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사 수정 : 드레퓌스 사건 증보판 메모뭉치

중동전쟁사 2. 19세기의 변화, 시온주의의 태동 <= 해당 포스팅의 드레퓌스 파트 증보판입니다.
괄호 안 내용은 실제 원고에는 들어가지 않은 포스팅용 문장입니다.

1894년 프랑스군 정보국은 독일로 군사 정보를 유출한 스파이에 대해 수사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유대계 장교인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사실 정보국 측에게도 유출 서류에 적힌 "D" 라는 이니셜이 드레퓌스의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과 일부 필적 외에는 뚜렷한 증거가 없었다.
그러나  독일과의 전쟁에서 완패한 후유증으로 인해 사건이 장기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프랑스군 수뇌부는 사건을 최대한 빨리 무마하기 위해 정확한 수사과정을 은폐한 채 드레퓌스를 체포해 버렸다.
문제는 그 뒤에 터져나왔다.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소령이라는 진범이 확인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드레퓌스를 진범으로 지목한 종전의 판결을 뒤집지 않았다.
드레퓌스 자신은 유능하지 않은 평범한 장교였으나, 그 이전에 공화국 당시 공화국의 해방주의 조류에 의해 장교로 승진하여 참모부에 재직중이던 유일한 유대인이기도 했다.
나폴레옹 3세 휘하에서 요직을 차지한 왕당파의 고위 장교들은 드레퓌스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며, 사건이 드레퓌스와 연결되자 이를 의심없이 받아들였다.
반대로 진범인 페르디낭 에스테라지는 파리에서 퇴어난 귀족 가문 출신의 왕당파였다.
실질적인 프랑스군의 수뇌집단이었던 참모본부측은 이미 드레퓌스를 체포한 상태에서 공화파의 상징인 드레퓌스를 석방하고 전형적 왕당파였던 에스테라지를 체포한다는 것은 군-정확히는 왕당파 중심의 참모본부와 대령회, 기타 프랑스군 집단의 체면을 깎아내릴 것이라고 보았다.
결국 정보부의 조제프 앙리 대령과 뒤파티 드 크랑 소령 등은 이 사건과 관련된 기록을 조작해 드레퓌스에게 스파이 혐의를 떠넘겼고, 드레퓌스는 참모본부의 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내의 반 유대 감정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군부와 가톨릭 교회, 언론 등은 드레퓌스의 예를 들어 공공연히 유대인의 사회 진출을 비난했다.
이후 정보부에 임관한 조르쥬 피카르 중령은 내부인수과정에서 드레퓌스 사건의 진범이 에스테라지이며 그 과정에서 정보조작이 있었음을 밝혀내고 상부에 이를 보고했으나,  이 사건이 보도되었을 때 당국의 무능이 부각될 것을 우려한 프랑스군은 외려 피카르 중령을 좌천시켰다가 군사 기밀 누설죄로 체포해 버렸다.
덕분에 에스테라지는 혐의가 재차 확인된 뒤에도 여전히 군적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1898년 이 사건의 내역을 실은 서류가 신문에 공개되고, 작가 에밀 졸라나 아나톨 프랑스, 조르쥬 클레망소 등의 문화계 명사들이 드레퓌스 사건을 이성과 법치에 대한 모독이라고 강렬히 비난하며 재심을 요구함에 따라 프랑스 전역이 친 드레퓌스파와 반 드레퓌스파로 나뉘여 격론을 벌이게 되었다.
특히 군의 핵심이던 참모본부나 기존의 반 유대 입장을 견지하고 있던 가톨릭, 기타 보수 언론들은 친 드레퓌스 측의 주장이 프랑스 군의 명예를 훼손하고 범인을 보호하는 일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이때 에밀 졸라는 군법회의를 모독했다 하여 징역을 선고받자 영국으로 망명했다.

