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사 9. 삼파전. 연재뭉치

중동전쟁사 8. 유대인의 초기 이주, 최초의 분쟁...에서 이어지지 않습니다.
빨리써서 중구난방, 사실 빼먹은 구석이 있어서 보론넣고 들어갑니다. lllOTL

1918년 영국 점령 당시 팔레스타인의 총 인구는 68만 9천명, 이 가운데 무슬림이 56만 3천명, 기독교도 7만명, 유대인 5만 6천명으로,무슬림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의 활동 능력만을 비교한다면 유대인-시오니스트 측의 활동은 팔레스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고 집요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의 민족국가 National home 건설을 보장받은 벨푸어 선언이었다.

1916년 당시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원받기 위해 영국의 에스퀴스Asquith 내락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당시 영국 내각 측의 반응은 냉담했다.
수상 에스퀴스와 외무부장관 그레이 경, 육군 장관 및 원수 키치너 경 등은 당시 영국의 제국주의 시점을 기준으로 볼 때 시온주의가 영국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뿌린 떡밥이 있는 만큼) 조만간 오스만 투르크가 무너진다면 아랍측에 강렬한 민족운동이 대두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극소수의 유대인들을 위해 아랍국가를 자극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또한 영국내에 있는 유대인은 30만에 불과하며 그 가운데 시오니스트는 극소수로 표 동원능력이 없고,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요직을 차지한 시오니즘 단체의 활동이 로스차일드로 대표되는 영국내 자본가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는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이츠만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시오니스트들은 에스퀴스 내각의 구성원에 속하지 않는 다수의 유력 정치인들과 꾸준한 접촉을 가졌고, 이는 해가 지나기도 전인 1916년 12월에 구체적 성과로 나타났다.
바이츠만과 친분관계가 있던 친 시오니스트 성향의 로이드 조지가 1차대전 개전 이후 전시내각의 수상으로 취임한 것이다.
새 내각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친 시오니스트 활동을 보인 것은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벨푸어였다.
벨푸어는 내각에 임명되기도 전인 1916년 4월에 바이츠만의 요청으로 미국에 건너가 윌슨 대통령과 친분관계가 있는 유대인 법무관 루이스 브렌다이스를 통해 윌슨 대통령에게 유대인 독립국가의 건설 옹호시 1916년 선거에서 미국내 유대인 전체의 지지를 약속했다.
이런 주장은 국무장관 로버트 렌싱의 강한 반발을 샀지만, 끝내 윌슨 대통령의 비공식 지지성언을 받아냈다.
같은 시기 바이츠만도 미국에서 브랜다이스와 노먼 햅굿Norman hapgood 등에게 미국의 지지하 팔레스타인에 대한 동의를 얻었다.
1917년 7월 시온회의는 영국정부에게 팔레스타인에 민족국가 건설을 승인해 줄 것과 이를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진행과정에서 시오니스트 기구와 협력해 줄것을 요청하는 제안을 영국 시오니스트 회의 의장인 로스차일드를 통해 벨푸어에게 전달했다.
벨푸어는 이 제안을 8월 전시내각에 상정해 보았으나 타 안건에 밀려나거나 전략적 반대에 부딛쳐 통과되지 못했고, 결국 10월 4일이 되어서야 밀너 아메리의 수정안이 재상정되었다.
이 재상정안은 에드윈 몬테규 등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심의를 통과했으며, 벨푸어는 10월 6일에 이 내용을 윌슨 대통령의에게 보내 10월 13일 호의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최종 조정안은 11월 2일, 외무장관 벨푸어가 영국 시오니스트 회의 의장 로스차일드에 보내는 답신 형태로 발표되었다.


Foreign Office,
November 2nd, 1917.

Dear Lord Rothschild,

I have much pleasure in conveying to you, on behalf of His Majesty's Government, the following declaration of sympathy with Jewish Zionist aspirations which has been submitted to, and approved by, the Cabinet.

