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사 2. 19세기의 변화, 시온주의의 태동. 연재뭉치

중동전쟁사 1. 유대인, 디아스포라.에서 이어집니다.



서유럽의 유대인 사회는 18세기의 근세화 조류를 맞아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1753년에 종전의 추방령을 철회하고 귀화령을 내렸으며, 1776년에는 최초의 근대적 헌법을 채택한 미국이 독립에 성공했다. 그러나 유럽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은 역시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었다.
이런 일련의 근대화 혁명 열풍과 함께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는 해방운동도 서유럽 전역을 향해 급격히 확산되었다.
합리적-이성적-학술적 사고를 앞세운 선구적 사상가나 해방운동가들은 “만인” 의 범주에 유대인을 포함시키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혁명과 해방운동, 이성적 권위의 확산으로 인해 왕권신수설과 교회의 권위가 유명무실해 지면서, 그간 종교적 적대감에 근거해 당연시되던 유대인 차별은 일순간에 어리석고 무의미한 미신적 작태로 전락했다.
1789년 프랑스 국민회의에서 클레르몽 토네르 (Clermont tonnerre) 후작은 “개인으로서의 유대인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에게는 아무 것도 허용되어선 안된다” 고 외쳤는데, 이 주장이야말로 혁명 당시 해방운동의 입장을 가장 명료하게 대변하고 있다.
프랑스에 이어 프로이센은 1812년, 덴마크는 1849년 유대인을 해방했으며, 프랑스에 비해 훨씬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던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는 1867년에 유대인 해방을 승인했다.
유대인들의 사회진출이 공식 허용됨에 따라, 유대인 사회는 급속히 활성화되거나 지역사회에 동화되곤 했다.
이들은 교육과 취업의 기회가 있는 도시로 몰려들었고, 의사, 변호사와 같은 주요 직종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금융업 측면에서도 기존 유대인 상권의 규모와 노하우가 대거 양지로 기어나오며 양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특히 19세기 초반부터 부각되기 시작한 유대인 금융계는 로트실드 (Rothschild, 흔히 알려진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은 영어 발음이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 권을 중심으로 그 세력을 크게 확대했다.
이런 급격한 사회 진출은 유대인들이 기존의 유대교-유대사회의 폐쇄성에서 벗어나 지역 사회와 문명에 동화되는-이른바 세속화 과정으로 이어졌다.
많은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등을 돌렸고, 사교와 사회적 지위 변동을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실제로 시오니즘 운동의 현실화를 주도한 테오도르 헤르츨은 어릴때부터 독일 장교가 되려 했으며, 유대교식 성인식을 치르지 않고 크리스마스에는 문 앞에 트리를 내거는 전형적인 “세속적 유대인” 이었다.
유대인들의 종교적-사회적 스승인 랍비들 조차 이런 집 앞에서는 발길을 돌릴 지경이었다.

이 시기에 유럽의 유대인 인구도 급격하게 증가했다.19세기에는 유럽 전체의 인구가 급증했던 만큼 유대인의 인구증가만을 특별히 보기는 어려우나, 유대인 사회의
대대적 추방령을 실시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65000명과 13만명에 불과했으나, 영토가 작은 네덜란드조차도 유대인 인구가 80000명까지 늘어났으며, 독일 제국과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각각 56만명과 1950만명의 유대인을 수용하며 서유럽 최대의 유대인 사회를 구성했다. (1890년 기준)

그러나 급격한 유대인 해방을 모두가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대중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여전히 보수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유대인이 해방운동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을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의 사회 진출이 급증한 것은 유대인에 대한 일반의 인식에 상당한 악재로 작용했다.
대부분의 일반 시민들은 유대인의 사회진출을 “프랑크푸르트의 환전업자, 러시아의 고리대금업자, 폴란드의 여관주인과 갈리시아의 전당포주” 들이 자신들의 파이를 빼앗기 위해 벌이는 술책으로 인식했으며, 유대인 해방조차도 "유대인 부자들에 의한 로비의 결과물" 로 받아들이려 했다.
당연히 유대인을 “정당한 사회 구성원이자 자신들의 경쟁자” 로 받아들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라자르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유대인들은 더이상 그들의 주거지에 갇혀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만큼 더욱 심각한 불신, 잠재적 증오와 편견이라는 적대적 분위기에 갇혀 있었다. 이것은 이주나 봉기로 벗어날 수 있는 물리적 게토보다 훨씬 끔찍한 일이다. 이런 적개심은 보통 잘 숨겨져 있지만, 영리한 유대인은 누구나 이런 위험을 쉽게 발견할 것이다”

