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의 분전설과 관련된 질문 ...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교차대조되지 않은 음모론급 가정들 뿐이니 좀 미심쩍은 부분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 주세요.
1. 신립의 지형숙지 가능성
연려실기술 15권 선조조 고사본말에서는 조야기문과 징비록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조정에서 또 신립(申砬)ㆍ이일(李鎰)을 삼남(三南) 및 경기(京畿)ㆍ황해(黃海)에 보내어 변방의 방비를 순시하게 하였더니 모두 달포가 넘어 돌아왔는데 점검(點檢)한 것이 활과 화살과 창과 칼뿐이었고, 각 고을들이 대개 겉치레로써 법을 피하고 다른 신통한 계책이 없었다.
신립이 본디 잔인하고 포악하다고 소문이 있고 간 곳마다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니 수령들이 겁을 내어 백성을 징발하여 길을 닦고 공장(供帳)이 극히 사치스러워 비록 대신의 행차라도 이보다 못하였다. 이미 복명하고 나와서 대신을 보고 일을 의논하고, 4월 초하룻날에 또 유성룡(柳成龍)의 집에 이르렀다. 유성룡이 말하기를,
일단 이 내용만 보면 신립과 이일이 3월 께에 방어지역과 병장기를 돌아보았는데, 지방에서 눈속임을 해서 별 성과는 없었다. 그리고 신립의 성격이 워낙 더러워서 지방관리들이 아부를 했다 정도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주목해야 할 것은 첫 부분입니다.
경기 및 황해는 한양 어귀의 출발-혹은 귀로 선상에 있다 치고, 삼남을 한달에 걸쳐 돌았습니다. 충청도를 순시하고 경상도를 오가는데, 과연 충주와 문경을 빠트렸을까요?
소양이 없어서 간과했다는 말은 못할겁니다. 당장 지리를 아는 것은 당대의 소양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신립 이하로 취급받던 (궁중과의 연관도 있겠습니다만) 이일은 무려 제승방략의 저자고, 김성일도 문관 주제에 함경도 보내놨더니 지형 분석에 첨삭까지 달아가며 놀았습니다.
심증이긴 합니다만, 저런 시대배경에서 신립만 지리에 어두워 문경새재의 가치를 저평가했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아닌가 합니다.
2. 신립의 조총 정보 숙지 가능성.
이번엔 재조번방지 1권에서 발췌한 삼남순시 이후 신립과 유성룡의 대담입니다.
(상략)...이미 복명하고 나와서 대신을 보고 일을 의논하고, 4월 초하룻날에 또 유성룡(柳成龍)의 집에 이르렀다. 유성룡이 말하기를,
“조만간 변란이 있게 되면, 공이 마땅히 맡게 될 것이요, 공의 생각에는 오늘날의 적세(敵勢)가 어떠하오?”
하니, 신립이 심히 일본을 가볍게 보아 걱정할 것이 못된다고 하였다. 유성룡이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오. 전일에는 왜(倭)가 단병(短兵)만을 믿었는데 지금은 겸하여 조총(鳥銃)의 장기(長技)가 있으니 경시해서는 안되오.”
하니, 신립이 얼른 말하기를,
“비록 조총이 있다고 하나 어찌 다 맞추리오.”
하였다. 유성룡이 말하기를,
“국가가 평화를 누린 지 이미 오래 되었으며, 사졸이 겁내고 약하니 만약 급한 일이 있다면 사세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오. 나의 생각으로는 수년 뒤에 사람들이 싸움에 익숙하여지면 혹 수습할 수 있겠으나 처음에는 알 수 없으니 나는 매우 걱정되오.”
하였으나, 신립은 귀담아 듣지 아니하고 하직하고 나아갔다...(하략)
역시 신립의 대표적인 "방심사례" 로 꼽히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당시 조총이 잘 맞는 무기던가요?"
