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사 11. 2차 세계대전 (스크롤 압박) 연재뭉치

중동전쟁사 10. 통곡의 벽, 팔레스타인 총파업과 무장항쟁. 에서 이어집니다.

*탈고도 안한 버전이라 엉성합니다. 한숨 잔 뒤에 내용이 지속적으로 수정될듯.
*당연히 오탈자/오류 지적 환영합니다.
*굽본좌 늦어서 죄송합니다. T-T



나치의 본격적인 유대인 탄압은 할머니 사망소식이 타전되기 전인(...) 1939년 6월부터 이미 본격화 노선을 걷고 있었다.
독일 내 모든 유대인들은 유대인 연합 Reichsvereinigung der Juden 에 강제적으로 가입되었고 유대인을 상징하는 복장과 표식을 강제당했으며 재산과 자격증을 박탈당했다.
11월 이후에는 모든 유대인들이 현 거주지역을 떠나 급조된 게토Ghatto 로 자리를 옮기라는 강제 이주 명령까지 추가되었다.
이런 일련의 유대인 탄압 과정은 대부분 아돌프 아이히만 Adolf eichmann 이 지휘하는 게쉬타포 집단의 주도 하에 진행되었으며, 이를 견디지 못한 유대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외로 탈출을 시도했다.
1939년 이후 30만에 육박하는 유대인들이 나치 세력권 내에서 탈출을 시도하자, 나치는 1941년 10월 유대이민 금지령 및 게토 외곽 출입금지령 (불응시 사살) 통해 독일내 유대인들을 압박하고, 더욱 강도높은 통제정책을 차례로 추진해 나갔다.