이런 인종적 편견에 근거한 적개심들은 종종 어이없을 정도로 미개한 형태로 돌출되곤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피의 고발”과 관련된 사례들이다.
중세때부터 전해 내려오던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의 아이들을 살해해 유월절의 희생제물로 사용한다” 는 속설이 19세기에도 통용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레반트 지역의 다마스쿠스Damaskus 에서는 1840 년에 피의 고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현지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유혈 탄압을 시작했으며, 심지어 프랑스계 외교관들조차 이것을 “당연한 사실” 로 받아들이며 방조해 버렸다.
유럽 출신의 비교적 이성적인 영국의 모세스 몬티피오레 Sir Moses Montefiore 와 프랑스의 법무장관인 아돌프 크레미외 Adolphe Cremieux 등은 이런 비이성적인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서둘러 상황 진압에 나섰지만, 이미 다수의 유대인들이 공격을 당해 사상자까지 발생한 뒤였다.
이런 사건은 유럽에서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1882년에는 오스트리아의 티소에슬라르에 사는 열다섯명의 유대인들이 소아살해혐의로 기소당했는데, 이들은 에슈터 소이모시라는 14세 소녀를 살해해 재물로 사용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번에는 저명한 랍비였던 조제프 사무엘 블로흐 Joseph samuel bloch 가 가톨릭 신학 교수인 아우구스트 롤링과의 치열한 법정투쟁을 통해 피의 고발이 존재하지 않음을 법적으로 입증해 냈지만, 유사한 사례는 1893년까지 이어지며 블로흐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이런 원시적 편견에 의한 피해를 막기 위해 서유럽에서는 1860년부터 “이스라엘 총연맹” 이 결성되어 홍보와 학술 활동을 펼쳤으나 “피의 고발” 같은 사례는 20세기까지도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았다.

물론 19세기 후반에 사회가 도시화, 산업화, 과학화 되면서, 피의 고발과 같은 전근대적 미신에 기반한 비난은 과거와 같은 폭넓은 지지는 받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유대인에 대한 일반적인 증오가 “유대인들이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쳤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피의 고발은 이미 존재하는 증오를 합리화하는 수단이었을 뿐이며, 따라서 유대인에 대한 반감은 종교적 편견이 설득력을 잃은 뒤에도 수그러들기는 커녕 새로운 근거에 편승해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19세기 말 다윈의 진화론을 바탕으로 급성장한 인종지상주의 이론은 19세기의 반 유대주의에게 퍽 유용한 무기가 되었다.
이 최신 이론은 과학적이고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졌으며, 무엇보다 적용 대상인 유대인들이 단일 종교 이전에 단일 민족이었기에 적용이 매우 간편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급속도로 확산된 인종 지상주의에 기반한 편견들은 19세기 초-중반부터 시작된 민족(이기)주의와 맞물려 추악한 형태로 급성장했다.
특히 이런 반유대운동이 급격히 확산된 독일에서는 반유대주의 정당들은 많은 출판물들을 통하여 소위 ‘과학적인(scientific)’반셈족 이론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이론은 전체주의 국가로서 독일내의 반합리적, 반민주적 분위기를 깊게 반영하고있었다.
그러나 사이비 과학으로 분장했다 해서 돌연변이 민족주의의 본질은 바뀔 리 없었다.
모세스 헤스가 말했듯이 “독일인은 유대교가 아닌 유대인을, 유대인의 신앙보다는 유대인의 코를 싫어했다”

문제는 이런 진부하고 엉성한 증오가 정치적인 도구로도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독일 제국 재상 비스마르크는 프러시아의 유대인 해방을 승인하기는 했으나, 국내 사회 제어를 위해 반민족 감정을 유용한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려 했다. 이 시도는 잘 들어 맞아, 격변기의 사회적 불만 가운데 상당수가 유대인을 향하곤 했다. 실제로 반유대주의자들이 주도한 유대인 시민권 박탈 서명운동에는 수 주만에 22만명에 이르는 독일인들이 참여했다.