드레퓌스가 유대인이라는 것이 조사 초기의 사실 왜곡에 주 원인을 제공했음은 분명하지만, 정작 진범이 확인된 이후의 사건은 프랑스 국내의 복잡한 정치사정이나 군내 권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진행된 만큼 이 사건을 단순히 유대인 차별이나 반 유대주의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은 정치적인 권력을 가진 "기관" 이 "권력을 사용해" 유대인을 공격한 최초의 사례라는 측면에서, 19세기 반 유대주의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제로 파리의 지성들도 이 사건을 단순히 "유태인의 탄압" 이라는 시시한 문제가 아니라, "국가" 나 "군" 이라는 거대 집단이 자신들의 체면이나 이득을 위해 "사실을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은폐하거나 왜곡하고" "개인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조차 임의로 침해한" 사건으로 이해했다.)
사건의 진실이 언론을 통해 유포되자, 얼마 전까지 "유태인을 죽이라" 며 폭동을 일으키던 시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드레퓌스를 석방하라" 며 친 드레퓌스 시위에 동참했다.
(드레퓌스를 징죄한 이들이나, 그들이 사육하는 머저리같은 돼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민들은 자신이 두 번째 드레퓌스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사건의 내역이 공공연히 공개되자, 정보조작의 당사자 가운데 한명인 조제프 앙리 대령이 자살하고 에스테라지조차도 자신이 진범임을 자백했다.
당사자들의 자백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프랑스군은 (사건 조작으로 인해 군의 명예가 실추될대로 실추된) 1904년이 되어서야 백기를 들고,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 을 인정했다.
그러나 프랑스 군법회의는 5:2로 "드레퓌스의 반역죄" 를 선고해 사건의 향방을 주목하던 국민들을  광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물증과 범인이 명백한 이상 결론이 뒤바뀔 리 없었다.
결국 사건은 1906년 프랑스 최고재판소까지 (기어) 올라가서야 드레퓌스의 무죄가 인정되었으며, 프랑스군도 그의 "복권" 을 인정함에 따라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여기에서 복권은 무죄와는 다른 말이다. 프랑스군은 1995년이 되어서야 드레퓌스가 무죄이며 당시 군법회의가 조작되었음을 정식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반유대주의가 프랑스 내에서 완전히 일소된 것은 아니었다.
사건이 일단락된 이후에도 일부 국민들은 국민들은 드레퓌스 무죄가 선고된 뒤에도 대로에 모여 "유대인을 살해하라" 고 외치고 다니곤 했다.
반 드레퓌스파 인사들도 "스파이 혐의가 인정되지 않도록 유대인들이 음모를 꾸몄을 것" 이라거나 "스파이 혐의는 있을지 몰라도 어쨌건 다른 죄는 저질렀을 것" 이라는 무책임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참고로 독일에서는 드레퓌스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는 애초에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은 독일 육군의 장교로서 임관할수 없도록 규제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드레퓌스의 유죄를 끝까지 주장하던 마르셸 앙리 필립 페탱은 1차 세계대전 중 베르됭에서 2군단을 이끌고 좀 날리기는 했지만, 종전후 스페인에 건너가 프랑코의 자문역을 맡았으며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하자 비시 프랑스 정권을 세웠고, 1945년 반역죄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드골의 은혜(...)로 종신형까지 감형되었다나 어쨌다나.)



덧글

  • 행인1 2008/12/27 19:51 #

    드레퓌스는 애초부터 공화정의 상징이었던 셈이군요...
  • Luthien 2008/12/28 20:49 #

    이후 나폴레옹 세짤이 올라서면서 입지가 위태해졌습니다만...기본은 그냥 평범한 위관급 참모장교였다고 합니다.
  • 슈타인호프 2008/12/27 19:53 #

    에스테라지가 헝가리계라는 말이 있던데, 혹시 그건 사실인가요?
  • Luthien 2008/12/28 20:49 #

    그런 말도 있더군요.
  • ghistory 2008/12/27 20:08 #

    '대령회' 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마르셸 앙리 필립 페탱: 마르셸은 그의 이름이 아니라 '원수'(Maréchal Pétain)의 오기인 듯 합니다. 정식 본명은 Henri Philippe Benoni Omer Joseph Pétain(앙리 필리프 브노니 오메르 조제프 페탱).

    '2군단'→군단보다 더 큰 '제2군' 이 아닐까요?(IIe Armée/Second Army)

    프랑코의 자문: 고문으로 간 건 아니고 에스파냐 주재 프랑스 대사로 1939년에 부임했다고 기억합니다.
  • Luthien 2008/12/28 20:52 #

    대령회 = 프랑스는 나폴레옹 이후 군 내 대령진의 입김이 굉장히 강한 군이 되었지요. 군제사 쪽 이야기입니다.

    페텡 = 이름 기억 안나서 대충 긁어 썼더니 이런 실수를 lllOTL

    프랑코 = 자문이라는 직책은 없지요. 한 일은 자문이 맞지만요.
  • rumic71 2008/12/27 21:10 #

    프랑코가 페탱에게 귀국하지 말라고 뜯어말렸다고 하지요. 가면 덤터기 쓴다고.
  • Luthien 2008/12/28 20:52 #

    그러면서도 가서 세운게 비시. 나중엔 "국민의 뜻이었다"
  • TSUNAMI 2008/12/27 21:23 # 삭제

    흔히 근대 파시즘과 반유대주의라고 하면 독일, 그보다 정도는 약하지만 이탈리아를 연상하지만 프랑스도 두 나라 못지않은 강고한 (프랑스혁명에 반대하는)파시즘과 반유대주의의 강고한 전통과 흑역사를 가지고 있더군요.

    출전 : <호모 파시스투스>, 이용우, 책세상
  • Luthien 2008/12/28 20:53 #

    ...그동네에 정의의 국가가 있던가요.
  • ghistory 2008/12/28 21:20 #

    이용우가 아니라 김용우 아닙니까?
  • 계원필경 2008/12/27 22:56 #

    드레퓌스 문제는 결국 엠스 전보처럼 문서(나 전보) 쪼가리 하나로 역사에 큰 상처(?)른 남긴 경우라는...
  • Luthien 2008/12/28 20:53 #

    그렇지요 뭐.
  • 고어핀드 2008/12/28 02:01 #

    프랑스 군부가 이 사건에 대해서 인정하고 사과한 건 20세기가 거의 끝나서로 알고 있습니다. 하여간 거기도 보수는 보수...
  • Luthien 2008/12/28 20:54 #

    그게 95년이죠. 무슨 장군이 그것도 강연 자리에서 공식 거론한걸로 아는데...
    역시 유로짱개랄까요.
  • sephia 2008/12/28 18:44 # 삭제

    하여튼 후....

    저 사건은 답이 없었죠.
  • Luthien 2008/12/28 20:54 #

    요즘도 답이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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