나치의 반 유대 정책은 팔레스타인의 시오니스트들에게도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다름없었다.
유럽의 유대인들을 구호하는 것은 당장 동포의 생명을 구한다는 인도적-도의적 차원 외에도, 독일에서 이탈한 대규모 “유대계 고급 인력” 들을 팔레스타인에 정착시킬수 있다는 “현실적 이점” 이 있었다.
그러나 1939년 발효된 맥도널드 백서의 “팔레스타인 이민 제약” 조항으로 인해, 유대 기구는 유럽에서 탈출하는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적법하게 불러들일 방법 자체가 없었다.
따라서 1939년 이후 유대인-유대기구 정책은 자연스레 “백서 개정” 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 시기 유대인들의 노력은 크게 세 방향으로 집중되었다.
하나는 바이츠만을 중심으로 영국의 친 유대주의 정치인들과 접촉을 지속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국에 지속적인 로비를 펼쳐 영국에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남은 하나는 “백서의 제한을 무시하고” 밀입국을 통해서라도 지속적으로 유대인 이주자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바이츠만을 위시한 친영파 시오니스트들은 1939년 이후 체임벌린 수상이나 헬리팩스 외무부 장관등을 만나며 백서의 정책적 수정을 요청했으나, 처음부터 “전략적 고려 하에” 백서를 채택했던 체임벌린 내각은 시오니스트들의 권고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친 시오니스트 성향이 강했던 노동당 내각이 친 아랍 성향의 백서 정책을 채택한 것은 중동이 제공하는 운하와 석유 때문이었다.
당장 수에즈 운하는 인도 및 여타 영연방 국가, 식민지와의 연계를 보장하는 통로였고, 이라크의 석유는 영국의 전쟁수행능력을 좌우하는 주요 전략물자였다.
특히 중동의 석유는 영국의 석유관리국이 1941년 7월 보고서를 통해 아바단과 바레인을 상실할 경우 “영국의 전면전 수행능력 자체가 무력화 될 것” 이라고 예측할 정도로 비중이 컸다.
이를 대체할 만한 스톡은 북아프리카의 주요 유정 뿐이었으나, 이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추가적 시간과 예산이 필요했고 그나마도 추축국이 북아프리카에 진출하면서 사실상 무력화 되었다.
영국은 독일이 중동으로 진출하거나 아랍 토착 세력과 손을 잡을 경우 운하와 석유를 모두 상실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당장 아랍인들이 무장항쟁을 시작할 경우 영국으로서는 이라크와 하이파를 잇는 파이프 라인을 완전히 보호할 수단이 없었다.
영국이 추방한 팔레스타인의 이슬람 지도자, 아민 알 후세이니가 베를린의 라디오로 “성전” 을 독려하는 상황에서, 백서를 통한“친 아랍” 정책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정작 백서로 대표되는 전시 영국의 대 아랍정책은 아랍인의 적극적 지지도 얻는데 실패했다.
일단 백서 자체는 “팔레스타인 무장항쟁의 성과” 로 인정되었지만, 백서가 명기한 “독립” 의 시기가 불확실한데다 유대인 이주 제한 역시 1945년으로 명기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랍 지도자들은 백서를 “영속성 없는 미봉책” 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랍인들의 반응이 미온적이라 해도, 유대인들이 운하와 석유의 안전을 보장하거나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체임벌린 내각의 냉담한 반응은 처음부터 예상 가능한 범주 내에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에 대한 실질적인 결정권을 영국이 쥔 이상, 유대인들이 영국과의 교섭을 포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바이츠만 등의 유대인 외교가들은 실각 가능성이 높은 체임벌린 내각 구성원들 대신, 전시내각을 구성할 확률이 높은 강경파 정치인들과의 접촉을 늘려갔다.
이때 윈스턴 처칠 등은 바이츠만과의 접견과 나치의 유대인 탄압 정책 정보등을 통해 “유대국가 설립에 대한 원칙” 에 개인적으로 동의하기도 했다. 차기 내각에 대한 유대인의 기대치는 1940년 5월 13일 처칠이 영국 수상으로 취임하며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유대인에 대한 몇몇 정치인의 동정심에 기대기에는 아랍과 관련된 영국의 이권이 지나치게 컸다.
시오니스트들의 염원인 백서의 수정이나 폐기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영국과 대등한 선에서 논의를 시도할 수단(내지는 명분)이 필요했지만, 소수의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에게“석유와 운하”에 대한 대안 같은 것이 존재할 리 없었다.
따라서 시오니스트들은 영국과 대등한 논의가 가능한 미국에서의 정치 켐페인에 착수하는 것과 동시에, 영국군 휘하에“유대인 부대”를 편성해 연합군으로 참전하는 방안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는 1939년 말 바이츠만과 체임벌린 수상의 접견에서 최초로 공식 거론되었다.
사실“영국 휘하 유대군”의 편성은 타협 불가능한 적인 나치 독일에 대항한다는 의미 보다는 “연합국과 같은 편에서 유대인이 참전할 경우 얻게될 전후의 발언력”을 위한 시도에 가까웠다.
또한“차후 독립시 창설할 유대인 군대의 훈련 및 실전경험을 축적” 하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이미 유대인들은 1939년 9월 말까지 팔레스타인에서 86000명 규모의 하가나 소집체계를 정비한 상태였으나, 정작 영국군과의 공동 작전 경험이 있는 일부 하가나 지휘관 등을 제외할 경우 실제 훈련도나 무장능력은 턱없이 빈약했다.
즉 전투병력 투입을 통해 외교력과 군사력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영국의 입장에서는 “영국이 유대인과 함께 싸울 경우” 발생할 아랍의 반발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종전이나 해산 후 유대인 부대가 그대로 “팔레스타인 내의 정규군” 으로 변질되는 것도 고려해야만 했다.
자연스레 영국 정부 내에서도 바이츠만의 제안에 대한 찬반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
당장 육군측은 리비아를 점거한 이탈리아나 독일에게서 수에즈 운하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에 주둔중인 부대를 이집트로 돌려야 하며, 이 갭을 매꾸기 위해서는 유대인이든 아랍인이든 현지 징집 부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외교부는 아랍의 반발을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이득이 될 것이 없다며 반대 입장을 펼쳤다.
이런 논쟁은 1940년 5월 처칠이 수상으로 취임한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처칠이 취임하자 이미 Special Night Squads 를 통해 모세 다얀 등과 일해본 적이 있는 친 유대파 장교 오드 윙게이츠는 “1000명의 유대인 장교 훈련을 영국이 지원하면, 그 장교들이 4개월 내에 팔레스타인 내에서 20000명의 유대인을 조련할 수 있으므로 영국은 장비만 지원하면 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수상에게 직접 제출했다.
그러나 처칠은 윙게이츠의 제안을 “아랍인과 유대인이 동등하게 채용된 부대가 아니라면 분명 팔레스타인 내에 혼란을 가중시킬 것”이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유대계 수정주의자 야보틴스키 역시 처칠에게 직접 “유대군” 창설 및 증강계획을 제안했다.
처칠은 이 제안을 신임 식민부 장관 로이드에게 떠넘겼고, 로이드는 (처칠의 기대대로) “팔레스타인 거주 아랍인을 제외한 유대인만의 군대가 영국군 휘하도 아닌 독립 집단으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하다” 며 일언지하에 “유대군” 안을 폐기해 버렸다.
이는 체임벌린과의 회담을 통해 친 유대 성향을 드러냈던 처칠의 성향을 고려하면, 상당히 이례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성향이 다분한 선택이었다.