프랑스에서도 어이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1894년 프랑스군 정보국은 독일로 군사 정보를 유출한 스파이에 대해 수사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유대계 장교인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범인으로 지목된 것이다.
정작 정보국 측에게는 유출 서류에 적힌 "D" 라는 이니셜이 드레퓌스의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과 일부 필적 외에는 뚜렷한 증거가 없었다.
그러나  독일과의 전쟁에서 완패한 후유증으로 인해 사건이 장기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프랑스군 수뇌부는 사건을 최대한 빨리 무마하기 위해 정확한 수사과정을 은폐한 채 드레퓌스를 체포해 버렸다.
문제는 그 뒤에 터져나왔다.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소령이라는 진범이 확인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드레퓌스를 진범으로 지목한 종전의 판결을 뒤집지 않았다.
드레퓌스 자신은 유능하지 않은 평범한 장교였으나, 그 이전에 공화국 당시 공화국의 해방주의 조류에 의해 장교로 승진하여 참모부에 재직중이던 유일한 유대인이기도 했다.
나폴레옹 3세 휘하에서 요직을 차지한 왕당파의 고위 장교들은 드레퓌스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며, 사건이 드레퓌스와 연결되자 이를 의심없이 받아들였다.
반대로 진범인 페르디낭 에스테라지는 파리에서 퇴어난 귀족 가문 출신의 왕당파였다.
실질적인 프랑스군의 수뇌집단이었던 참모본부측은 이미 드레퓌스를 체포한 상태에서 공화파의 상징인 드레퓌스를 석방하고 전형적 왕당파였던 에스테라지를 체포한다는 것은 군-정확히는 왕당파 중심의 참모본부와 대령회, 기타 프랑스군 집단의 체면을 깎아내릴 것이라고 보았다.
결국 정보부의 조제프 앙리 대령과 뒤파티 드 크랑 소령 등은 이 사건과 관련된 기록을 조작해 드레퓌스에게 스파이 혐의를 떠넘겼고, 드레퓌스는 참모본부의 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내의 반 유대 감정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군부와 가톨릭 교회, 언론 등은 드레퓌스의 예를 들어 공공연히 유대인의 사회 진출을 비난했다.
이후 정보부에 임관한 조르쥬 피카르 중령은 내부인수과정에서 드레퓌스 사건의 진범이 에스테라지이며 그 과정에서 정보조작이 있었음을 밝혀내고 상부에 이를 보고했으나,  이 사건이 보도되었을 때 당국의 무능이 부각될 것을 우려한 프랑스군은 외려 피카르 중령을 좌천시켰다가 군사 기밀 누설죄로 체포해 버렸다.
덕분에 에스테라지는 혐의가 재차 확인된 뒤에도 여전히 군적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1898년 이 사건의 내역을 실은 서류가 신문에 공개되고, 작가 에밀 졸라나 아나톨 프랑스, 조르쥬 클레망소 등의 문화계 명사들이 드레퓌스 사건을 이성과 법치에 대한 모독이라고 강렬히 비난하며 재심을 요구함에 따라 프랑스 전역이 친 드레퓌스파와 반 드레퓌스파로 나뉘여 격론을 벌이게 되었다.
특히 군의 핵심이던 참모본부나 기존의 반 유대 입장을 견지하고 있던 가톨릭, 기타 보수 언론들은 친 드레퓌스 측의 주장이 프랑스 군의 명예를 훼손하고 범인을 보호하는 일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이때 에밀 졸라는 군법회의를 모독했다 하여 징역을 선고받자 영국으로 망명했다.
드레퓌스가 유대인이라는 것이 조사 초기의 사실 왜곡에 주 원인을 제공했음은 분명하지만, 정작 진범이 확인된 이후의 사건은 프랑스 국내의 복잡한 정치사정이나 군내 권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진행된 만큼 이 사건을 단순히 유대인 차별이나 반 유대주의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은 정치적인 권력을 가진 "기관" 이 "권력을 사용해" 유대인을 공격한 최초의 사례라는 측면에서, 19세기 반 유대주의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 "유태인을 죽이라" 며 폭동을 일으키던 시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건의 진실을 파악한 뒤에는 "드레퓌스를 석방하라" 고 시위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자신이 두 번째 드레퓌스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사건의 내역이 공공연히 공개되자, 정보조작의 당사자 가운데 한명인 조제프 앙리 대령이 자살하고 에스테라지조차도 자신이 진범임을 자백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군부도 1904년에 백기를 들고,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 을 인정했다.
그러나 프랑스 군법회의는 5:2로 "드레퓌스의 반역죄" 를 선고해 사건의 향방을 주목하던 국민들을  광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물증과 범인이 명백한 이상 결론이 뒤바뀔 리 없었다.
결국 사건은 1906년 프랑스 최고재판소까지 올라가서야 드레퓌스의 무죄가 인정되었으며, 프랑스군도 그의 "복권" 을 인정함에 따라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여기에서 복권은 무죄와는 다른 말이다. 프랑스군은 1995년이 되어서야 드레퓌스가 무죄이며 당시 군법회의가 조작되었음을 정식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반유대주의가 프랑스 내에서 완전히 일소된 것은 아니었다.
사건이 일단락된 이후에도 일부 국민들은 국민들은 드레퓌스 무죄가 선고된 뒤에도 대로에 모여 "유대인을 살해하라" 고 외치고 다니곤 했다.
반 드레퓌스파 인사들도 "스파이 혐의가 인정되지 않도록 유대인들이 음모를 꾸몄을 것" 이라거나 "스파이 혐의는 있을지 몰라도 어쨌건 다른 죄는 저질렀을 것" 이라는 무책임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참고로 독일에서는 드레퓌스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는 애초에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은 독일 육군의 장교로서 임관할수 없도록 규제되었기 때문이다.

서유럽권에서 이런 사례가 이어지자 19세기 민족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유대계 지식인들은 유대인 차별의 원인을 종교적 대립이 아닌 유대인이라는 민족에 대한 적대감에서 찾기 시작했다.
학술적인 분야에서 이 문제를 최초로 고심한 사람은 모세스 헤스Moses hess 이다.
칼 마르크스의 사상적 동반자였던 그는 독일에서 반유대주의가 성숙하기도 전인 1862년부터 “로마와 예루살렘” Rom und Jerusalem 이라는 저서를 통해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는 처음부터 민족 차원의 문제였음을 지적했다.
(헤스 자신은 이런 주장으로 인해 초기 사회주의자들에게 외면당해야 했다)
이 주장은 메시아의 도래만이 유대인 구원의 길이라고 보았던 종래의 유대교식 사고와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헤스의 주장 속에서 국가는 신이 유대인에게 제시한 약속이 아닌 “민족이 외부의 탄압 없이 독자적으로 생존하기 위한 수단” 이었다. 그 곳의 지정학적인 위치가 어느 곳이 되건 그것은 부차적 문제였다.
그러나 이런 독립 주장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유대인들에게조차 환영받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세속화의 과정을 통해 모국 사회에 동화되기를 원하거나, 종교적인 약속-즉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이들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양측 모두가 "민족 생존수단으로서의 독립" 이라는 주장에 반대 입장을 보였다.
동화를 지향하는 유대인들은 헤스 등의 주장이 날로 격화되는 반유대주의 운동을 자극하리라고 보았다. 과거와 같은 "유대인 추방령" 이나 "추방운동" 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대계 문필가 막시밀리안 하르덴 Maximilian hardern 은 자신의 글을 통해 초기 시온주의자들과 독일의 유대인들에게 “당신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독일을 위해 일하는 것인지, 시온을 위해 일하는 것인지 분명히 하라” 고 외치곤 했다.
반대로 랍비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종교적 경건성을 유지하려 했던 유대인들은 여전히 과거의 해석을 고수하고 있었다.

