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사 5+a, 오스만 투르크 쇠망. 연재뭉치

앞선 포스팅이었던 중동전쟁사 5. 십자군, 오스만 투르크 : 근대 이전의 이슬람. 을 너무 성급하게 끝낸 감이 있어 보충합니다.
완성버전에선 양자가 통합될 듯. 합칠때 뜯어고칠 예정이라 초고 그대로 갑니다. (...)

이슬람 세계를 통일하고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오스만 투르크는 당시 유럽의 기독교권 국가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상대로 세계 최대의 공성포를, 맘루크의 칼과 활을 상대로 장총 부대를 투입했던 군사 기술이나, 비잔틴과 성 요한 기사단을 상대로 동원했던 막대한 병력도 공포스러웠지만, 보다 큰 문제는 오스만의 사회구조 자체가 외부에서 성장 동력을 흡수하는 형태라는 것이었다.
오스만 투르크는 정복지의 안정화를 위해 샤리아에 입각해 관대한 통치정책을 유지했으며, 조세율을 억제하고 지방의 자주성을 인정해 주었다.
하지만 관대한 정책만으로 국가를 유지하고 기독교 세계와 대결하는데 충분한 비용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이런 상황에서 국가를 유지하고 성장시키기 위한 동력은 지속적 확장 정책이나 외부와의 무역에서 얻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오스만 제국의 정체 및 쇠퇴도 무역 및 팽창정책의 중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실질적으로 오스만의 팽창정책을 중단시킨 것은 "패배" 가 아닌 "유럽의 성장" 이었다.
빈 공방전이나 레판토 해전과 같은 결정적 전투의 의의는 "오스만의 진출을 저지한 것" 이지, "오스만의 힘을 분쇄한 것" 은 아니다.
실제로 지상전의 대표사례인 1529년과 1683년의 두 차례 빈 공방전은 합스부르크의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첫 전투는 헝가를 공략하고 여유가 남은 오스만이 빈을 건드려 보다 질서정연히 퇴각함에 따라 흐지부지되었고, 두 번째 전투는 빈 함락 이후를 염두에 두고 군사적 손실이 없는 포위전을 시도하는 여유를 부리던 오스만군이 폴란드까지 참전한 필사적 반격에 밀려난 것이어서, 어느 쪽도 "오스만의 전쟁능력과 의지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고 보기는 무리가 있다.
해전 역시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오스만은 1571년의 레판토 해전에서 기독교 연합에 대패하며 지중해 일대의 해군 전력 태반을 상실했지만, 정작 패배 소식을 접한 술탄이 "우리의 함대는 재기할수 있는가" 라고 묻자 재상은”일 년 내로 동일한 규모의 함대를 비단 돛으로 치장해 복원할 수 있다" 고 여유있게 답할 지경이었다.
재상의 말 대로 오스만 해군은 불과 반년 만에 부활에 성공하여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지중해 제해권을 놓고 자웅을 겨뤘고, 1655년에도 크레타 앞바다에서 베네치아 해군에 크게 패했으나 불과 2년 후에 재건된 해군이 베네치아 해군을 몰아내는 저력을 보였다.

하지만 이 몇 차례 결정적 전투가 오스만의 발을 묶는 동안, 유럽 내에서는 군소 세력들이 차례 차례 정리되고 소수의 강력한 통일국가들을 중심으로 세력 구도가 재편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동맹을 통해 지중해와 동유럽에서 오스만과 맞섰으며, 외부적으로는 신대륙과 아프리카 진출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오스만의 팽창정책은 급격히 성장한 유럽의 군사력에 가로막혔고, 오스만의 무역은 유럽의 해외 식민지 진출로 인해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즉 오스만의 두 성장동력이 고갈되어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제국은 힘을 잃고 시들기 시작했다.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중앙에 집중되었던 거대한 부의 분산이 시작되었고, 부의 분산은 중앙의 정권 약화와 지방세력의 강화로 이어졌다.