(뉴욕 방문중인 야보틴스키 씨)

이런 정책은 처칠 내각에 대한 시오니스트들의 기대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 내각이 친 아랍 정책 쪽으로 완전히 기운 것도 아니었다.
전쟁 발발 이후 유대기구가 백서 동결을 요청했음에도, 내각은 1940년 2월 백서에 의한 토지 거래 정지명령의 집행을 결정했다. 이는 백서에 명시된 독립을 위한 “입헌” 조항의 시행을 요구하는 아랍인들을 다독이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아랍측의 요구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1940년 5월 말 이라크의 수상이자 대표적 친영파 아랍 정치인인 누리 알 사이드가 바그다드 영국대사를 접견한 자리에서 신 내각에게“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영국의 확답” 을 요구했던 것이다.
당장 6월 10일 이탈리아 참전과 6월 22일 프랑스 항복으로 사면초가 상태인 영국은 잠시 회신을 연기하고 장고에 돌입했다.
일단 처칠은 “이라크가 전쟁에 협력하지 않은 상태” 인 만큼 별도의 회신을 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지만, 전임 수상 겸 추밀원 의장 체임벌린은 아랍측에 “백서추진을 약속하는 척” 하는 것이 아랍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내각은 결국 처칠과 옥새상서 에틀리, 그리고 체임벌린과 식민부 및 외무부의 의견을 절충해 누리 알 사이드에게“백서를 변경할 예정도 없지만 전쟁중엔 10조 4항-즉 입헌독립 조항을 이행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런 애매한 답변은 누리 알 사이드는 물론 그 지역에 파견된 영국인들마저 격분시켰다.
카이로 주재 대사 램프슨이나 팔레스타인 고등판무관 맥미카엘 등은 “프랑스 붕괴에 따른 시리아의 정세 변화가 아랍인의 불안과 연계될 경우 시리아-팔레스타인은 물론 아랍 전체에서 치명적인 문제를 가져올수 있다” 고 지적하고 백서 10조 4항의 이행에 대한 확답만이 아랍을 진정시킬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영국 내의 반론은 8월 중 이탈리아의 영국령 소말리랜드 침공으로 점차 격화되었다.
반대로 프랑스 몰락으로 인해 허공에 떠 버린 시리아에서 시작된 영국에 대한 아랍 측의 회의적인 반응과 친 독일 성향은 날로 심해지고 있었다.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을 이끄는 하산 알 반나도 팔레스타인을 방문해 순회설교를 하며 노골적인 반영 분위기를 조장했다.
하지만 영국 내각측은 아랍측의 “당사자” 인 팔레스타인에서 정작 백서에 대한 일관된 정치적 견해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여 램프슨과 맥미카엘의 제안을 반려했다.
램프슨과 맥미카엘은 추축군의 위협에 맞서 아랍측의 협력을 얻으려면 백서의 10조 4항을 이행하는 흉내라도 내기 위해 “아랍인들의 자문기구를 설립해 행정에 참여시켜야 한다” 고 주장했으나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런 실무진들의 강경한 백서 조기 이행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내각 구성원들의 정치적 해석 및 정보의 한계 탓도 있었지만, 백서 이행 저지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지를 시도한 시오니스트들의 저항 때문이기도 했다.
팔레스타인 시오니스트들은 영국과 미국 정부에 대한 백서 저지 로비를 진행시키는 것과 동시에 백서의 이민제한을 대놓고 무시한 채 대규모 밀입국 작업을 연이어 추진했다.
영국은 일단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적발된 밀입국자들도 일단 입국을 허용한 후 이민 할당 수에서 공제하는 방식으로 통제하려 했지만 밀입국의 규모는 축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밀입국 유대인들을 전원 체포해 영국 식민지의 억류시설로 보내는 새로운 정책이 추진되었다.
유대인들 역시 밀입국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결국 양자간에 대규모 충돌이 벌어졌다.
1940년 11월 25일 하이파에 입항한 파트리아 호에 탑승한 유대인을 불법이주로 규정해 억류하려던 영국 경찰과 피난선 및 하이파 거주 유대인들간에 충돌이 발생한 것이다.
파트리아 호에서 농성을 펼치던 유대인들은 영국 경찰의 진입 시도에 맞서 구류를 거부한 채 자폭, 결국 1771명의 승무원 및 승객 가운데 240명의 난민과 12명의 영국 경찰이 사망했다.
파트리아 호의 참극에 경악한 영국 내각은 팔레스타인과 관련된 대부분의 정책에 대한 결정을 유보했다.

