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초 까지도 캐나다는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런데 아랫동네 미국은 독립했댑니다. 배가 좀 아팠던 캐나다인들은 1837년에 본격적인 대 영국 무장항쟁에 돌입합니다.
하지만 애초에 미국만큼 넉넉하지도 않고 전국적인 호응도 없는 상황인지라 북부에서 싸우던 캐나다 독립군은 세인트 마틴에서 영국 독립군에게 패배해 버렸습니다.
지금의 온타리오 주 쯤에 해당하는 남부의 독립군은 12월 13일에 나이아가라 강의 해군섬(이름이 Navy...) 으로 들어가 캐나다 공화국 임시정부(...)를 설립했지만, 이듬해 1월 13일에 영국군의 강습으로 전멸했고...결국 실질적인 캐나다 독립은 1867년이 되어서야 정치적인 형태로 완수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1837~1838년 간의 무장항쟁 가운데 규모면으로는 이게 뭔가 싶은, 하지만 국제적으로는 꽤나 의미깊은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일단 캐나다의 독립운동은 초기부터 미국과 간접적인 영향관계에 있었습니다.
미국이야 일단 영국과 재차 마찰관계를 빚고 싶지 않은 처지였던지라 공식적으로 캐나다를 지지하진 않았지만, 미국 국내 (뉴욕이라던가) 에서 의용병 모집을 묵인하는 선에서 민간단위의 자원을 방조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윌리엄 맥켄지와 스테판 린슬레어라는 아저씨들은 미국에서 물자와 병력을 뫼셔다 강 중앙에 있는 해군 섬에 실어나르기로 결정하고, 거기에 적합한 배를 수배했습니다.

일단 겨울 강을 건너기 위해선 단순한 인력 보트나 범선(...) 같은 걸로는 무리, 인근 도시를 물색하던 두 사람은 버팔로 인근에서 케롤라인이라는 선명의 46톤급 외륜선을 찾아내어 이 배를 빌리기로 했습니다.
케롤라인 호는 12월 28일부터 야음을 틈타 (이설이 있습니다만) 물자를 해군 섬으로 실어나르기 시작했고, 영국군은 섬에 정박한 배를 포착하자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하지만 캐롤라인은 소수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탈출에 성공합니다.
다음날인 12월 29일에도 캐롤라인 호는 물자와 인원 수송을 시도했고, 이번에는 처음부터 노리고 있던 영국군의 공격을 받았지만 역시 수송과 이탈에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영국군 측에서는 케롤라인호가 보급을 계속하는 한은 해군섬 공략이 쉽지 않을 거라고 추정하고, 파괴를 결정합니다.
문제는 공격 방식이었습니다. 일반 보트로 공격하기에는 (이래뵈도) 증기선인 케롤라인호가 지나치게 크고 높고 무겁고 빨랐습니다. (게다가 보충병이라지만 무장도 하고 있고요)
강안에서 포격을 하기에는 야간이라는 문제와 사거리 및 정밀도의 한계가 존재하니 이것도 무리.
정박했을 때 공격하면 확실하지만, 해군섬에 정박중인 배를 공격할 능력은 영국군에게 없었습니다.
그게 가능하면 진작 해군섬 공략 끝내지요.
그렇다면 답은 단 하나. 포구에 정박했을때 기습 공격을 가하는 겁니다.
문제는 해군섬 말고 캐롤라인호가 정박할 곳은? "미국 영토" 뿐입니다.
...그럼에도 영국군은 특공대를 뽑아 야습을 감행, 주요 승무원들이 배를 비운 틈을 타 보트를 이용해 캐롤라인호에 난입하고 불을 질러 하구로 떠내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하구에는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었지요. 화르륵, 둥실둥실, 휘잉~ 콰직.
이 과정에서 (1명, 혹은 2명의) 선내에서 수면을 취하던 미국인이 사망했습니다.

문제는 역시 영국군이 미국 영내에서 작전을 실시하고 미국인을 사살했다는 것.
영국군 입장에서는 "저 배가 있으면 아군이 더 죽는다" 라고 할만한 상황이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주권침해라고도 받아들일수가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결국 1842년이 되어서 미국의 국무장관인 다니엘 웹스터와 영국에서 온 에쉬버튼 남작의 샤바샤바를 통해 웹스터-에쉬버튼 조약이 채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단순히 케롤라인 호 사건만을 다룬게 아니라 미국 북서부 국경문제나 노예무역 단속 같은 그간의 현안들을 뭉뚱그린 물건이었습니다만, 역시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케롤라인호 관련 사건이었습니다.
영국의 "자위권 발동" 내지 "역외권 법집행 활동" 이라는 주장에 대해, 미국측은 "자위권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상황이 급박하고 압도적이며, 협상의 여지나 여유가 없고 기타 무력 외 수단이 없을 경우에 한해야 한다" 고 반박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자위권의 행사는 자위권을 행사하지 않을 경우 입을 피해에 준하는 선에서 한정되어야 한다" 고도 했지요.

결국 사건은 영국측의 사과로 최종 종결되었으며, 이 당시 웹스터가 말한 원칙은 이후 국제적인 자위권 행사의 가이드라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
ps: 오랫만에 이미지 난사. 요즘의 모 사태에 대입해 보면 재미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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