이렇게 오스만이라는 강력한 중앙집권 제국이 자연스레 마비되는 동안, 유럽에서는 르네상스를 지나 급격한 팽창기에 접어든 주요 국가들이 바다 건너 세계의 부와 이권을 흡수하며 과거의 오스만을 연상시키는 급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양자의 관계가 역전된 결정적 계기는 1699년에 있었던 젠타 전투와, 같은 해 오스만과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가 채결한 카를로비츠 Carlowitz조약이었다.
외젠 공작의 지휘 하에 두 배에 달하는 술탄 직속 오스만 투르크군을 “회전으로” 격파하는데 성공한 신성 로마 제국-헝가리 왕국 연합군은 젠타 전투의 대승을 통해 역사상 최초로 “오스만에 불리한”조약을 끌어내는데 성공했고, 오스만은 트란실바니아와 보스니아 일대, 궁극적으로는 발칸 반도 전역을 포기해야 했다.
위협은 신성 로마제국으로 끝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유럽 열강들에 비해 근대화가 더뎠던 러시아가 기존 국가와의 충돌이 불가피한 서부로 진출하는 대신, 쇠락한 오스만을 공략해 흑해의 부동항을 확보하려 한 것이었다.
물론 오스만은 이제 막 근대화의 걸음마를 시작한 러시아가 넘볼 정도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1710년에 오스만과의 무력 충돌에서 한심하게 밀려난 러시아는 일단 오스만의 통치지역을 포기하고 1723년에 이란의 사파비 왕조를 공격해 카프카스를 점령했으나, 1736년에는 이란의 반격으로 완전히 밀려나 버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결국 러시아는 1768년이 되어서야 겨우 본격적인 남진정책을 재개할 수가 있었다.
예카테리나 2세의 전략적인 투자를 통해 충분한 힘을 비축한 러시아는 1774년 까지 총 6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남진을 시도했다. 이 정책은 1773년 푸카초프의 농민반란으로 인해 일시 중단되었으나, 이미 러시아는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북부까지 진출하는 엄청난 성과를 거둔 상태였다.
러시아에게 완패한 오스만은 1774년 채결된 큐축카이나르자 조약을 통해 흑해 북부의 일부 항구와 보스포러스 해협의 통과권, 그리고 오스만 제국 내에서 “정교회에 대한 러시아의 대표권”등을 러시아에게 넘겨줘야 했다.
특히 콘스탄티노플 몰락 이후 그리스 정교회의 적통한 후계자를 자처하던 러시아는 "정교회의 대표권" 이라는 조항을 바탕으로 오스만 제국 내 정교회 신자의 권익을 대표한다며 적극적인 내정간섭을 시도하여 대규모 이권을 갈취해 갔다.
그러나 이미 초강대국으로서의 저력을 상실한 오스만으로서는 러시아를 저지할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어수선한 내정을 정리한 러시아는 1783년에 흑해 연안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확대해 크림 지방의 합병을 이끌어 냈고, 1812년에는 카프카스, 타타르, 몰도바까지 자신의 세력권 내에 복속시켰으며 ,지속적으로 이란 국경을 위협한 끝에 현재의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지 방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혼란에 빠져 있던 서유럽도 오스만의 세력권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진공이었다.
비록 프랑스군은 별다른 성과 없이 3년 만에 철수했지만, 오스만 휘하의 지방 정권들은 이 짧은 원정을 통해 오스만 제국에겐 서구 열방의 소규모 침략조차 방어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했다.
이미 자체적 조세권을 쥔 지방 정권이나 유력자들이 중앙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되면서 대대적인 제국의 와해가 시작되었다.
특히 이집트의 파샤인 무함마드 알리는 1811년 아라비아의 와하비 부족의 종교적 반란을 진압하고 1821년 그리스 독립운동을 무력 제압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지만, 정작 중앙에서 충분한 포상을 지급하지 않자 이집트에서 독자적 세력을 일으켜 1831년에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를 점령해 버렸다.
무함마드는 동시에 프랑스 원정의 영향이 다분한 서구식 개혁 및 계몽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서구국가들은 이슬람 세력권에 새롭게 등장한 “말이 통하는 상대” 의 독립과 계몽 정책에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호의의 표시로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에 영사관을 설치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알리가 궁극적으로 오스만을 완전히 복속시킬 가능성이 재기되자 알리의 북진이 러시아의 추가적 남하를 야기하거나 기존 오스만 내이권의 분산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되었고, 결국 서구권 국가들은 방침을 바꿔 무함마드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영국 등은 군대를 파견해 오스만과 함께 팔레스타인에서 무함마드를 공격했으며, 결국 무함마드는 이집트에 대한 자신과 가문의 지배권을 대가로 이집트 이외의 점령지를 오스만에 반납했다.