서유럽의 해방운동과 활발한 사회진출, 그리고 학술적 풍조는 유대인을 위한 민족국가라는 개념의 토대를 마련하는 바탕이 되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서유럽 유대인들의 세속화-지역동화는 외려 민족국가의 개념과 초기 시온주의가 현실적인 형태로 성장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결국 서유럽에서 태동한 초기 시온주의는 동유럽의 많은 인구와 절박한 상황에서 추진력을 빌려와야 했다.



서유럽의 해방운동과 권리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 유대인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동유럽의 유대인들은 여전히 과거와 같은 종교적 집단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은 1880년대를 기준으로 511만명에 달했는데, 이는 단일국가의 유대인 집단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이들은 대부분 중세까지 라인강변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아슈케나짐의 후예로, 이후 1차 십자군 당시 십자군의 공격으로 폴란드까지 밀려났다가 1772년부터 1795년에 걸친 폴란드 분할을 계기로 러시아로 유입되었다.
유대인들에 대해 전근대적 혐오감을 지니고 있던 러시아는 유대인 집단을 강제로 터키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흑해 연안으로 이주시켜 버렸다. 이 정책을 통해 흑해 인근에는 페일Pale 이라 불리는 대규모 유대인 격리사회가 결성되었다.
유럽과 달리 혁명 없이 구식 제정체제를 유지하던 동유럽-러시아의 유대인들은 중세를 연상케 하는 전통적인 유대교 중심의 폐쇄 사회를 구성했으며, 러시아 정부와 민중의 대 유대인 정책이나 편견 역시 과거와 그리 달라진 것이 없었다.
러시아 정부는 각종 규제를 통해 유대인 사회에 제한을 가했다. (이런 현상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나 그와 동시대 작가 등의 소설에서도 종종 드러나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생활하던 동유럽의 유대인들에게, 서유럽과 같은 해방운동이나 시민권 부여는 그야말로 별세계의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동유럽권의 유대인들은 외려 12-13세기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적 경건과 신비주의 중심의 하시디즘을 18세기 중엽에 부활시키며 스스로 기존의 “닫힌” 유대인 사회 속으로 침잠했다.

결국 동유럽의 유대인들에게 변화를 강요한 것은 해방운동에 의한 사회 진출이 아닌 종전보다 한층 가혹한 박해였다.
서유럽에서 유대인의 세속화가 가속되고 범 국가적 편견에 맞서기 위한 대안이 한창 논의되던 1881년에, 제정 러시아의 개혁성향 군주인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것이다.
황제암살은 인민주의자 집단인 나로드니키의 소행이었으며 그들 가운데 유대인은 단지 한명이 가담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차르로 즉위한 알렉산드르 3세와 러시아 정부는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암살 자체를 유대인의 소행으로 몰고 갔다.
러시아 정부에게 필요한 것은 범인의 신상명세 보다는 “유대인” 이라는 공공의 분노대상이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르 3세는 즉위와 동시에 “임시법” 을 공포하여 페일 이외 지역의 유대인 주거를 완전히 금지하고, 이를 어긴 유대인들을 시민들이 직접 퇴거시키는 것까지 허용했다. 당연히 "직접" 에는 "물리적 수단의 동원" 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이듬해인 1882년 5월에는 소위 “5월 법” 이라 불리는 유대인 박해법안이 발효되었다.
이 법안에 따라 모든 유대인은 케이크처럼 3등분되어 1/3은 학살당하고, 1/3은 국외추방되며 나머지 1/3만이 러시아 내에서 살아갈 권리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정책을 통해 “유대인에게 분명한 혐의가 있으며, 러시아 정부가 유대인들을 정책적으로 제거하려 한다” 고 확신한 러시아 국민들에 의해 포그롬(Pogrom) 이라 불리는 대규모 유대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1881년부터 1884년까지 200여개의 페일이 공격을 받았으며, 러시아 정부는 정책적으로 포그롬을 추진/지원하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의 경우 이를 방조했으며 관련자를 처벌하지도 않았다.
1884년 이후에도 적어도 20년동안 산발적인 대 유대인 공격이 진행되었고, 1903년에 1차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다시 시작되어 4년가량 이어졌다. 특히 1903년 4월에는 키시네프라는 도시에서만 2일간 유대인 45명이 죽고 600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1500가구가 약탈, 파괴당할 정도로 격렬한 탄압이 도처에서 진행되었다.