물론 이런 해석은 비약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서두부터 음모론이라고 못 박았고요)
이 대목은 "조총의 위력을 알았다" 고 볼수도 있고, "그깟 왜놈 총통" 하고 깔봤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성룡의 발언부터가 이미 신립이 조총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실제로 신립의 대답은 왜군의 조총보유는 인정하나 그 위력은 의문시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즉 상기 기록으로 볼때, 신립은 최소한 "조총의 존재는 알았고" 너그럽게 해석하자면 "조총의 특성까지 인지" 하고 있었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3. 신립의 작전 계획에 대한 의문
제가 앞서 올렸던 임진왜란사 관련 질문 포스팅을 트랙백한 가장 큰 이유입니다. 앞선 2항의 조총 항목과 연계되기도 하고요.
임진왜란사에 따르면 신립은 탄금대 전투에서 고니시군 선봉이 정면에 출현하자 "기병 1진 1000명" 으로 제압하고, "기병 2진 2000명" 으로 적을 단월역까지 격퇴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일단 병종, 혹은 병기간 상성부터 검토하겠습니다.
조총은 전장식 활강총입니다. 밀집운용을 하지 않는 한 원거리에서 유효한 위력을 발휘하기 어렵고, 재장전에도 긴 시간이 걸립니다.
실제로 조총이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는-즉 집중 운용되는 구간은 100m 이하...실질적으로 50m 내외입니다.
가속이 붙은 기병이라면 수 초 내에 돌파할 수 있는 거리. 반면 조총의 재장전 속도는 아무리 짧게 잡아도 10~20초 선입니다.
교대사격을 생각한다 하더라도 병력밀집의 특성 상 그 화력이 2배 이상 증가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집중운용된 기병은 결정적인 숫적 열세만 없다면 조총 일제사격을 한두차례 견디며 백병전역에 돌입할 능력이 있습니다.
게다가 조선군은 궁을 보유한 기병대를 운용했습니다.
밀집된 조총대 같은 표적이라면 조총 일제사보다 먼 거리에서도 사전 공격이 가능한 병종인 겁니다.
근접전에서 조총병 따위는 기병 밥이니 제외, 장창 집중운용은 좀 위협적입니다만 조선 창기병 주무장은 15척짜리 기창입니다.
즉, 절대적 병력의 열세만 아니라면 병종의 상성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은 셈입니다.
여기서 임진왜란사의 신립 묘사를 사실로 전재한다면?
본문 전제합니다.
(상략)..."이들의 선봉이 신립 군의 중앙으로 접근하자 신립은 기병 제 1진 1천여 명을 출격하여 적을 제압한 다음, 뒤이어 제2진 1천여 명을 출격시켜 일본군을 단월역 쪽으로 격퇴시켰다. 일본군은 병력을 증강시켜 재차 신립군의 전방으로 달려들었다.신립은 제 3진 2천여 명을 투입하여 또다시 일본군을 격퇴시켰다...(하략)
1파를 최단시간내에 적전에 돌입시키면서 사실상 선봉에 집중되었을 조총부대를 영거리에서 묶어버리고, 1파와 동수의 쌩쌩한 2파가 "백병전 상태인" 왜군을 돌파. 혹은 초월전진하며 밀어냈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모범적인 기병의 대 조총병 공략법인 셈입니다.
궁병이나 노병을 상대로도 선례가 있는 전법이긴 합니다만, 1파가 단병접전에서 밀리기 전에 적절하게 2파를 투입해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탁월한 전황 판단능력을 요구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작전에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피해를 최소화하며 돌입하도록 "대규모 기마부대가 전속전진할수 있는 개활지" 입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미 기병 병력 반수 (2000명) 을 따로 떼어 예비대로 운용했다는 겁니다.
1파는 선봉과 충돌 시점에서 정지. 2파가 초월전진 중 후퇴한 적 선봉과 합류한 본진에 밀려날 경우, 즉시 본진을 상대할만한 규모의 예비대인 3파 (아마 신립 본진으로 추정) 을 내보내 이동중인 본진을 상대한다. 이것 역시 보통 재간은 아니지 싶습니다.