"His Majesty's Government view with favour the establishment in Palestine of a 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 and will use their best endeavours to facilitate the achievement of this object, it being clearly understood that nothing shall be done which may prejudice the civil and religious rights of existing non-Jewish communities in Palestine, or the rights and political status enjoyed by Jews in any other country".

I should be grateful if you would bring this declaration to the knowledge of the Zionist Federation.

Yours sincerely,
Arthur James Balfour

바이츠만을 위시한 유대인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트랜스 요르단으로 건너가 1차 대전 당시 오스만에 맞서 아랍의 전쟁을 주도했으며 아랍 독립운동의 핵심이기도 했던 하심 가의 파이잘과 접촉, 회담을 진행하고 이후 베르사유 평화회의중에 다시 만나 유대인의 대대적 이주를 보장 및 지원하고, 이주자들의 정착을 도우며 아랍인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내용의 서면 협정을 교환했다.
이는 후일 미국의 펠릭스 프랑크푸르터의 질문을 통해 재확인되었으나 (당시 파이잘은 "유대인의 이주를 환영한다" 고 발언하기도 했다) 정작 파이잘은 이후에 해당 협정 자체의 존재를 부인했다.
사실 이 협정은 파이잘이 의도한 아랍 통일 국가가 설립된 경우에나 유효성을 발휘하도록 작성되었으므로, 1920년 7월 시리아에서 집권했던 파이잘이 프랑스의 역공으로 실각한 이후에는 그 실효성을 상실해 버렸다.