동유럽에서 진행된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5월 법이나 포그롬처럼 정책적, 물리적으로만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있었던 시온 의정서(Protocols of the Learned Elders of Zion) 사건은 유대인에 대한 정보 왜곡을 통해 반유대운동에 힘을 실어주었다.
유대인의 세계전복 계획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시온 의정서는 로트실드 가문을 포함한 주요 유대인 지도자들의 회견 내용을 빼돌렸다고 해서 잘 알려졌는데, 대부분의 반유대주의자들은 물론 히틀러조차도 이 의정서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시온 의정서가 작성된 것은 1894~1897년, 공식으로 대외에 공개된 것은 1903년이었으며, 실제 작성자는 표트르 이바노비치 라츠코프스키라는 러시아 정보기관 출신의 첩보원이었다. 극렬 반유대주의자로 잘 알려진 라츠코프스키는 러시아 왕실 비밀경찰의 지원 하에 파리에서 위작한 문건을 대외에 공개했는데, 이는 1917년 혁명 이후 그의 보좌관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하지만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시온 의정서 자체는 반유대주의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활용되었으며, 이후 홀로코스트의 소재가 되는 등 매우 긴 시간 동안 유대인들을 괴롭혔다.

오데사에서 동유럽권 유대인 계몽운동을 펼치고 있던 유대인 의사 레오 핀스케르는 1881년부터 시작된 박해에서 충격을 받아, 이듬해에 “자치 해방” Auto-emancipation 이라는 글을 통해 “유대인이라는 민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유럽이 아닌 다른 곳에서 독자적인 정권을 이룩해야 한다” 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핀스케르의 주장은 독일에서 시작된 헤스의 주장과 매우 유사했지만, 헤스의 주장 이상으로 호응을 끌지 못했다.
당장 페일에 격리된 유대인 사회에는 핀스케르처럼 고등 교육을 받고 세론에 민감한 고급 인력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현대적인 문화어로 기능하기 어려운 옛 유대어의 변형인 하시디어(히브리어가 아니다!) 를 사용하는 페일 내에서 독일어로 씌인 자치 해방이 널리 읽히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동유럽의 유대인들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와닿은 것은 외려 종교적인 운동이었다.
우크라이나의 차르코프에서는 소수의 대학생들은 전통적인 종교관에 따라 "유럽을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가자" 고 주장했다.
이사야서 2장 5절의 내용을 따 BILU(Beth Iaakob Leku Unelkab, 야곱의 가문이여 야훼의 빛을 받으러 걸어가자) 라고 자칭한 이들은 3000명의 유대인을 모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려는 계획으로 주변의 주목을 받았다.
이들 이후로 1882~1904년까지 이어진 동유럽 유대인들의 대규모 팔레스타인 이주 시도는 일반적으로 1차 알리야Alijah 라고 불린다.
그러나 뚜렷한 자금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대규모 유대인을 이주시킨다는 계획은 처음부터 용두사미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1882년에 고작 16명이 러시아 땅을 떠났으며, 이후 50여명이 추가로 합류했다. 이들은 겨우 자파에 상륙했으나 개간지로 좁다란 땅을 구입하고 그것을 개간하는 와중에 2/3 이 불만을 품고 팔레스타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런 상황은 비슷한 시기 발생한 히바트 시온 운동(시온사랑운동)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1882년부터 1890년가지 적어도 130개의 히바트 시온 단체들이 결성되었으나 대부분 BILU 와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외려 훨씬 많은 유대인들이 북아메리카를 향해 떠났다. 적어도 250만 이상의 유대인들이 전재산을 처분해 마련한 배삯을 약속의 땅 대신 신천지를 향해 떠나는 데 지불했다. 이로 인해 미국 동부에는 대규모 유대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같은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으로 떠난 유대인들은 7만여명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팔레스타인의 가혹한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미국 등으로 재이민을 떠났다.
1882년 당시 팔레스틴 거주 유태인 수는 2만 4천명 가량이었는데, 이들은 "이슈브" 라고 불리는 유대공동체를 이루며 예루살렘, 헤브론, 티베리아스, 사페드 등 네 도시에 오손 도손 모여 살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유럽의 유대인들이 보내주는 "샬루카Chalukka" 라 불리는 기부금에 의지해 살고 있었기에 농경이든 공업이든 생존 기반이 될만한 요소와는 거리가 멀었다.
로트실드 가문이나 유명한 유대인 후원자 히르슈 남작 등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 정착을 후원하기 위해 농업학교나 병원 등을 설립해 주었지만, 이 역시 그리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결국 1차 알리야는 사실상 팔레스타인에 뚜렷한 정착기반을 남기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포그롬으로 인한 충격이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로 연결되지는 못했지만, 동유럽 사회의 변화에 중요한 계기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
실제로 오데사를 중심으로 유대인 계몽운동인 Haskala 하스칼라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며 유대인 매체를 통한 옛 히브리어 부활이 현실화되었다.
특히 엘리제르 벤 예후다 등은 동유럽을 중심으로 남아 있던 변형된 이디시어를 대신할 수단으로 사멸한 옛 히브리어를 부활시켜 현대적인 언어로서 기능하게 했다.
계몽운동은 문화적인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시몬 두브노프 Simon Dubnow는 강력한 유대인 자치운동을 시작했으며, 최종적으로는 민족당 Folkspartey 이라는 유대인 정치단체를 창당하기까지 했다.
반대로 동유럽 유대인들이 "사회적 약자" "노동자" 계층에 위치한다고 판단한 유대인들은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벌이기도 했다. 유대인들의 사회주의 연맹은 1897년부터 정식 출범했는데, 이는 러시아 내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사회주의 정치단체로 기록되기도 했다.
이런 동유럽 사회의 강렬한 변화는 같은 시기에 서유럽에서 활동하던 헤르츨에게 엄청난 힘이 되었다.