물론 이런 가정은 전부 임진왜란사의 기술이 올바르고, 그에 따라 연려실기술과 재조번방지의 내용을 매우 호의적으로 해석했을때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if 치고는 오버를 해도 너무 오버한 거지요. (원균명장론보다는 양호하겠습니다만...)
해서, 최소한 임진왜란사의 해당 기술이 어떤 사료에서 출발했는가-만이라도 입증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혹시 아시는 분 없으신가요오. T-T
ps: 저 신씨가 아니라 정씨입니다. ( -ㅁ-)
교차대조되지 않은 음모론급 가정들 뿐이니 좀 미심쩍은 부분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 주세요.
1. 신립의 지형숙지 가능성
연려실기술 15권 선조조 고사본말에서는 조야기문과 징비록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조정에서 또 신립(申砬)ㆍ이일(李鎰)을 삼남(三南) 및 경기(京畿)ㆍ황해(黃海)에 보내어 변방의 방비를 순시하게 하였더니 모두 달포가 넘어 돌아왔는데 점검(點檢)한 것이 활과 화살과 창과 칼뿐이었고, 각 고을들이 대개 겉치레로써 법을 피하고 다른 신통한 계책이 없었다.
신립이 본디 잔인하고 포악하다고 소문이 있고 간 곳마다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니 수령들이 겁을 내어 백성을 징발하여 길을 닦고 공장(供帳)이 극히 사치스러워 비록 대신의 행차라도 이보다 못하였다. 이미 복명하고 나와서 대신을 보고 일을 의논하고, 4월 초하룻날에 또 유성룡(柳成龍)의 집에 이르렀다. 유성룡이 말하기를,
일단 이 내용만 보면 신립과 이일이 3월 께에 방어지역과 병장기를 돌아보았는데, 지방에서 눈속임을 해서 별 성과는 없었다. 그리고 신립의 성격이 워낙 더러워서 지방관리들이 아부를 했다 정도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주목해야 할 것은 첫 부분입니다.
경기 및 황해는 한양 어귀의 출발-혹은 귀로 선상에 있다 치고, 삼남을 한달에 걸쳐 돌았습니다. 충청도를 순시하고 경상도를 오가는데, 과연 충주와 문경을 빠트렸을까요?
소양이 없어서 간과했다는 말은 못할겁니다. 당장 지리를 아는 것은 당대의 소양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신립 이하로 취급받던 (궁중과의 연관도 있겠습니다만) 이일은 무려 제승방략의 저자고, 김성일도 문관 주제에 함경도 보내놨더니 지형 분석에 첨삭까지 달아가며 놀았습니다.
심증이긴 합니다만, 저런 시대배경에서 신립만 지리에 어두워 문경새재의 가치를 저평가했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아닌가 합니다.
2. 신립의 조총 정보 숙지 가능성.
이번엔 재조번방지 1권에서 발췌한 삼남순시 이후 신립과 유성룡의 대담입니다.
(상략)...이미 복명하고 나와서 대신을 보고 일을 의논하고, 4월 초하룻날에 또 유성룡(柳成龍)의 집에 이르렀다. 유성룡이 말하기를,
“조만간 변란이 있게 되면, 공이 마땅히 맡게 될 것이요, 공의 생각에는 오늘날의 적세(敵勢)가 어떠하오?”
하니, 신립이 심히 일본을 가볍게 보아 걱정할 것이 못된다고 하였다. 유성룡이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오. 전일에는 왜(倭)가 단병(短兵)만을 믿었는데 지금은 겸하여 조총(鳥銃)의 장기(長技)가 있으니 경시해서는 안되오.”
하니, 신립이 얼른 말하기를,
“비록 조총이 있다고 하나 어찌 다 맞추리오.”
