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44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11월 12일(임술) 1번째기사
임금이 총을 고안하여 유성룡으로 하여금 시험해 보라고 전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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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유성룡에게 전교하였다.
“조총(鳥銃)은 천하에 신기한 무기인데 다만 화약을 장진하기가 쉽지 않아서 혹시라도 선(線)이 끊어지면 적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내가 이를 염려하다가 우연히 이런 총을 만들었는데, 한 사람은 조종하여 쏘고 한 사람은 화약을 장진하여 돌려가면서 다시 넣는다면 탄환이 한없이 나가게 될 것이다. 다만 처음 만든 것이라 제작이 정교하지는 못하다. 지금 경(卿)에게 보내니 비치해 놓고 한번 웃기 바란다.”【옛부터 중흥(中興)한 임금들은 영웅(英雄)을 맞아 들이는 것과 민심을 기쁘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고 무기를 정교하게 갖추기에는 구구히 마음쓰지 않았다. 조총이 적을 막는데 관계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임금 자신이 무기의 공졸(工拙)을 논하게 된다면 도리의 본말(本末)에 어두운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천하에 위엄을 보이는 것은 병혁(兵革)으로 하는 것이 아닌 데이겠는가. 오늘의 급무는 진실로 여기에 있지 않은데도 대신이 임금의 뜻에 아첨하여 그대로 순응하느라 묵묵히 한마디 말도 없었으니 통탄스럽구나. 】
【태백산사고본】 25책 44권 9장 B면
사관론은 생략하고 본론부터.
...그러니까 총열 수십개를 둥근 고리처럼 배치시켜 놓고, 그걸 돌려가며 한명은 끼워넣고 다른 한명은 불붙이고 당겨 쏘는 겁니다. 전장식 개틀링이랄까요.
일제발사라도 됐다면 그야말로 다연장총. 대체 프랑스 미트라예즈보다 몇년을 앞선건지 계산하기도 두렵네요.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닙니다.
선조 55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9월 3일(무인) 4번째기사
쌍검 사용법을 훈련시키는 일을 논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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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하기를,
“옛날 사람이 쌍검(雙劍)을 쓴 지는 오래이다. 염민(冉閔) 2597) 같은 사람은 왼손에 쌍인모(雙刃矛) 오른손에 구극(鉤戟)을 잡고 군사를 공격하였고, 고황제(高皇帝) 2598) 의 맹장 왕필(王弼) 은 쌍검을 휘두르며 위오왕(僞吳王)의 군사를 맞아 싸우러 갔으니, 이것이 그 한 예이다. 지금도 중국인은 쌍검을 많이 쓴다. 전에 의주(義州) 에 있을 때 어떤 중국인이 쌍검을 잘 사용하는 것을 보았는데 푸른 무지개가 떠서 그의 몸을 감싼 듯하였고 그 민첩한 상황이 마치 휘날리는 눈이 회오리바람을 따라 돌 듯하여 바로 쳐다볼 수 없었으므로 마음에 늘 기이하게 여겼었다. 전에는 평양 사람도 꽤 전습하였었다. 또 들으니 중국인은 말 위에서 쌍검을 쓴다고 하는데 이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내 생각에는 여러가지 무예를 모두 익히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쌍검의 사용을 가르치지 않아서는 안 되지만 그 일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참작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훈련 도감이 회계하기를,
“쌍검의 사용은 다른 기예보다 가장 어려우므로 중국 군사 중에도 능숙한 자가 많지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기사(騎射) 같은 것은 반드시 익숙하게 말 달리기를 익혀 사람과 말이 호응하여야만 좌우로 활 쏘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살수(殺手) 중에도 그 기술(技術)에 능숙한 자는 많이 얻기 어렵습니다. 그 중 몇 사람에게 오로지 쌍검을 가르치게 한다면 재능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므로 차례로 교습하겠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무술의 고사까지 줄줄줄 꿰는 무시무시한 덕력.
그렇습니다. 선조는 밀더쿠였던 거십니다.
그래봐야 전쟁엔 아무 도움도 안됐지만.
ps: 이런거면 모를까 말이죠.
(상략)...영명하신 주상전하깨서는 일찌기 왜침을 예견하시고 신선술을 친히 터득하시었으니, 그 위세가 대단하여 가히 옛 주나라 태공망에 비할만 하였다.
임진년에 왜란이 나매, 주상께서 친히 솔잎을 끊어 화살을 만들고 나뭇가지를 잘라 칼과 활을 지으시자 신립, 이일 등이 기꺼워하며 이를 받고 왜적과 어울려 일전을 벌였으나 덕이 높지 않아 군사들이 모두 달아날 뿐이었다.
이에 주상전하께서는 활과 화살을 만드려 도성의 강산이 크게 상하였다 슬퍼하시며, 평양과 의주로 계속 천도하며 왜적을 축차적으로 소모하자는 종심방어전략을 세우시니, 온 도성 백성들이 모두 모여 궁에 불을 붙이고 환호하며 이를 따랐다...(하략)
덧글
그런 밀덕이었으면서 거북선이란 훌륭한 '장난감'을 만든 이순신장군은 왜 그리 홀대했던 걸까요?
임진왜란을 대조국전쟁이라고 바꿔부르는 수준의 ps지 말입니다;;
라는 건 훼이크고 새해 대업패도 무운을 기원드립니다 굽신굽신
라는 건 훼이크고 이리 왕림해주시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굽신굽신
평양전이 1월에 있었고 당 기사는 11월이었으니 선조가 불랑기의 연속장전에서 모티브를 얻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덕후적 망상이라는 데 한표를.
현실은 극과 극이지만(...)
선조+원균 vs 왜군 ->.... 이래서 밀덕후는 곤란
물론 그 의의가 무의미했기에 남은게 없겠지마는요.
저말이 사실이라 착각을 하니 스탈린 or 김일성이 선조의 환생아닌가 라는 착각까지 하게되는군요.
전란중에도 병혁을 천하다 하는 모 사관도 의주로 달아날때는 고생 깨나 했을텐데 말입니다.
아마 효율이나 난이도 문제로 차차 실전되어 가다 정조 적에 복원되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