본격적인 "정치적 시온주의" 의 아버지로 평가받은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은 (앞서 언급했듯이) 극작가 출신의 기자로, 생활이나 사고관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전형적인 세속화된 서유럽 유대인의 범주에 속했다.
그는 1891년 10월부터 빈에 위치한 신자유신문의 특파원으로 파리에서 거주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새로운 게토" 라는 글을 쓰며 유대인 독립에 대한 주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온주의에 대해 문외한에 가까웠던 헤르츨은 헤스나 핀스케르 등의 영향은 거의 받지 않았으나 (실제로 상당 기간동안 그들의 존재 자체를 거의 알지 못했다) 그들과 거의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유대인 생존을 위한 독자적 생존권-즉 국가의 형성을 구상한 것이다.
그리고 헤르츨은 1894년 12월 19일, 프랑스 전역을 휩쓴 드레퓌스 사건 관련 공판이 시작되자, 이 사건을 취재하며 반유대운동을 취재했으며, 이때 강렬한 비판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논평을 통해 유대인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드레퓌스 사건에 영향을 받은 헤르츨은 BILU 의 주도자들처럼 막연히 자신의 생각을 좆는 대신, 명확한 스폰서를 찾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헤르츨은 우선 1895년 5월에 유대인 후원가로 유명한 모리스 드 히르슈 남작을 찾아 자신의 유대인 독립국가 계획을 설명하려 했다. 히르슈 남작은 아르헨티나의 평지에 포그롬으로 박해받던 러시아의 유대인들을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르슈 남작은 헤르츨의 제안을 허황된 것으로 이해하고 간단히 거절해 버렸다.
이후 헤르츨은 대표적인 유대계 재력가인 로트실드 가문과 접촉하려 했으나, 로트실드측은 아예 헤르츨을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다. 결국 1896년까지 그의 시도는 거의 모조리 수포로 돌아갔다.
헤르츨은 일단 추가적인 스폰서 탐색을 중단하고 파리로 돌아가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1896년 헤르츨은 자신의 주장을 요약한 저서인 "유대인 국가"를 출판했는데, 유대인 지식층의 반응은 극히 냉담했다. 카를 크라우스 등의 유대인 문필가들은 헤르츨의 시온주의를 맹렬하게 비판했으며, 일부 유대인들은 "헤르츨과 같은 이성적인 사람이 이런 감정적인 글을 쓸 리가 없다" 고 외면하기까지 했다.
랍비들도 "시온주의자는 성서에 나타난 메시아의 구원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라고 주장하며 맹공을 펼쳤다.
반대로 독일권 반유대주의자들은 "유대인 국가" 의 출판을 크게 환영했으며, 일부 집단에서는 필독서로까지 애용되었다.
유대인 국가 자체는 유대인들 사이에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었지만, 지식층과 종교계의 냉담한 반응은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될 여지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헤르츨이 종전의 사상적 시온주의자와 분명히 구별되었던 점은, 그가 저술활동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행동력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헤르츨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비판적인 의견에 일일이 대응하는 대신 영국으로 건너가 연설을 하거나 바덴 대공을 접견하고 독일 황제나 러시아 황제와의 접촉을 시도했으며 같은 해에 이스탄불로 넘어가 투르크의 술탄까지 알혀하고자 했다.
물론 이런 일련의 접촉계획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으나 일련의 독특한 행보를 통해 헤르츨의 이름은 유대인과 비유대인을 가리지 않고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그 과정에서 접촉한 유대인들은 이후 헤르츨의 구상이 현실화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헤르츨은 1897년 시온주의 총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관계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헤르츨은 처음에 취리히를 떠올렸으나, 러시아 측에서 대규모 비밀경찰을 주둔시키고 있는 취리히는 처음부터 동유럽 참가자들의 참가율을 저하시킬 우려가 있었다.
2차 후보로는 교통이 편리한 뮌헨이 선택되었으나, 이곳에서는 보수적인 "독일 유대교 성직자 총연맹" 이 시온주의 총회 개최를 극렬 반대했다.
결국 최종 후보지는 스위스 바젤의 어느 선술집으로 결정되다. 하지만 언론인으로서 대외 이미지에 민감했던 헤르츨은 최종적으로 장소를 공립 카지노로 변경했다.
이 과정에서 유명 문화비평가이자 헤르츨의 친우인 막스 노르다우 등이 헤르츨의 조력자로 참가했다.
1897년 8월 29일, 시온주의 총회가 정식으로 개최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러시아,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알제리 등에서 온 200여명의 참석자들이 자리했다.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러시아측이 63명의 대표를 파견했으며, 그들이 대부분 명망있는 유대인 사회 운동가나 랍비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연설과 토론을 거치며 조직을 재구성했다.
이 과정은 거의 전적으로 헤르츨이라는 초인 한명의 손에 진행되었다.
이때 일부 관계자들은 "당신의 계획에 동참할 유대인들은 아마 러시아계 뿐일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헤르츨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고 맞받아쳤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서유럽인들은 재력적으로 부유했으나 아직 반유대주의에 뚜렷한 위협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조직적이지도 못했다. 반면 러시아를 위시한 동유럽의 유대인들은 강렬한 탄압을 거치며 계몽 운동을 통해 대규모 인력의 동원이 가능한 잘 조직된 정치적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서유럽 시온주의 운동의 가장 골치아픈 걸림돌이었던 "행동력" 은 강인한 동유럽의 아슈케나짐들에게는 별다른 장해가 되지 못했다.
1회 시온주의 총회를 마친 헤르츨은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나는 바젤에서 유대 국가를 건설했다. 내가 만약 오늘 이렇게 말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5년이나 50년이 지난 뒤에는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50년과 6개월이 지난 후, 헤르츨의 장담은 현실이 되었다.