시오니스트들이 진행한 일련의 외교적 노력은 1920년 8월 10일 파리 세브르 협정에서 최초의 공식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세브르 조약은 94조에서 제 연맹규약 22조에 근거해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를 "향후 반드시 독립해야 할 국가" 로 규정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을 언급한 95조는 연맹규약 22조를 형식적으로 언급했을 뿐 "뚜렷한 독립 계획을 포함시키지 않았으며" 그 이외의 내용은 유대인의 민족국가 건설을 보장한 벨푸어 선언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로스차일드의 질의에 대한 영국 외무부의 답변 서한" 일 뿐이었던 벨푸어 선언에 비해, 세브르 조약에 포함된 독립 보장은 그 의미가 매우 분명하며 국제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협정의 결과물이었다.
영국은 이를 바탕으로 이민령을 제정해 연 16500명 내외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입국할 것을 허용했다.
향후 25년간 매년 4만명 이상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이주하여 팔레스타인 내 다수민족 위치를 확보하려 했던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의 이민령에 반발했지만, 정작 유대인 이주는 1920년 9-12월에 5514명, 1921년에는 9149명, 9122년에는 7844명, 1923년 7421명 등으로 기대의 1/4에도 미치지 못했다.
외교적 노력의 괄목할 만한 성과에 비교한다면, 실질적인 이주사업에 대한 유대인 사회의 무관심은 굴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 시기,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사회와 시오니스트들 내에서는 낮은 이민률에도 불구하고 향후 시온주의 활동을 좌우할 괄목할만한 변화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1920년의 유대인 정착기금 기구 Keren Hajessod 설립이었다.
같은 해 런던 시온주의자 회의에서는 정치외교적 목표 상당수가 달성된 만큼 실질적인 이주과정을 지원할 재정 기구의 필요성이 논의되었으며, 그 결과 모금과 사업 등을 통해 확보된 수익으로 팔레스타인 이주 지원 및 팔레스타인 토지 확보등을 전담하는 전용 기구가 설립된 것이다.
이 기구는 1923년까지 150만파운드의 예산을 확보하려 했지만, 유대인 사회의 비협조로 인해 50만파운드 가량을 모금하는데 그쳤지만, 1920년 이후 사업을 통제할 중앙 기구로 기능하면서 이전부터 군소 시오니스트 단체들이 독립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토지매입 사업을 체계화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이는 만만치 않은 부작용을 낳았다.
그간 아랍인 지주 간의 토지거래에서는 소작인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관습이었지만, 이주를 목표로 하는 유대인들은 토지에서 나오는 수익이 아닌 땅 자체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의 토지매입이 체계적으로 확산되자, 소작농 형태로 생업을 이어가던 팔레스타인 농민들은 자연스레 생계수단을 강탈당할 수 밖에 없었다.
농민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한 팔레스틴들은 1920년 4월 4일 Nebi Musa (예언자 모세) 축제 당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가도상에서 반 유대 유혈 폭동을 일으켰다.
팔레스타인 및 시오니스트 사회 내에 사회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도 이 시기였다.
당시 팔레스타인 시오니스트 사회는 러시아에서 수입된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으며, 그 결과 벤구리온 등의 주도 하에 포괄적인 노동조합인 히스타드루트Histadrut 를 출범시켰다.
사회주의의에 입각한 노동조합인 히스타드루트는 1920년과 1921년의 폭동을 계기로 설립된 정착촌 자경대인 하가나 Haganah 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는 시오니즘 운동 내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 세력이 의결권과 무력 통제권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시오니즘 내에 확산된 유대계 사회주의는 이미 나흐만 쉬르킨 Nachman Syrkin, 베르 보로코프 Ber Borochov, 베를 카츠넬손 Berl Katznelson 등의 주도 하에 20세기 초부터 연구되었으며, 이들의 주장은 전통 공산주의 단체인 시온의 노동자당이나 사회주의에 바탕한 민족주의 단체인 젊은 노동자 당 등으로 조직화 된 채 시오니스트들 사이에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이들은 척박한 팔레스타인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기존 유럽사회 내에서 종교적 피학대자이자 민족적 소수자로서 강요당했던 유대인 특유의 수동적인 정신세계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그 대안으로 사회주의가 주장하는 공동체 정신을 강조했다.
이런 주장은 대다수 유대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으며, 결국 히스타드루트는 1930~1940년대를 거치며 모든 유대인 노동자 가운데 3/4가 가입한 거대 조합으로 성장했고 이후로도 강력한 영향력을 이어갔다.
(사실 2차대전 이전의 박해받는 가련한 유대인상과 2차대전 이후의 강건잔인한 유대인상의 이면성은 이런 변화에 기인한 것이다)
헤르츨의 사상적 후계자를 자처하던 블라디미르 야보틴스키 등은 반 사회주의 기반 민족주의를 모토로 하는 수정주의를 주창하고 사회주의 세력과 대립했지만 끝내 주류가 되지는 못했다.
이는 실질적인 시오니즘의 무게중심이 동유럽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사회 내에서 유대인의 발언권이 급격히 확대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시온주의자는 2만명 가량에 불과했으며, 실제로 1920년부터 1932년까지 12년간 불과 3000명 내외의 독일계 유대인만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반대로 동유럽에서는 1차대전 이후 집권한 공산당 내에서 유대인들이 주요 위치를 차지하며 잘 조직화 된 유대인 사회를 이끌었고, 이후 공산당이 유대인 담당기구인 예브세크치야Jewsektsia 를 통해 시온주의자 전원 추방을 결의하자 상당수의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선택했다.
팔레스타인 사회 내에서 사회주의의 득세는 이 시점에서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를바 없었다.
(다만 야보틴스키를 위시한 수정 시오니스트 연대의 위력을 무시할수는 없다. 이들은 방어를 주임무로 하는 하가나 만으로는 독립 투쟁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보았으며,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1921년에 Irgun Zvai Leumi, 즉 민족군사조직 IZL 을 설립했다.
보통 Irgun 이라고 불린 이들은 이후 스턴 Stern 이 조직한 Lohame Heruth Israel (LHI, 이스라엘 독립전사, 일명 스턴갱) 등과 함께 이스라엘 독립전쟁시점까지 과격파 시오니스트들의 항쟁을 주도했다)