하였다. 유성룡이 말하기를,
“국가가 평화를 누린 지 이미 오래 되었으며, 사졸이 겁내고 약하니 만약 급한 일이 있다면 사세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오. 나의 생각으로는 수년 뒤에 사람들이 싸움에 익숙하여지면 혹 수습할 수 있겠으나 처음에는 알 수 없으니 나는 매우 걱정되오.”
하였으나, 신립은 귀담아 듣지 아니하고 하직하고 나아갔다...(하략)
역시 신립의 대표적인 "방심사례" 로 꼽히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당시 조총이 잘 맞는 무기던가요?"
물론 이런 해석은 비약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서두부터 음모론이라고 못 박았고요)
이 대목은 "조총의 위력을 알았다" 고 볼수도 있고, "그깟 왜놈 총통" 하고 깔봤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성룡의 발언부터가 이미 신립이 조총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실제로 신립의 대답은 왜군의 조총보유는 인정하나 그 위력은 의문시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즉 상기 기록으로 볼때, 신립은 최소한 "조총의 존재는 알았고" 너그럽게 해석하자면 "조총의 특성까지 인지" 하고 있었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3. 신립의 작전 계획에 대한 의문
제가 앞서 올렸던 임진왜란사 관련 질문 포스팅을 트랙백한 가장 큰 이유입니다. 앞선 2항의 조총 항목과 연계되기도 하고요.
임진왜란사에 따르면 신립은 탄금대 전투에서 고니시군 선봉이 정면에 출현하자 "기병 1진 1000명" 으로 제압하고, "기병 2진 2000명" 으로 적을 단월역까지 격퇴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일단 병종, 혹은 병기간 상성부터 검토하겠습니다.
조총은 전장식 활강총입니다. 밀집운용을 하지 않는 한 원거리에서 유효한 위력을 발휘하기 어렵고, 재장전에도 긴 시간이 걸립니다.
실제로 조총이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는-즉 집중 운용되는 구간은 100m 이하...실질적으로 50m 내외입니다.
가속이 붙은 기병이라면 수 초 내에 돌파할 수 있는 거리. 반면 조총의 재장전 속도는 아무리 짧게 잡아도 10~20초 선입니다.
교대사격을 생각한다 하더라도 병력밀집의 특성 상 그 화력이 2배 이상 증가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집중운용된 기병은 결정적인 숫적 열세만 없다면 조총 일제사격을 한두차례 견디며 백병전역에 돌입할 능력이 있습니다.
게다가 조선군은 궁을 보유한 기병대를 운용했습니다.
밀집된 조총대 같은 표적이라면 조총 일제사보다 먼 거리에서도 사전 공격이 가능한 병종인 겁니다.
근접전에서 조총병 따위는 기병 밥이니 제외, 장창 집중운용은 좀 위협적입니다만 조선 창기병 주무장은 15척짜리 기창입니다.
즉, 절대적 병력의 열세만 아니라면 병종의 상성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은 셈입니다.
여기서 임진왜란사의 신립 묘사를 사실로 전재한다면?
본문 전제합니다.
(상략)..."이들의 선봉이 신립 군의 중앙으로 접근하자 신립은 기병 제 1진 1천여 명을 출격하여 적을 제압한 다음, 뒤이어 제2진 1천여 명을 출격시켜 일본군을 단월역 쪽으로 격퇴시켰다. 일본군은 병력을 증강시켜 재차 신립군의 전방으로 달려들었다.신립은 제 3진 2천여 명을 투입하여 또다시 일본군을 격퇴시켰다...(하략)
1파를 최단시간내에 적전에 돌입시키면서 사실상 선봉에 집중되었을 조총부대를 영거리에서 묶어버리고, 1파와 동수의 쌩쌩한 2파가 "백병전 상태인" 왜군을 돌파. 혹은 초월전진하며 밀어냈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모범적인 기병의 대 조총병 공략법인 셈입니다.