헤르츨이 초기 시온운동에 끼친 영향은 결코 간과할 수가 없다.  불과 수 년만에 분산된 각지의 시온주의자들을 결집시키고, 그들을 통일된 목소리를 지닌 정치단체로 발전시킨것은 분명 그의 업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외교가나 지도자로서의 헤르츨이 아닌 사상가로서의 헤르츨이 "완성된 시온주의를 주창했는가" 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이 존재한다.

일단 헤르츨은 민족 국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첫 저서인 "유대인 국가" 는 "민족의 자유가 보장되는" 국가를 말했으며, 이는 유대인들의 새로운 땅이 "다른 민족의 자유조차 포용해야 한다" 는 것을 의미했다.
그가 말하는 기준은 서유럽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국제인적 특성을 지닌 유대인에게 걸맞는 것이었으며, 실질적으로 시오니즘 운동 추진의 핵심인 동유럽 유대인들의 종교성이나 민족적 정체성은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이런 경향은 언어정책에 대한 그의 주장에서도 잘 나타난다. 헤르츨은 그 단계에서 문명화된 유대인들의 가장 주된 언어였던 독일어를 주 언어로 하여 모든 유럽의 언어가 통용되는 스위스와 같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헤르츨의 기록에서는 "히브리어나 유대어로 기차표를 주문하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라고 빈정되는 시오니스트의 영도자가 등장한다.
이런 주장의 근간은 헤르츨이 유대인의 범주를 "종교적인 것" 이 아닌 "혈통적인 것" 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종래의 유대교는 엄격한 율법을 지킨다면 타 민족도 유대인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대외적으로는 "유대인과일반인의 차이는 토요일에 회당을 찾는가, 일요일에 교회나 성당을 찾는가" 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서유럽에서는 19세기 해방운동 이래 많은 유대인들이 세속화되어 여타 민족과 결혼하면서 혈통적으로 유대인을 구분하는 선은 매우 옅어졌다.
그러나 헤르츨이 말하는 유대인이란 "반 유대주의에서 바라보는 유대인" 을 뜻했다.
반유대주의의 특성은 종교가 아닌 혈통으로 구분되는 민족이라는 점은 19세기에 분명히 드러났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가 헤르츨이 직접취재한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즉 혈통적으로 구분되는 민족에 대한 증오의 대상이었으며, 그가 말하는 시오니즘이란 국가 건립이라는형식으로 혈통적 민족적 차별에 맞서는 법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헤르츨의 사상이 유대인의 범주에만 머물렀다는 점이다. 그는 팔레스타인을 "나라 없는 민족을 위한 민족 없는 나라" 라고 묘사하며 현지에서의 충돌을 간과했다.
헤르츨이 팔레스타인을 바라보던 시각은 지극히 유럽적이었다. 그는 훌륭한 교육을 받은 유대인들이 문명적으로 뒤떨어진 팔레스타인에게프로메테우스의 불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았으며, 아랍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평등한 종교적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있으리라고 보았다.

서유럽과는 완전히 상반된 형태로 시온주의를 발전시킨 동유럽에서, 헤르츨의 주장은 큰 반향을일으키긴 했으나 완전한 동조를 얻지는 않았다. 유대인 문제를 "민족적" 인 것이 아닌 "문화적" 인 문제로 바라보던 동유럽의유대인 지도자들은 헤르츨의 주장을 강렬히 반발했다.
그 중심에는 동유럽 시온주의 사상의 핵심, 아셔 긴츠베르그 Ascher ginzberg 가 있었다.
아하드 하암이라는 필명으로 더욱 잘 알려진 이 사상가는 종교적인 문제에서 시오니즘을 해석하려던 종래의 랍비들이나 민족적인 차원에서반 유대주의와 시온주의를 해석하려 했던 헤르츨과 달리 "문화" 적인 차원에서 시온주의 운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팔레스타인의 수복과 시온주의에 의한 국가 재건은 "유대인을 위한 피난처의 제공" 이 아니라, "세계 어디에 있건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모국" 의 존재였다.
아하드 하암은 이를 위해 직접 팔레스타인을 여행하며 현지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고, 베네 모셰Bene Mosche 라는 독립 단체를 결성해 물밑에서 시온주의 운동을 실행에 옮겼다.
또한 그는 앞서 일어났던 하바트 시온 운동을 강렬히 비판했다. 목적도 추진력도 없이 단순히 종교적 관념만을 의지해 추진되는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런 실현적 관점은 1889년에 발표된 "이것은 길이 아니다" 라는 글과 1891년에 발표된 "이스라엘에 관한 진실" 등에서분명히 나타났다. 특히 "이스라엘에 관한 진실" 에서 그는 시온주의 운동이 현실적인 영역에 도달할 경우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과의충돌을 피할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했다.
이런 아하드 하암의 주장은 헤르츨과 같이 화려하지 않았으며 그만큼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동유럽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시온주의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아하드 하암의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이것은 헤르츨과의 정면 대립을 뜻했다.

