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사 8. 유대인의 초기 이주, 최초의 분쟁. 연재뭉치

중동전쟁사 7. 영국-프랑스의 전후 중동정책 에서 이어집니다.

*워낙 관련 포스팅이 오래되서, 과거 내용도 섞었습니다. 완성본에선 합쳐질 겁니다 (아마)
*요즘 바빠서요. 이것도 사실 거의 다 써둔건데 T-T

19세기의 초기 시온주의는 내부에서 많은 갈등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영토에 집착하는 "종교적 운동" 으로서 존재하진 않았다.
상당수의 서유럽계 시온주의자들에게 있어 종교적 보수성이나 고리타분한 랍비들의 교의 해석은 수용이나 중시의 대상이 아닌 공존 혹은 대립의 대상이었다.
문제는 그들도 결국 "유대인" 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팔레스타인으로의 복귀를 고집한 것” 이다. 그들이 "팔레스타인" 을 버리지 못한 것은 실리적인 사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 대중이 팔레스타인 이외의 대안에는 호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런 불안감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가 우간다 이주의 무산이다.
1903년 4월 헤르츨은 영국의 외무대신 쳄벌레인과의 유대인 독립 관련 회담에서 영국이 제안한 키프러스 령 대신 시나이 반도 북부, 지중해 연안도시인 엘 아리쉬El Arish를 제공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엘 아리쉬 안은 자국의 영토할양을 반발한 이집트 측의 저항으로 무산되었고, 결국 영국은 키프러스와 엘 아리쉬 대신 시오니스트 노르드 아우(Nord-au) 가 주장했던 영국령 우간다 이주안을 제 3의 대안으로 제시했다.
헤르츨은 우간다 이주안을 제 6회 시오니스트 회의에 상정했으며, 표결 결과 "찬성 295표. 반대 178표. 기권 98표" 로 과반수의 동의를 얻었으다.
그러나 시오니스트 회의의 구성자들은 우간다라는 대안이 동유럽권의 유대인 동포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상황을 우려했고, 제안자인 노르드 아우가 극렬 시오니스트 청년에게 피습당하는 사건까지 벌어지자 결국 “표결이 통과된” 우간다 이주안을 다수 동의로 유보한 뒤, 1905년에 재개된 7차 시온주의 회의에서 완전히 부결시켜 버렸다.
팔레스타인 이외의 대안을 부정하는 막연한 반발은 1904년 헤르츨이 건강 악화로 사망하고 다비드 볼프손 David Wolffsohn 이나 차임 바이츠만 Chaim Weizmann, 나훔 소콜로프, 레오 모츠킨 등이 시오니스트 회의를 주도하면서 점차 강화되었다.
이들은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실패 이후 러시아 내 아슈케나짐 유대인들 다수가 국외 이탈을 시도하는 광경을 목격했고, 대규모 유대인 이주민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만한 정체성의 확립-즉 전통적인 의미의 귀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때부터 시오니스트 회의의 방향성은 외교적 타협을 통해 "유대인의 국가를 강대국들에게 공인 받으려던" 헤르츨의 방식에서 벗어나, "직접 토지를 구매하고 이주를 추진해" 팔레스타인 내에서의 직접적인 권리를 확보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생계를 이유로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을 거부했다.
1904년 이후 10년에 걸쳐 최소 85만의 유대인들이 대서양을 건너간 반면, 같은 시기 팔레스타인을 택한 것은 "고작 8만명 미만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대부분 5년 내에 미국 등으로 재이민을 시도했다. 심지어 로트쉴드가 지원한 아르헨티나의 유대인 정착지조차도 같은 시기의 팔레스타인보다 두 배나 많은 인원들을 끌어들였다.
이는 낙후된 영농 외의 생계수단이 존재하지 않는 당시 팔레스타인의 환경을 고려한-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의 결과였다.
외부에서의 지원도 보장되지 않은 상태였다. 병원 한 채 지어주고 유대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주장하던 로트쉴드 가 (외 부유한 유대인들), 아직 자신들의 이론을 구체화할 힘이 없었던 시오니스트 회의와 유대기구, 팔레스타인에서 구걸로 연명하던 원주 유대인까지. 이들 가운데 누구도 동유럽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정책적으로 지원할 능력이나 의사가 없었다.
이주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귀향” 이라는 종교나 민족 차원의 추상적인 안도감 뿐인 상황에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특이한 것은 대부분 서유럽에서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받아들였던 세파르딤이 아닌, 동유럽에서 집단거주체계를 유지하며 낡은 랍비 중심의 종교적 공동체를 이루며 유대인으로서의 개성을 잘 보존하고 있던 아슈케나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유대 특유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고유한 교육이나 종교, 여타 민족정신 등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매우 당연한 결과였다.
정작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켜 준 것은 외압-즉 박해와 격리였으며, 따라서 주류사회가 그들을 수용하려 할 경우 유대인의 민족색은 쉽게 퇴색되었다.
유대인의 권리를 타 국가들에 비해 앞서 보장하기 시작한 근대 서유럽의 세파르딤들이나 이슬람에 거주중이던 유대인들은 약간의 사회적 마찰을 제외하곤 별 반향 없이 해당 국가 및 지역의 사회에 동화되었던 것이 그 예이다.
북미 이주를 택한 아슈케나짐 계 유대인들은 미국 사회에 동화되는 대신 미국 동해안 일대에 정착해 유대 소사회를 구성했지만, 이는 동유럽에서 랍비 중심의 공동체생활을 유지하던 유대인들이 단체 이주 후에도 종전의 생활 형식을 답습한데 지나지 않는다.
(이런 유대인 공동체는 구성원의 상당수가 사회적 안정을 확보한 후에 이익집단의 형태로 변질되었다)
즉 우간다 이주안을 침몰시키고 헤르츨 이래 다수의 시온주의자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던 유대인의 정체성, 의무감,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렬한 애착 등은, 채 5년이 지나기도 전에 유대인 민중의 현실적 선택에 의해 스스로 그 허구성을 증명한 셈이다.