궁병이나 노병을 상대로도 선례가 있는 전법이긴 합니다만, 1파가 단병접전에서 밀리기 전에 적절하게 2파를 투입해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탁월한 전황 판단능력을 요구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작전에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피해를 최소화하며 돌입하도록 "대규모 기마부대가 전속전진할수 있는 개활지" 입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미 기병 병력 반수 (2000명) 을 따로 떼어 예비대로 운용했다는 겁니다.
1파는 선봉과 충돌 시점에서 정지. 2파가 초월전진 중 후퇴한 적 선봉과 합류한 본진에 밀려날 경우, 즉시 본진을 상대할만한 규모의 예비대인 3파 (아마 신립 본진으로 추정) 을 내보내 이동중인 본진을 상대한다. 이것 역시 보통 재간은 아니지 싶습니다.
물론 이런 가정은 전부 임진왜란사의 기술이 올바르고, 그에 따라 연려실기술과 재조번방지의 내용을 매우 호의적으로 해석했을때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if 치고는 오버를 해도 너무 오버한 거지요. (원균명장론보다는 양호하겠습니다만...)
해서, 최소한 임진왜란사의 해당 기술이 어떤 사료에서 출발했는가-만이라도 입증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혹시 아시는 분 없으신가요오. T-T
ps: 저 신씨가 아니라 정씨입니다. ( -ㅁ-)
덧글
사소한 딴지지만, 조선조에 기병들이 창을 사용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임란 직후만 해도 실록을 보면 기병의 무장은 활, 칼밖에 규정이 안되있었고,
조선 후기에는 기창이 5미터가 넘었지만 쓰는 기병도 거의 없었다고 하니까요. 장창병의 경우 조총병보다 상대하기 어렵겠지만, 일본 전국시대 장창병들은 동시대 에스빠냐와는
전혀 반대로 매우 느슨하고 얕은 진형을 취했기에 아주 어렵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쓰고나니 별 도움이 안되는 것 같군요. 괜히 심란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일단 저도 저기서 창이라고 넘어가긴 했는데, 수단은 다른 것일수도 있지요. 애초에 신립이 100기 미만의 기병으로 여진족 병력 대상 무쌍난무 시전할때 쓴 병장기가 저때 없진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제가 알기에도 신시겔님 말씀처럼 임진왜란 당시의 기병은 기창을 포기한 것으로 압니다.
게다가 신립 기병의 상당 부분이 북변의 정예기병이 아니라 삼남 지방 현지 기병이었으니 병력의 질도 낮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병력의 질이 낮았던것 역시 전투 진행 자체가 단순할 수 밖에 없었던 또다른 이유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언급했듯이) 원균옹호론 꼴 날까봐 조신스럽긴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걸 당시 가토-조정간 솰롸솰롸와 연계해 보고 있는데, 이건 다른 포스팅으로.
라!
군?
신립이 임란당시 1) 기본적으로 자원해서 참전했을 뿐만 아니라 2) 군인으로서 사생관이 뚜렷한 인물이고 3) 함경도쪽 전장에서 워낙 탁월한 명성을 날렸던 인물이라...단순히 무능한 장수로 폄하할수는 없는 케릭터죠.
다만 용맹함에 비해 신중함은 부족했었던 것 같고, 처음 접해보는 국가 단위 정규군끼리의 대규모 회전에 대해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는 생각은 듭니다. 신립이나 이일이 오랜 세월 호흡을 같이했던 함경도쪽 기병과 함께 Hit and Run식의 교통로 교란전으로 일본군과 대항했다면 결과는 어찌됐을까하는 아쉬뭄이 많이 남는 것 같습니다.
교전을 포기하고 도망가는 장수들이 줄지어 나오는 상태임을 감안하면 신립 정도의 사생관을 가진 장수라면 확실히 아쉽죠.
신립은 시조 같은 것도 그렇고, 이래 저래 이미 내려갈때부터 결사 모드인것 같더군요.