헤르츨은 자신의 사상을 소개하기 위한 계몽적 소설, "오래된 새 땅" 을 써서 1902년에 발표했는데, 이 책은 나훔 소콜로프가히브리어로 번역했다. (히브리어 제목은 "텔 아비브Tel Aviv" 로 이후 팔레스타인 최초의 유대인 계획도시의 이름이 되었다)
정치적 도덕적 문명적 이상향을 그린 헤르츨의 소설은 어떤 의미에서는 쥘 베른이 쓴 "인도 왕비의 유산" 이나 기타 건설적 이상향에 대한 소설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경향이 있었다.
완전한 계획 하에 건설된 헤르츨의 이상향은 유럽의 문명이 완성시킨 모든 장점의 총합과 같은 곳이었으며, 그곳에서는 유대인과아랍인이, 남성과 여성이, 부자와 노동자가 완전한 평등을 향유했다. 유대교는 상징적인 선에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으로서 남게 되며,대신 그들에게는 성전산의 성전이 주어졌다.

그러나 아하드 하암은 이런 헤르츨의 구상을 "도대체 성전을 어디에 세우겠다는 것인가?" 라며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그가 보고 온 예루살렘의 성전산 정상에는 마호메트의 승천지를 위해 세워진 황금돔이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덧글

  • rumic71 2008/12/25 00:27 #

    '외려 훨씬 많은 미국인들이 북아메리카를 향해~' 오타인듯.
  • Luthien 2008/12/25 12:39 #

    으악, 역시 사람은 졸릴때 뭘 쓰면 안됩니다.
  • 계원필경 2008/12/25 00:30 #

    결국 동유럽의 포그름으로 인해 유대인이 고생을 많이 했죠...(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곳은 다름 아닌 독일(과 미국))
  • Luthien 2008/12/25 12:39 #

    독일에서도 다시.
  • ghistory 2008/12/25 00:53 #

    1791년의 프랑스 혁명이었다→1789년이 아닐까요?
  • Luthien 2008/12/25 12:39 #

    으악, 정말 별별 실수를 다 하네요. T-T
  • paro1923 2008/12/25 01:02 # 삭제

    반유대주의는 오늘날에도 썩질 않는 '방부제 떡밥'이지요.
    하기사, '시집살이 호되게 한 시어미'가 더 무섭듯
    요즘엔 이스라엘이 '가해자' 포지션에 서 있는 탓도 있지만...
    그나저나, 정말로 '예언'이었네요. 그 과정이 뒤죽박죽이었지만...
  • Luthien 2008/12/25 12:39 #

    냐옹.
  • 2008/12/25 11:44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Luthien 2008/12/25 12:39 #

    설마
  • 네비아찌 2008/12/25 15:10 #

    하긴 아직도 시온의정서가 위작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이 이 한국에도 많은 판이니....
  • 지오닉 2008/12/25 16:25 #

    5월 법.....정말 무서운 시대의 무서운 나라란 생각이 듭니다.
  • 묘련 2008/12/26 11:31 # 삭제

    으아.. 출간되면 사서 천천히 다시 읽어봐야겠네요 ㅇ_ㅇ
    모니터로 읽는건 역시 눈과 집중력에 무리가....(그러니까 회사에선 일만 하라고!;)
  • ghistory 2008/12/27 20:26 #

    '귀화령'→'해방령' 아닐까요?

    1776년: 미국이 독립 성공한 해가 아니라 선언한 해입니다.

    로트실드→도이치어라면 로트실트.
  • ghistory 2008/12/27 20:52 #

    1776년: 독립을 선언한 해가 아닐지요. 인정받는 건 그 뒤고.

    로트실드→로트실트?

    국민회의→국민의회.

    '회당'→'시나고그' 가 낫지 않을까요?

    갈리시아→갈리치야.

    Damaskus→Damascus.

    모세스 몬티피오레→모지스 몬티피오리?

    조제프 사무엘 블로흐→요제프 자무엘 블로흐.

    반셈족 이론→반유대주의 이론이라 해야 합니다.

    모세스 헤스→모제스 헤스.

    프러시아→프로이센.

    하르덴→하르던?

    십자군의 공격으로 폴란드까지 밀려났다가: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마 페스트 당시의 박해를 피해 페스트가 유행하지 않고 유대인에게 관용을 보인 폴란드 이동으로 대거 이주한 게 아닐지?

    키시네프→현재 몰도바의 수도인 키시너우(Chişinău). 러시아어식 표기는 키시뇨프(Kishinyov).

    시온 의정서→시온 장로들의 의정서들.

    샬루카→찰루카?

    Folkspartey→Yidishe Folkspartei(Jewish People's Party).

    Dubnow→Dubnov.

    스폰서→후원자.

    평지→대평원?

    투르크→오스만제국.

    공립 카지노: 무엇을 지칭하는지요?

    긴츠베르그→긴츠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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