무함마드의 반란으로 오스만 내부가 혼란을 겪는 동안, 서구권 국가들은 꾸준히 오스만 지방정권에 대한 침투를 시도했다.
프랑스는 1830년 알제리를 복속시키며 오스만 제국의 영토 뷔페에 복귀했고, 인도를 장악한 영국은 1839년에 아라비아 반도 남단의 아덴과 그 일대를 먹어치웠다.
프랑스와 영국은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오스만과 손을 잡기도 했다.
1853년 러시아가 오스만의 도나우 지방을 침공하여 크림 전쟁이 발발하자 양국은 오스만의 편을 들며 러시아에 대항했고, 2년간의 전쟁을 통해 러시아의 진출 저지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뒤에는 전리품으로 경제권과 오스만 영토 내 가톨릭 교회에 대한 대표권 등을 챙겨갔다.
한편 크림 전쟁에서 대패한 러시아는 프랑스와 프러시아가 투닥거리던 1870년 이후가 되어서야 겨우 남진정책을 재개할 수가 있었다.
지방 반란과 크림 전쟁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였던 오스만은 1877년 시작된 러시아의 재공격을 방어할 여력이 없었으며, 결국 영국이 개입해 러시아를 견제해 준 뒤에나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물론 중재가 무료일 리는 없었다. 전쟁을 중재한 영국이 성난 러시아를 달래기 위해 카스피해 인근의 오스만령을 러시아의 입에 물려준 것이다.
유럽의 캐스팅 보드를 자처하던 영국은 동유럽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오스만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유지했지만, 그렇다고 오스만을 위한 자선사업을 실시한 것은 아니었다.
1881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바탕으로 튀니지까지 영역을 확대하자 영국은 1882년 이집트 점령으로 이에 대항한 후, 은근슬쩍 항구적 지배정책을 추진했다. 이런 경향은 아덴 및 페르시아만 일대의 지역에서도 이어졌다.