노회한 영국과 달리 미국에 대한 유대인들의 켐페인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동유럽에서 건너간 유대인들은 대부분 미국 동해안의 인구밀집지대에 집단으로 정착했고, 시오니스트들은 이들을 포섭(...)해 강력한 정치집단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독일과 팔레스타인에서 건너온 유대인들의 생생한 증언 역시 이들에게 적지않은 힘이 되었다.
바이츠만은 1940년 2월부터 미국으로 건너가 루즈벨트와 의회를 설득하려 했다. 신중한 루즈벨트는 영국에 대한 백서 철폐 압력을 요구하는 바이츠만의 요구를 어물쩍 넘겨버렸지만, 이슈와 득표에 민감한 의회 (특히 하원) 는 비교적 쉽사리 유대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처칠은 팔레스타인 주둔 부대들을 본토로 귀환시켜 본토결전에 대비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참모들은 팔레스타인 주둔군의 이동이 당장은 유효할수 있어도 팔레스타인 및 시리아/요르단/이라크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반대했지만, 처칠은 적어도 11개 사단 가운데 8개 사단의 보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리비아를 점령하고 있던 이탈리아가 참전하자, 팔레스타인 주둔군의 본토귀환을 놓고 다투던 처칠과 참모부는 “팔레스타인 주둔군의 이집트 배치”에 동의했다.
다만 영국측에는 주둔군의 대규모 이동시 팔레스타인의 공백을 매꿀 마땅한 부대가 없었다. 내각은 사장되었던 팔레스타인 내 징집안을 재검토하기 시작했고,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도 재빨리 자신들을 “유용한 대안” 으로 어필하기 시작했다.
1940년 6월 말, 이탈리아의 전선 정찰이 노골적으로 강화되자, 영국 내각은 팔레스타인에서 3개 유대인 중대와 3개 아랍인 중대 등, 총 6개의 팔레스타인 보병중대를 모집한다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East Kent Regiment – the Palestine buffs 라고 명명된 이 부대는 일단 영국군에 직/간접적으로 협조한 인원들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유대인 전투부대 창설을 학수고대하던 유대인들은 즉시 이 제안을 수용했지만, 유대인과 아랍인이 항상 동수 모집 되어야 한다는 “동률 제한 Party Restriction” 원칙에 대해서는 불만을 터트렸고, 이는 후일 약간의 차등을 두는 선에서 수용되었다.
그러나 중동사령부는 정치적 이유를 들어 유대인들이 정착촌 방어를 위해 이런 부대를 이동하려 드는 것을 방해했다.

한편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을 총괄하던 유대기구는 팔레스타인 부대와는 별도로 “동원부대” 성격이었던 하가나 내에 “상비병” 조직인 팔마치(Palmach) 를 신설했다.
총 1300명 규모로 출범한 이 부대는 윙게이츠의 Special Night Squads 에 참가했던 병사나 장교 등 전투경력자를 중심으로 편성되었으며
영국은 이 부대가 “혹 시도될지도 모르는” 독일군의 팔레스타인 잠입 시도나 유대인 과격분자의 자체 진압 등에 대항할 수 있다고 보고, 약간의 교육과정 (특수부대 교전기술과 사보타지 기술 등) 을 제공했다. 이 기술들은 종전 후 영국군을 대상으로 한 전투에서 그 유용성이 입증되었다.