말 자체가 작은데다가 병사의 체격 문제도 있어서 방어도 부실했고...
보통 이동용으로 많이 쓰였다고 들었군요.
서양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일본 애들이, 전국시대 기병들을 멋지게 묘사하고(왜곡하고..)
이걸 토대로 한국쪽 군사학자(?)들이 동양쪽 역사를 거의 판타지로 만들었다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
조총에 대한 판단 착오는 전란 후까지 이어지니...--;
화살보다 근거리 전투에 능했습니다.
사거리, 연사속도, 파괴력 이런 것만이 무기의 전부는 아니지요.
2. 총의 조준 및 격발시간이 활보다 빠릅니다. 총을 쏴 봤기 때문에 알 수 있지만, 총이 활보다 더 빠른 조준 사격이 가능하죠. 대신 활은 한발 한발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3. 마지막으로 조총이 아무리 개 허접이라 하더라도 당시 조총 운용법이 궁병이나 보병을 당황하게 만들수 있지요. 집단으로 몰려서 탕탕 쏘는 방식입니다. 1명, 1명이 쏘면 별거 아니지만 이 시기 총이란 집단으로 일제사격이 기본전제였습니다.
대신 궁수들도 집단 대형으로 가지만 쏘고나서 돌진하지는 않죠. 조총부대는 쏘고 나서 돌진하고 뒤 부대가 쏘고 먼저간 부대는 장전하고... 이 방식입니다. 안 그러면 따라잡지 못하죠.
2. 총은 기본적으로 대규모 운영을 전제로 합니다. 즉 총이 굴러다니는 동네라면 대규모 보병대는 기본이라는 거죠.. 총은 옵션이니.. 궁기병이 아무리 우수해도 20~30명으로 100명 넘는 보병을 상대로 이기긴 힘듭니다. 더욱이 방어전이라면 유격전으로는 해답이 안나오는 상황이 존재하지요.. 조선인들이 유목민족도 아니니..
3. 총쏘는 걸 훈련시키는게 활쏘는 걸 훈련시키는 것보다는 시간이 더 적게 들었습니다. 윗분 말씀대로 일단 조준 자체가 쉬운 편이고 어차피 명중을 노리고 쏘는 것도 아니라.. 화망을 구성하는 훈련을 하는데 활보단 총이 훨씬 유리했던 거죠..
CH'UNGJU (1592; Korea): A Korean army of 16,000, under Shin-Nip, tries to stop the steady Japanese advance, this column under Kinoshi (15,000). While the Koreans have no guns, they do have a great position. Japanese firepower against the impressive Korean cavalry.
이건 미쿡에서 나름 고증살려 만든 게임에 나오는 시나리오 개관입니다. 단일 전투로 서양인의 관심을 끈 유일한 육상전, 이랄까요? ㅎㅎ
그리고 또하나.. 설령 조총진이라고 해도 얘네들이 아예 백병전 능력이 없는 건 아니어서 일단 차징한 이후 충격력을 잃은 기병이 신속하게 이탈하지 않으면 뒤따라온 보병대에게 포위당해 밥이 됩니다. 그런데 조선 기병들은 중장갑을 갖춘 것도 아니라서 차징을 할 때마다 꾸준하게 병력을 깍아먹는 장면이 반복될 듯 합니다. -_-;; 뭣보다.. 함경도 지방에서 주로 여진족 상대했을 텐데 1만 이상의 대규모 보병진을 상대로 반복적으로 충격을 가하는 고도의 전투행위가 가능했는지는 의문이네요..
ps. 몽골 기병같은 유목민족들은 차징을 최대한 피하고 주변에서 활을 쏘는데.. 이게 한 두번이 아니라 수십일에 걸쳐서 끈질기게 괴롭혀 댑니다. 대개는 측면이나 후방을 노리기 위해서 도망치는 연기를 하고는 하지요..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