괄목할 만한 일련의 구조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질적인 인력난으로 고생하던 유대인들과 달리,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에게 "팔레스타인 지방에 거주중인 무슬림" 이상의 정체성을 규정해 줄 만한 요소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었다.
당장 "팔레스타인" 이란 개념부터가 뚜렷하지 않았다. 오스만 투르크 휘하의 팔레스타인 지역은 현재의 행정구역 구분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시리아의 "베이루트 주" 에 속한 예루살렘, 나블루스, 아카 등 3개 지역에 불과했으며, 통치 역시 이스탄불에서 넘어온 오스만 관리들이 담당했을 뿐, 지역민들은 정치와 별 연관이 없었다.
1차 대전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심 가의 아랍군에 자원해 독립전쟁에 나서긴 했지만, 이 역시 "아랍인"으로서의 행동일 뿐, "팔레스타인" 만의 행동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최초의 조직화된 반영-반유대 운동을 주도한 인물인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의 행보는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 지도층의 성향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아민 알 후세이니는 1차대전 개전 당시 술탄의 성전 발동에 응해 오스만 투르크의 병사로 싸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심 가의 아랍군으로 귀순했으며, 이후 자신이 지지하던 하심 가의 파이잘이 시리아에서 실각하고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신탁통치를 시작하여 팔레스타인이 시리아와 이집트, 파이잘의 형 압둘라가 건국한 트랜스 요르단과 단절된 뒤에 비로서 "팔레스타인 내 활동" 에 착수했으며, 그 이후에도 여전히 시리아-요르단-팔레스타인 등을 포함해 "파이잘이 꿈꾸던 범 아랍국가" 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결국 하심 가- 파이잘의 그늘을 벗어난 최초의 조직화된 반발은 1920년이 되어서야 겨우 구체화 되기 시작했다.
아민 알 후세이니의 가문인 후세이니 가의 주도 하에 결성된 이슬람-기독교 연합이 신탁통치 부정 및 영국의 통치정책 거부, 유대인 이주정책 거부의사를 확정한 것이다. 이후 팔레스타인 내에서의 사회운동은 반 영, 반 유대인을 기조로 차츰 정립되기 시작했다.
유대와 아랍, 양자간의 관계는 1920년 텔하이의 집단 살해 사건을 기점으로 크게 악화되었으며, 1921년 5월 1일 야파와 텔 아비브에서 있었던 유대인 노동절 행사를 기점으로 폭발했다.
노동절 행사를 위해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운집하자 일부 아랍인들이 그 숙소를 기습했다. 운집한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은 서로의 상점이나 주택을 공격했고, 그 결과 아랍인 경찰관까지 폭동에 참여하면서 6일까지 수 개 도시에서 격렬한 충돌이 이어졌다.
이 충돌로 유대인은 47명이 사망하고 146명이 부상을. 아랍인은 48명이 사망하고 73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때 수천명의 유대인이 야파에서 쫒겨나 텔아비브 인근의 해변에 임시 캠프를 설치해야 했고, 이후 야파의 부속도시로 출발했던 텔 아비브는 아랍인의 도시 야파와 완전히 분리되고 말았다.
영국 정부는 뒤늦게 주동자들을 일부 체포했지만, 상당수 유대인에 대해서는 증거불충분 및 자위행위 인정을 사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는 아랍연맹을 크게 자극했고, 아랍 지도자들은 공동 진정서를 제출해 영국의 처우에 항의했다.
영국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1921년 6월 벨푸어 선언에서 유대인 이민은 "팔레스타인 경제에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만 성립된다" 며 사실상 벨푸어 선언의 부분 개정과 유대인 이민 중단을 천명했다.