오스만 제국 내에서도 급격한 몰락에 대한 자기성찰이 없지만은 않았다.
이미 카를로비츠 조약 시점부터 중앙정부와 지식인들은 어째서 “정당한 유일종교의 수호자인 오스만 제국”이 이교도에게 패했는가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하지만 토론의 범주는 군사적 분야로 한정되어 있었고, 패배에 대한 대안은 "이교도의 무기와 기술을 받아들이자” 는 선에서 적당히 마무리 되었다.
그들이 간과한 가장 큰 문제는 그간 지나치게 많은 적을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광대한 영토와 긴 국경선은 영광의 상징에서 골칫덩이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모든 국경을 지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군비가 필요했으며, 국경이 확장되고 군사기술이 진보하면서 군비의 부담은 더더욱 늘어났다.
반대로 유럽 국가들이 해외 식민지 개척을 본격화 하면서 곡물과 직물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의 상권은 축소되었으며, 경작 및 유목 능력의 한계로 부양인구는 정체되었고, 지방 군벌과 호족들에게 세금 징수권을 부여함에 따라 아드리아노플의 금고는 바닥을 드러냈다.
18세기 이후에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
유럽제 공산품들이 대규모로 수입되기 시작하자 대규모 무역 적자가 발생했고, 오스만의 자랑이었던 대규모 수공업 장인 집단들은 순식간에 천덕꾸러기 실업자 집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반대로 서방 국가들은 영토보다 많은 것들을 교역을 통해 얻어갈 수 있었다. 오스만에 제공한 대규모 차관들은 카피툴라Capitula 라 불리는 치외법권 등의 혜택으로 돌아왔고, 유럽의 대형 기업들은 이를 바탕으로 제국 내에서 확고한 지반을 다져나갔다.
반대로 오스만 내의 무역능력은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이제 법을 지키며 유럽의 무역집단들과 경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유입되기 시작한 “민족주의” 역시 제정일치의 종교국가인 오스만에겐 독소 같은 존재였다.
(과거의 예외들이 있긴 하지만) 원칙적으로 모든 무슬림은 출신과 민족에 관계없이 “알라 앞에 동등한 인간” 으로서, 이슬람 사회 내에서 공식적으로 규정된 차별은 종교에 대한 차등 대우 뿐이다.
이런 평등-비차별 교리는 초기 움마 이후 이슬람이 국가와 민족에 관계없이 급성장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종교 의식의 통일성을 통해 기본적인 생활 패턴과 언어가 지역을 불문하고 공통화 된 것도 “무슬림” 이라는 큰 고리 내에 여러 민족을 포함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유목 시절부터 수천년에 걸쳐 전해 내려온 씨족 내지 가문의 개념은 여전히 유효했으나, 이슬람 내에서 본격적으로 “국가” 나 “민족” 의 정체성을 자극하는 요소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한 지역 군벌이나 호족들에게 민족주의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그들의 "민족주의적 해석" 에 의하면 오스만은 자신의 지방, 민족을 압제하고 있는 외부인이었으며, 자신은 자신의 민족 (내지 부족, 혹은 가문 등) 을 위해 독자적인 권리를 쟁취할 필요가 있었다.
오스만이 초기 장악의 편의를 위해 적극 활용했던 “지방의 유력자” 들은, 이제 필요하다면 언제든 지방에서의 기반을 바탕으로 중앙에 반발할 수 있는 존재로 변모했다.
동시에 유럽 국가들은 오스만 영토 내에 거주중인 그리스계 정교회나 가톨릭 신자, 혹은 유대인들의 민족적 종교적 권리를 대변한다는 명목으로 내정에 간섭하곤 했다.

그런 모든 악재에도 불구하고 변혁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오스만은 강력한 기독교 국가들과 상대하기 위해 건국 초기부터 외부의 문물과 인력을 적극적으로 흡수했으며, 이런 전통은 (비록 상당부분이 퇴색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 틀을 유지하고 있었다.
18세기부터 많은 유럽인들이 사회 각 분야 - 특히 군사분야의 고문으로 고용되어 오스만 제국에 들어왔으며, 19세기 들어 그 규모는 더욱 확대되었다.
1824년 이후에는 워털루의 패배 이후 실직자가 된 수많은 프랑스인들이 오스만에 초빙되었으며, 1835년부터 영국, 프랑스에 사절을 보내거나 인력을 초빙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났다.
식민지 경쟁에 뒤늦게 참전한 프러시아도 오스만 진출에 나섰다. 이들은 반영/반프 정책에 기반해 오스만에 합리적 지원을 시도하는 방식으로 이슬람 세계에 접근했으며, 이는 이후 오스만 세계 내에서 상당수의 친독 인사들이 발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개혁 시도는 술탄 마흐무드 2세의 시대에 와서 절정에 달했으나, 무함마드 알리 등의 반란으로 인해 종종 지연되거나 중단되거나 좌절되곤 했다.
1839년에는 술탄 압둘 마지드가 장미의 방 칙령을 통해 사회 전체에 대한 개혁을 시도했다.
유럽 합리주의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 전면적 제도개혁은 토지재도부터 행정구조, 군사, 법제, 교육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에 기반한 변혁을 시도한다는 야심만만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개혁은 전면적 반발에 직면했다. 정치적 반동은 궁내의 복잡한 정치게임을 통해 어느 정도 진압(?) 되었지만, 영토 전역의 종교적 반발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오랜 시간동안 유럽을 “미개한 이교도” 로 취급하던 이슬람 사회-특히 종교계는 개혁정책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으며, 이는 외래새력으로 인해 생존권을 위협받던 일반 무슬림 계층에게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1870년대를 전후해 “기독교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범 이슬람주의 개념이 고개를 들기도 했다. 전통적인 종교관에 입각해 "외부에 대항해 무슬림의 힘을 모아야 한다" 는 범 이슬람주의는 지방의 민족주의적 독립성향으로 인해 골치를 썩이던 오스만 중앙정부에게 크게 환영받았으나, 극적인 공감을 이끌어 내는데는 실패했다.