한편 팔레스타인 부대 Palestine buffs 와 팔마치 창단에 고무된 바이츠만은 연합군에 유대인 사단, 혹은 여단을 참전시킨다는 1939~1940년의 구상을 재차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이미 팔레스타인 부대를 허용한 처칠 이하 내각측의 반응도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9월 13일 그라치아니 원수의 지휘 하에 5개 사단 20만 병력으로 이집트를 침공하자, 영국 내각도 10월 10일 바이츠만의 유대인 부대 제안을 수용하고 10000명 규모의 유대인 선발을 유대기구측에 요구했다.
하지만 유대인 부대 계획이 실제로 추진되기엔 지나치게 많은 난관들이 남아 있었다.
당장 내각부터가 미국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1940년 11월 5일에 치러질 미국의 대선까지는 모집을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외무부와 식민부 역시 외무장관 이든과 식민장관 모인 경을 중심으로 유대인 모병 계획에 반대했다.
결국 유대인 부대 창설 계획은 다시 한번 기약없이 중단되었고, 아치볼드 웨이벌이 지휘하는 6만 3000명의 영국군이 12월부터 북아프리카에서 그라치아니의 20만 이탈리아군을 일방적으로 패퇴시키면서 이집트에 대한 위협이 (1차적으로) 일소된 뒤에는 영국측의 논의 대상에서 완전히 삭제되어 버렸다.
열성적으로 유대인 부대 창설을 추진하던 바이츠만은 급작스런 상황 변화로 계획이 좌절되자, “영국측에도 장비나 자원 등이 부족한듯 하다” 며 팔레스타인의 동료들을 진정시켜야 했다.
바이츠만은 이듬해인 1941년, 영국의 요청으로 “미국 내 영국 반대 운동”을 조사하기 위해 다시 대서양을 건너갔다.
실무진의 반대를 돌파하지 않는 한 영국의 친 유대 정책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절감한 바이츠만은 미국에서도 정치인을 대상으로 로비 활동을 벌였으나, 정작 미국에서도 표에 민감하지 않은 관료나 실무 정치인들은 시오니즘에 냉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전 후반-대전 후 시오니스트들의 로비가“시오니즘에 부정적인 실무진을 힘으로 누를 수 있는 상급자”에 집중된 것은 이때의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이탈리아가 패퇴하자 추축국의 중심인 독일도 본격적인 움직임을 시작했다.
1941년 2월 6일. 롬멜이 지휘하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이 트리폴리에 진출해 이집트의 영국군을 긴장시켰다. 롬멜은 “트리폴리 방어에 주력하라” 는 명령을 받고 있었지만, 이를 무시한 채 두달 뒤인 1941년 4월에는 완편되지 않은 전력으로 전면 기습을 시도했다.
그리스 전선에 2개 사단을 차출하며 약화된 영국군은 롬멜의 기만과 기습에 당황해 초기 1주간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후일 토브룩 더비라고 불리게 된) 무질서한 후퇴를 거듭했고, 그 과정에서 영국 장성 3명이 롬멜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독일군은 4월 8일까지 이탈리아군이 영국에게 빼앗겼던 지역을 모두 수복하고 토브룩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다.

1941년 4월에는 나치에 포섭된 이라크의 장교단과 이를 지휘하는 라시드 알리 장군이 이라크 수상 누리 사이드를 축출했고, 5월에는 아민 알 후세이니가 영국을 상대로 한 “성전” 을 선포했다.
이들은 비시 프랑스의 지시를 받는 시리아/레바논 주둔 프랑스 레반트 군의 앙리 당스 Henri Dentz 장군과 접촉해 배후에서 영국군을 위협했지만, 4주가 채 지나기도 전에 영국군의 공세로 무너졌다.
이라크의 반란을 격파한 영국은 다시 병력을 집중해 이라크를 배후지원한 레반트군을 공략, 7월까지 레반트군을 시리아에서 일소하는데 성공했다.
독일은 페르시아만을 배후에서 위협할 수 있는 이란에서도 쿠데타를 유도하려 했지만, 이는 8월에 영국과 소비에트가 부대를 파견해 이란을 점령-분할함에 따라 무산되었다.
토브룩을 공략하던 롬멜은 웨이벌의 역습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지만 토브룩의 방어선만은 끝내 뚫지 못했고, 결국 웨이벌의 대타로 착임한 오킨레크의 11월 대공세로 후퇴하면서 중동에 대한 1941년의 위협은 대부분 종결되었다.
그러나 롬멜의 공격과 이라크, 시리아의 반란은 영국이 맥도널드 백서를 채택하게 만들었던 “독일과 독일에 동조하는 아랍 세력에 의한 중동권의 위협” 이라는 근본적인 컴플렉스를 자극했다.
(유대인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영국군에 3000여명의 인력을 지원, 이집트와 이라크에서 독일 세력과 간접적인 대립구도를 형성하는데 성공했다)
위협은 1941년 이후에도 이어졌다. 이라크에서 이탈리아로 도주한 아민 알 후세이니는 11월에 독일로 건너가 히틀러와 접견한 뒤 라디오를 통해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모든 아랍인들의 성전”을 촉구했으며, 롬멜 역시 이듬해인 1942년 1월 역습을 개시, 지나치게 추격해 들어갔던 영국군을 다시 토브룩까지 밀어낸 뒤 2차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독일에서 놀고 있는 후세이니)