이런 안이한 대응은 유대인과 아랍인 어느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11월 2일 예루살렘에서 새로운 폭동이 일어나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결국 1922년 6월 3일, 새로운 식민장관으로 취임한 윈스턴 처칠은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의 전부를 유대국가로 만들 생각은 없으며, 벨푸어 선언에서 규정한 유대인의 민족국가는 팔레스타인 중 극히 일부에만 건설될 뿐이고, 유대 이민은 팔레스타인의 경제적 능력을 넘지 않는 선에서 철저히 제한된다" 는 내용의 확정적 유화안-일명 처칠 백서를 제시했다.
이는 아랍인들에겐 크게 환영받았지만, 정작 유대인들에게는 엄청난 반발을 샀다.
그러나 처칠 백서와 달리 영국의 반응은 그리 바뀐 것이 없었다.
1922 7월 24일 국제연맹이사회-영국간에 채결된팔레스타인 위임협정 Palestine mandate agreement 에서는 벨푸어 선언의 내용이 그대로 들어갔던 것이다. 특히 이 협정에 따라 유대 기구를 팔레스타인 신탁통치기구와 협력할 공식 기관으로 인정하였으며 교권 차원에서도 아랍사회와 동등한 권한을 인정하는- 편파적 내용을 담고 있었다.
특히 이는 국제연맹과 영국간의 공식 협정으로 정치외교적 비중은 세브르 협정에 비견할 만 했다.
정치조직의 결성을 저지당했던 아랍은 유대민족회의 등을 포함한 자치적 정치조직을 인정하는 이 위임협정에 강력히 반발했고, 아랍의 대응은 점점 더 극단화 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여전히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1922년 이래 영국의 방침을 지켜본 팔레스틴- 특히 젊은 청년들은, 영국과 협상을 중심으로 사태를 끌고 나가려는 전통적 종교지도자 및 사회지도자들에게 크게 실망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의 지도자로 부상한 벤구리온이 1924년 유대인 전당대회에서 "아랍인은 나라를 가꾸지 않았으니 나라에 대한 권리도 인정할 수 없다" 는 초강경 헛소리로 물의를 빚는 동안 나블루스나 가자 등지에서 정치집단을 구성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1928년 4월, 야파에서 "팔레스타인 무슬림 청년단" 이라는 이름으로 연합 세력을 구축했다.
이 단체는 1928년 이집트에서 하산 알반나가 "부흥, 조직화, 교육" 을 강조하며 정통 칼리프 시대로의 회귀를 모토로 설립한 조직인 무슬림 형제단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당연히 "팔레스타인" 의 조직이라기 보다는, "범 아랍 조직" 의 부분체에 가까운 성격을 띄고 있었다.
이는 당연히 분할주의 정책을 추진하던 영국의 방침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무슬림 청년단은 적극적인 반영투쟁에 나서는 대신, 우선 아랍 국가들의 연계와 낙후한 농촌의 생산 장려, 농업과 공업의 부흥을 위한 해외 기술연수단 파견 등을 추진하며 조직을 정비하고 규모를 확장하는데 주력했고, 이집트의 하산 알반나는 예루살렘 법률고문이 된 알 아민 후세이니 등과의 연계를 통해 무슬림 청년단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펼쳤다.
그 결과 무슬림 청년단의 규모는 크게 성장했으며 그 조직 역시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이런 요소들은 정치적인 투쟁은 물론, "물리적인 분쟁" 에서도 큰 힘을 발휘했다.



덧글

  • Luthien 2009/08/15 19:37 #

    차회예고 : 통곡의 벽
  • 행인1 2009/08/15 21:42 #

    현대 이스라엘의 탄생에 동유럽 출신자들과 사회주의가 저렇게 큰 영향을 끼쳤을 줄이야...
  • Luthien 2009/08/16 15:20 #

    애초에 미국도 경계한 빨갱이™ 국가입니다. 종교색도 없고.
  • gforce 2009/08/16 01:39 #

    본격 좌빨 노동조합 중심 국가 이스라엘™

    ...뭐, 지금 노동당은 마파이 시절하고 비교하면 몰라볼 정도의 중도파 정당이지만 말이죠.
  • Luthien 2009/08/16 15:21 #

    지금이야 그렇지만, 건국시절만 해도 소련 위성국가 늘어난단 소리를 들었던 곳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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