결국 대대적 변화는 오스만이 아닌 유럽인들에 의해, 밑바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유럽인들이 가져온 새로운 경작 방식과 관개 기술은 농업생산량의 확대에 크게 일조했으며, 여객선, 철도, 우편행정 같은 유럽식 인프라들도 주요 지역을 중심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집트에서는 철도가 부설되고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변화가 긍정적인 사례로만 이어진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인구 폭발이었다. 로마시대 800만에 달했던 이집트의 인구는 14세기에 400만, 19세기 초에 350만까지 감소했으나,1846년에는 458만명, 1882년에는 680만명, 1907년에는 1129만명까지 급격히 늘어났다.
인구의 급증으로 식량을 생산하는 토지의 가치가 변화하자 기존의 마을이나 부족 단위 공동소유 토지개념은 지주 중심의 소유개념으로 변모했고, 17세기부터 “티마르” 라 불리던 봉토를 담당하던 유력자들은 이제 지주의 입장에서 급증한 인구들을 소작농으로 고용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역의 실질적 통치자가 된 “아얀 A'yan" 들은 오스만의 지방자치제인 밀레트 제도를 빠르게 잠식해 나갔다.
오스만 제국은 뒤늦게 이들의 집권을 차단하는 관료제를 실시하려 들었지만, 전면적 반발에 직면한 뒤에는 꼬리를 말아 버렸다.

갈수록 커지는 지방의 발언권은 입헌군주제로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술탄 압둘 하미드 2세가 1876년에 근대적 오스만 헌법 제정과 의회 구성을 허용한 것이다.
하지만 태생부터 "필요" 보다는 "압력" 에 의해 시작된 변화가 제대로 이어질 리 없었다. 의회는 술탄과 충돌을 일으키자 마자 쉽사리 해산되어 버렸고, 이후 30년동안 개최되지 않았다.
결국 1908년, 청년 투르크당을 자칭하는 오스만 장교 그룹은 쿠데타를 일으켜 술탄의 퇴진과 1876년 헌법과 의회의 복원 및 대대적 개혁정책을 요구했다.
1889년 비밀결사로 출발한 청년 투르크당은 대부분 서구권 유학경험이 있거나 유럽 출신 교관에게 교육받았으며 러시아에게 무너지고 영국과 프랑스에 유린당하는 오스만의 모습과 나약한 술탄, 무력한 행정부의 모습을 생방송으로 지켜본 이들로 구성되었다.
청년 투르크는 최대한 빠른 근대화만이 오스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외부의 침략을 막을 유일한 수단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민족주의에 입각한 이들의 "투르크 중심 정책" 은 세계제국, 통일 이슬람 정권으로서의 오스만에게 사실상 사형 선고를 내리고 말았다.
이미 급진적 개혁 정책에 강력한 반감을 품고 있던 대부분의 아랍인과 여타 이민족들은 청년 투르크당의 집권을 계기로 오스만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린 채 자신들의 생존권과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서구권 국가들과 독자적으로 접촉한 것이다.


