귀에 이르러 여울에 걸려 완전히 좌초해 버렸다. 연안에 가까운 곳에 좌초함에 따라 백낙연과 신태정은 화공을 위해 상류에 배를 징발하고, 포와 총으로 무장한 병력을 강 하류에 배치해 셔먼호를 경계했다.
정오 무렵에는 다시 한번 셔먼호가 일제 사격을 개시해 친위사 이장조가 포탄에 맞아 사망했고, 조선군은 대응사격과 함께 화공을 개시했다. 계록은 화공 이전에도 맹렬한 사격으로 열세 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동안 좌초된 셔먼호에 접근한 다수의 화선들은 선체에도 불을 옮겨붙이는데 성공했다.
환재집에서는 이때 "화약이 터져 검은 화염이 하늘로 솟았다" 고 적고 있는데, 정작 정식 기록에서는 이후에도 생존자가 있으니 그리 큰 폭발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을 포함한 다수의 공식기록들은 토머스와 조능봉 등이 그제서야 뱃머리로 뛰쳐나와 살려달라고 외쳤으며, 물에 뛰어들자 조선군이 신병을 회수해 강가로 끌고 왔고 군민들이 이 둘을 타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진일기에서는 중군의 수행원 두 명(시종 유순원과 통인 박치영이다) 의 가족이 군민을 선동했다며 좀더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평양지는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화공 이전에 토머스와 조능봉만이 도망쳐 이현익에게 빼앗은 인신을 바치며 살려달라고 애걸했는데, 백낙연이 전부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하자 둘이 서신을 써서 셔먼호에 들려 보냈고 그 서신을 본 셔먼호 선원들이 노하여 총포를 난사하자 토머스와 조능봉은 때려죽이고 셔먼호에는 화공을 가했다고 기록했다.
(한편 기독교계에서는 토머스가 죽기 전까지 기도를 하고 성경을 배포하다 자신을 사살한 군인에게도 성경을 주었는데, 그 군인이 다름아닌 박춘권으로서 성경을 읽고 감화되어 기독교인이 되었다 하는데, 후일 박춘권이 개종한 기록은 있어도 양자간의 연계가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진위를 알 길이 없다.)

사후 장계에 따르면 타살당한 자가 두명, 총에 맞아 죽은 자가 13명, 불에 타 죽은 자가 4명, 이틀 전 (22일 교전) 저격 당한 자가 1명이라 하여 셔먼호 승무원 총 20명이 전원 사살당했다고 적고 있다. 반면 조선은 22일에 7명, 24일에 1명 등 군-민을 합쳐 총 8명이 사망했으며 5명이 부상을 입었다.
조정 측에서는 군공에 따라 포상을 실시하고 전사자 등에는 휼전을 배풀며 셔먼호의 잔해를 걷어 올리는 등의 사후처리를 실시하는 한편 박규수 등을 시켜 청나라의 예부에 자문을 보내 사건의 상세를 설명하고, 그해 12월 사건 경과를 확인하러 온 미국 아시아함대 함장 슈펠트 등에 답신하는 등 외교를 통한 정돈작업을 실시했다.

ps: 와. 끝.

ps2: 그러고 보니 셔먼호는 선주 외엔 미국인이 없네요. 선적이 미국에 등록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덧글

  • 지오닉 2008/12/07 10:48 #

    결국은 낚시에 걸려들어 조선까지 왔다가 피박 쓴 셔먼호(틀려!!)
  • Luthien 2008/12/08 05:42 #

    틀려욧 (...)
  • 행인1 2008/12/07 11:11 #

    "기록"이 없다고 용맹무쌍하게 외치셨던 그분은 지금쯤 뭐라할려나요?
  • Luthien 2008/12/08 05:43 #

    모르죠, 민가 => 민간은 오타 아니라고 스스로 입증하긴 했습니다만 :p
  • 빠대 2008/12/07 13:07 #

    이 쯤 하면 반론이 달릴 것 같죠? 안달려요.
    본디 주장을 위한 근거 색출은 벽이 있는 법이고, 거기까지 가고 나면 빠질 외엔남은 수단이 없음.
  • Luthien 2008/12/08 05:44 #

    그래도 설마 사료, 증거 운운하던 사람이 그렇게까지 막장일까. (...)
  • 이거 2008/12/07 13:45 # 삭제

    저걸로 개자위질하다가

    결국 일본에 개털리고 합병당했죠

    자랑스럽다고 볼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 paro1923 2008/12/07 17:26 # 삭제

    '그 분'이십니까? 아니면, 동지이십니까?
    '다른 누구한테 먹히면 잘 풀리는데, 저항하니 이 꼴'이란 논리가 참...
  • Luthien 2008/12/08 05:45 #

    셔먼호 사건에 대한 조정의 반응은 "경계" 였지 "자위" 라고 보기는 어려울것 같습니다.
    그리고 paro123 님 발언은 좀...;
  • 다문제일 2008/12/08 17:45 #

    이분 닉네임 '개자위질'이라고 정하면 어떨까요. 요새 이글루에서 한국사 토론글만 떴다하면 꼭 달라붙더군요. 자기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인 근현대사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민족)수난사적 역사관'에 너무 강하게 묶여 계시더군요. 역사에 대한 평가가 "쪽팔리다" "자랑스럽다" 두 가지 밖에 없으니 이런 댓글 밖에 쓰지 못하는 겁니다.
  • azurebird 2008/12/07 14:42 #

    대망의 분선(焚船)인증이군요.
  • Luthien 2008/12/08 05:46 #

    그러고 보니 분선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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