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25 18:01

중동전쟁사 2편 일부 내용 추가했습니다.



어제 졸려서 빠진 아하드 하암 이야기가 추가되었습니다. (아흠)
볼 분들 다 본 뒤에 본 포스팅은 삭제합니다.

추가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헤르츨이 초기 시온운동에 끼친 영향은 결코 간과할 수가 없다.  불과 수 년만에 분산된 각지의 시온주의자들을 결집시키고, 그들을 통일된 목소리를 지닌 정치단체로 발전시킨것은 분명 그의 업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외교가나 지도자로서의 헤르츨이 아닌 사상가로서의 헤르츨이 "완성된 시온주의를 주창했는가" 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이 존재한다.

일단 헤르츨은 민족 국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첫 저서인 "유대인 국가" 는 "민족의 자유가 보장되는" 국가를 말했으며, 이는 유대인들의 새로운 땅이 "다른 민족의 자유조차 포용해야 한다" 는 것을 의미했다.
그가 말하는 기준은 서유럽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국제인적 특성을 지닌 유대인에게 걸맞는 것이었으며, 실질적으로 시오니즘 운동 추진의 핵심인 동유럽 유대인들의 종교성이나 민족적 정체성은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이런 경향은 언어정책에 대한 그의 주장에서도 잘 나타난다. 헤르츨은 그 단계에서 문명화된 유대인들의 가장 주된 언어였던 독일어를 주 언어로 하여 모든 유럽의 언어가 통용되는 스위스와 같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헤르츨의 기록에서는 "히브리어나 유대어로 기차표를 주문하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라고 빈정되는 시오니스트의 영도자가 등장한다.
이런 주장의 근간은 헤르츨이 유대인의 범주를 "종교적인 것" 이 아닌 "혈통적인 것" 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종래의 유대교는 엄격한 율법을 지킨다면 타 민족도 유대인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대외적으로는 "유대인과 일반인의 차이는 토요일에 회당을 찾는가, 일요일에 교회나 성당을 찾는가" 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서유럽에서는 19세기 해방운동 이래 많은 유대인들이 세속화되어 여타 민족과 결혼하면서 혈통적으로 유대인을 구분하는 선은 매우 옅어졌다.
그러나 헤르츨이 말하는 유대인이란 "반 유대주의에서 바라보는 유대인" 을 뜻했다.
반유대주의의 특성은 종교가 아닌 혈통으로 구분되는 민족이라는 점은 19세기에 분명히 드러났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가 헤르츨이 직접 취재한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즉 혈통적으로 구분되는 민족에 대한 증오의 대상이었으며, 그가 말하는 시오니즘이란 국가 건립이라는 형식으로 혈통적 민족적 차별에 맞서는 법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헤르츨의 사상이 유대인의 범주에만 머물렀다는 점이다. 그는 팔레스타인을 "나라 없는 민족을 위한 민족 없는 나라" 라고 묘사하며 현지에서의 충돌을 간과했다.
헤르츨이 팔레스타인을 바라보던 시각은 지극히 유럽적이었다. 그는 훌륭한 교육을 받은 유대인들이 문명적으로 뒤떨어진 팔레스타인에게 프로메테우스의 불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았으며, 아랍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평등한 종교적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서유럽과는 완전히 상반된 형태로 시온주의를 발전시킨 동유럽에서, 헤르츨의 주장은 큰 반향을 일으키긴 했으나 완전한 동조를 얻지는 않았다. 유대인 문제를 "민족적" 인 것이 아닌 "문화적" 인 문제로 바라보던 동유럽의 유대인 지도자들은 헤르츨의 주장을 강렬히 반발했다.
그 중심에는 동유럽 시온주의 사상의 핵심, 아셔 긴츠베르그 Ascher ginzberg 가 있었다.
아하드 하암이라는 필명으로 더욱 잘 알려진 이 사상가는 종교적인 문제에서 시오니즘을 해석하려던 종래의 랍비들이나 민족적인 차원에서 반 유대주의와 시온주의를 해석하려 했던 헤르츨과 달리 "문화" 적인 차원에서 시온주의 운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팔레스타인의 수복과 시온주의에 의한 국가 재건은 "유대인을 위한 피난처의 제공" 이 아니라, "세계 어디에 있건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모국" 의 존재였다.
아하드 하암은 이를 위해 직접 팔레스타인을 여행하며 현지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고, 베네 모셰Bene Mosche 라는 독립 단체를 결성해 물밑에서 시온주의 운동을 실행에 옮겼다.
또한 그는 앞서 일어났던 하바트 시온 운동을 강렬히 비판했다. 목적도 추진력도 없이 단순히 종교적 관념만을 의지해 추진되는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런 실현적 관점은 1889년에 발표된 "이것은 길이 아니다" 라는 글과 1891년에 발표된 "이스라엘에 관한 진실" 등에서 분명히 나타났다. 특히 "이스라엘에 관한 진실" 에서 그는 시온주의 운동이 현실적인 영역에 도달할 경우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과의 충돌을 피할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했다.
이런 아하드 하암의 주장은 헤르츨과 같이 화려하지 않았으며 그만큼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동유럽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시온주의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아하드 하암의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이것은 헤르츨과의 정면 대립을 뜻했다.

헤르츨은 자신의 사상을 소개하기 위한 계몽적 소설, "오래된 새 땅" 을 써서 1902년에 발표했는데, 이 책은 나훔 소콜로프가 히브리어로 번역했다. (히브리어 제목은 "텔 아비브Tel Aviv" 로 이후 팔레스타인 최초의 유대인 계획도시의 이름이 되었다)
정치적 도덕적 문명적 이상향을 그린 헤르츨의 소설은 어떤 의미에서는 쥘 베른이 쓴 "인도 왕비의 유산" 이나 기타 건설적 이상향에 대한 소설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경향이 있었다.
완전한 계획 하에 건설된 헤르츨의 이상향은 유럽의 문명이 완성시킨 모든 장점의 총합과 같은 곳이었으며, 그곳에서는 유대인과 아랍인이, 남성과 여성이, 부자와 노동자가 완전한 평등을 향유했다. 유대교는 상징적인 선에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으로서 남게 되며, 대신 그들에게는 성전산의 성전이 주어졌다.

그러나 아하드 하암은 이런 헤르츨의 구상을 "도대체 성전을 어디에 세우겠다는 것인가?" 라며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그가 보고 온 예루살렘의 성전산 정상에는 마호메트의 승천지를 위해 세워진 황금돔이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에는 바로 중동으로 갑니다. (어흥)
그냥 짤막한 내용이므로 벨리에는 보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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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ghistory 2008/12/27 20:14 # 답글

    유대어: 이런 언어가 존재하는지요?

    마호메트: 무함마드가 낫겠습니다.

    황금돔: 알-아크사 마스지드가 낫겠습니다.

    긴츠베르그→긴츠베르크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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