덧글

  • 카구츠치 2009/05/01 22:26 #

    수에즈운하 개통 아이디어가 실제 개통 몇 세기 전에 제안된 적이 있기도 하다는 것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실현되었다면 오스만제국의 유지에 도움이 되었을지 붕괴에 일조했을지 궁금해지네요.
  • 소금인형 2009/05/01 22:53 #

    오스만제국이 구상한 수에즈운하는 매번 사파비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인한 전비조달로 중단됩니다.
  • Luthien 2009/05/03 02:11 #

    실제로 완공하기는 어려웠겠지만, 성공했다면 유럽의 신대륙 진출에 꽤나 브레이크를 걸었을 겁니다.
    애초에 본격적인 대서양 진출은 오스만의 관세정책때문에 시작된 거라...;
  • 곤충 2009/05/01 23:08 # 삭제

    유럽식 인프라가 들어설 때마다 일어났던 '이단논쟁(?)'과 거부감을 보면 어느나라나 변화의 물결을 느끼고도 바꾸기는 힘든가 봅니다. 그러니까 일본이 정말 엄청난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 Luthien 2009/05/03 02:11 #

    일본은 경우가 심하게 다르고, 후폭풍도 굉장히 강했습니다.
  • 네비아찌 2009/05/02 01:34 #

    오스만제국이 대항해 시대에 함께 뛰어들어서 아메리카에 손을 뻗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즈텍이나 잉카 같은 토착 왕국은 무너졌겠지만, 북, 남미 할것 없이 원주민들이 보기에는 당시의 기독교보다는 이슬람이 받아들이고 따르기 더 좋아 보였을 텐데요.
  • 계원필경&VDML 2009/05/02 07:40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에서는 실제로 오스만제국이 아메리카에 상륙한다는(...)
  • Luthien 2009/05/03 02:12 #

    원양항해기술이 얼마나 나왔을지 모르겠습니다...
  • 계원필경&VDML 2009/05/02 07:45 #

    이제 갈리폴리가 다가오는 군요(응???) -> 그나저나 오스만제국이 빠르게 와해 되는 모습을 보니 머나먼 동쪽에 있는 국가인 청나라가 떠오른다는...
  • Luthien 2009/05/03 02:12 #

    대충 갈겁니다 대충, 핵심은 이제부터 시작될 팔레스타인이라.
  • 소시민 2009/05/02 08:56 #

    오스만은 1571년의 레판토 해전에서 기독교 연합에 대패하며 지중해 일대의 해군 전력 태반을 상실했지만, 정작 패배 소식을 접한 술탄이 "우리의 함대는 재기할수 있는가" 라고 묻자 재상은”일 년 내로 동일한 규모의 함대를 비단 돛으로 치장해 복원할 수 있다" 고 여유있게 답할 지경이었다.

    - 주경철 교수의 <대항해시대>에서도 언급된 내용이군요. 일반적으로 흔히 인식되는 서구 중심적 사고에 대한 지적 중 하나로서

    언급됩니다.
  • Luthien 2009/05/03 02:13 #

    아, 그 책에도 나왔군요. 저는 버나드 루이스의 글에서 따온 건데. 출처가 같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paro1923 2009/05/02 11:00 # 삭제

    역시, 제국의 쇠퇴란 ''패배'가 아니라 '정체'에서부터 시작하는군요.
    스페인도 무적함대 패배 직후에도 영국이 당장 해양 패권국이 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점차 국가 자체까지 쇠퇴한 것처럼...
  • Luthien 2009/05/03 02:13 #

    로마도 망한 로직이 저거였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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