물론 이 기간동안 시온주의가 실패만을 거듭한 것은 아니다.
1905년 이후 시작된 2차 알리야로 이스라엘에 건너온 극소수의 인물들 가운데는 다비드 벤구리온 David ben-gurion, 레비 에쉬콜 Levi Eschkol, 이삭 벤즈비 Jitzchak Ben-zvi 등 후일 이스라엘 독립과정에서 중핵을 담당했던 정치 엘리트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들은 후일 이스라엘의 노동당인 마파이의 중핵이 된 젊은 근로자당을 설립했다)
동유럽의 급격한 사회변혁속에서 성장한 이들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그 결과 강렬한 시오니즘에 기반한 목적의식과 개척정신을 갖춘 채 팔레스타인으로 건너왔다.
그들의 공동체는 원주 유대인들의 공동체처럼 이슈브라 불렸지만, 정작 그 내용은 전통적인 유대 공동체가 아닌 유대인으로 구성된 사회주의자의 공동체에 가까웠다. 실제로 이들은 1909년에 철저한 재산공유 개념에 기반한 공동체 사회인 키부츠Kibbutz를 만들어 팔레스타인 내에서 자신들의 이상을 시험하기도 했다. 최초의 유대인 도시 역시 1909년 야파 북단의 해안에 세워졌는데, 이 도시는 헤르츨의 계몽소설에서 이름을 따 “텔 아비브”라 명명되었다. 여전히 이주민은 극소수였지만 팔레스타인 내 유대 사회는 조금씩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활발한 개척 시도는 원주 유대인, 혹은 아랍인과의 마찰로 이어졌다.
가장 큰 문제점은 2차 알리야로 건너온 유대인들이 팔레스틴들은 물론 과거부터 거주중이던 극소수, 혹은 1차 알리야를 계기로 팔레스타인에 이주했던 같은 유대인에게도 자신들의 잣대를 들이댔다는 점이다.
2차 알리야 이전에도 2만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내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정상적인 생활 기반조차 유지하지 못한 채 유럽의 유대인들이 마련한 샬루카 Chalukka 라 불리는 구호기금과 적선으로 연명했으며, 그런 외부의 지원을 “당연한 것” 으로 여기고 있었다.
2차 알리야를 통해 이주한 다수의 급진파는 이런 생활방식을 해악으로 규정하고, 지원을 시도하는 대신 반 강제적인 수단까지 동원하며 기존 유대인들에게 근로 및 노동 개념에 입각한 자신들의 방식을 강요하려 들었다.
이런 경향은 후에 “원주 유대인의 아이를 빼앗아 공동체에서 양육하는” 어이없는 사태로 발전하기도 했다.

유대인 사회 밖에서 일어난 마찰도 작지 않았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통치영역 내 거의 모든 지역이 그랬지만) 오스만 후기의 폐단으로 인해 토지소유권에서는 곳곳에 공백이 발생했으며, 부재지주들과 소작농제가 거의 정착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토지를 구하기 위해서는 지주와 직접 접촉이 불가피했다.
문제는 일반적인 이권 할양을 의미하던 지주간의 거래와 달리, 유대인은 거주 및 경작을, 즉 정착을 목적으로 토지를 구입했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정당한 토지거래로 보았고 실정법상으로도 문제가 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유대인이 구입한 땅에서 농사를 짓던 팔레스틴들은 전통적 생계수단인 농지를 타의로 "강탈" 당했다고 간주했으며, 이런 사태는 유대인-아랍인간 마찰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즉 쌍방간의 분쟁은 생계가 위협받게 된 쪽이 먼저 움직인다는-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에서 시작되었다. 이를 특정 민족, 혹은 종교의 폭력적 성향으로 간주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곡해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1차대전을 거치며 벨푸어 선언과 사이크스 피코 협정, 맥마흔 후세인 서한 관련 사건이 차례로 이어졌고, 끝내 1918년 이후 영국이 독립을 전제로 한 신탁통치에 돌입하자 문제는 더욱 확대되었다.
팔레스틴들은 유대인을 “자신들의 땅으로 이주해 온 불친절하고 낯선 이웃” 이 아닌 “영국에 빌붙어 땅을 빼앗기 위해 몰려오는 침략자” 로 바라보게 되었고 , 분쟁의 수단은 단순한 드잡이질에서 집단적인 폭력으로 발전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20년 5월에 있었던 텔하이Tel Hai 의 집단살해 사건이었다. 1920년 팔레스타인 폭동 초기에 아랍인들이 집단으로 유대인 이주촌을 공격하여 여덟 명의 유대인을 살해한 것이다.
유대인 이주에 대한 아랍인들의 폭력적 반발은 1881년 이래 간간이 지속되었지만, 다수의 유대인이 일방적으로 살해당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러시아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직계나 다름없는 2차 알리야 이후의 유대인들은 이런 폭력을 일방적으로 감수하기에는 지나치게 전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협상과 타협 대신 자신들의 농장에서 아랍인 고용자를 쫒아내고 유대인으로 구성된 자경대를 구성해 물리적 폭력에 맞서는 방법을 권장했으며, 텔하이 사건과 이후 지속된 팔레스틴들의 폭동은 그들에게 완전한 명분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텔하이 희생자의 묘역에 추도의 비명 대신, 유대인 작가 야아코프 카한의 시에서 따온 짧은 결의를 새겨넣었다.

"유다는 피와 불로 쓰러졌다. 유다는 피와 불로 다시 일어나리라."

이 때를 기점으로 초기 시온주의의 아버지 헤르츨이 꿈꾸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공존 개념은완전히 무너졌다.



덧글

  • 지나가던과객 2009/08/12 17:22 # 삭제

    만일 유태인들의 우간다 이주가 성사되었다면 지금처럼 아프리카가 혼돈스러운 상황이 적었을 것 같습니다.
  • Luthien 2009/08/14 01:09 #

    그쪽도 만만찮은 전투종족들입니다.
  • 少雪緣 2009/08/12 18:00 #

    자동 검색 관련글에 파아란님이 강림하셨다! 시온주의 만세! 유대 만세!!(....아...망했어요)
  • Luthien 2009/08/14 01:09 #

    아아 이런;
  • 네비아찌 2009/08/12 18:09 #

    유태인들이 우간다에 이주했다면 헤브루-우간다 대 수단, 소말리아의 "동아프리카 전쟁"이 중동전 대신 일어났겠군요. 헤브루-우간다 군에는 잔혹하기로 악명 높은 "이디 아민" 장군이 있었겠구요^^;
  • Luthien 2009/08/14 01:09 #

    예;
  • shaind 2009/08/12 18:26 #

    흔히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해서 1947년에 이스라엘국가가 갑툭튀하면서 인접국과 투닥거리기 시작했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만......

    그나저나 아랍소작농과 이주유대인들의 충돌 이야기를 보니 왠지 사람도 잡아먹은 어느 재개발사업의 권리금 문제가 떠오르는군요.
  • Luthien 2009/08/14 01:09 #

    사실 실질적인 분쟁은 그 전부터 있었죠.
  • paro1923 2009/08/12 19:32 # 삭제

    결국 시온주의의 기반은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불안'이라... 이건 뭐 공포정치도 아니고...;;;
  • Luthien 2009/08/14 01:09 #

    뭐, 이후 포스팅에서 보강됩니다.
  • 슈타인호프 2009/08/12 22:32 #

    랍비 공동체가 이익집단으로 변했다는 부분을 보고, 얼마 전 뉴스에 나온 랍비들의 장기매매가 떠올랐습니다.
  • Luthien 2009/08/14 01:10 #

    그런 일이 있었나요?
  • 슈타인호프 2009/08/14 01:18 #

    http://news.msn.co.kr/article/read.html?cate_code=8000&article_id=200907241102328004

    참고하시면 될 겁니다. 저거 말고도 "랍비 장기매매"로 검색하면 많이 떠요.
  • 행인1 2009/08/12 23:31 #

    뭐랄까, 저곳은 1948년 이전에도 정말 복잡폭력한 곳이었군요...
  • Luthien 2009/08/14 01:10 #

    저건 "빙산의 일각"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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