영국은 1941년 이후 중동의 전략적 취약성을 절감했으며, 내각은 이에 대한 근본적 대안이 수립되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했다. 이 과정에서 또 한번 유대인 부대에 관한 논의가 부활했다.
1941년중 팔레스타인에 남은 일부 영구군 사령부들은 당장 7개 중대 이상의 “현지인 보병” 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7월에 부임한 오킨레크 원수도 팔레스타인 주둔부대를 이용하기 위해 14개 보병중대를 모집하자고 제안해 왔다. 이런 부대들은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의 정규군 시설이나 유사시 동부 (이라크) 방면의 위협에 대응하는데 사용되는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간 줄기차게 유대인 무장의 위험성을 주장하던 고등판무관 맥미카엘조차도 유대인 보안대 및 특별경찰대 등의 확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결국 8월 초 영국 육군은 오킨레크 원수에게 팔레스타인 고정근무에 한한 4개 중대 징집이 우선 승인되었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이 징집의 수혜자인 카이로의 램프슨이나 본토의 외무부장관 이든 등은 이런 징집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시행될 경우 아랍-특히 이라크와 이집트의 반영감정을 자극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식민부 장관 모인 경 역시 별다른 장비 없는 10000명의 비숙련 보병의 효용은 의심스럽지만 아랍의 반발은 너무나도 분명하다는 이유로 반대파에 표를 던졌다.
결국 유대인 모병계획은 1941년에도 다시 한번 좌절되었다. 모인 경은 바이츠만과 벤구리온을 만나 “전투병력이 아닌 기술자의 고용은 가능하다” 는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바이츠만은 이를 수용할 경우 유대인 부대 편성 자체가 영영 무산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모인 경의 제안을 거절했다.
세 차례 무산을 통해 영국과의 타협만으로는 유대인 부대 창설이 어렵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유대인들은 다시 미국을 이용하려 했다. 뉴욕에서는 유대인 군사위원회 Jewish Army Committee 가 설립되어 영국에 대한 미국의 외교적 압박을 종용했다.
이들은 동시에 팔레스타인과 미국 양자의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히틀러와 싸우다 죽자” 는 과격하지만 직설적인 홍보활동을 벌여 상당한 호응과 후원을 끌어내기도 했다.
한편 유대인의 집단화-무장화 시도가 이어지자, 그동안 침묵하던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도 반 시오니즘 외교에 나섰다. 이들은 “백서”의 내용조차도 아랍인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하고 있다며, 이를 유대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수정할 경우 아랍인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강경한 경고의사를 영국 측에 전달했다.
시오니즘에 반대하던 이웃 아랍국가들도 아랍 연맹을 통해 연합국(특히 영국/미국)과 시오니스트의 정치외교활동에 집단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랍연맹에는 1937년 이후 사우디 아라비아, 이라크, 트랜스 요르단,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단일 아랍 국가를 표방하며 1942년 2월 이후 지속적으로 각국 수뇌간 회담을 추진하며 영국 및 미국 등에 압력을 행사했다.

유대 기관의 시오니스트들도 지지부진한 영국과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보다 강경한 정책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1942년 4월에 루즈벨트의 산업협력 요청 (미국의 인조고무 개발 지원사업이었다) 에 따라 도미한 바이츠만과 벤구리온 등이 5월 뉴욕의 빌트모어 호텔에서 새로운 활동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발표지의 이름을 따 빌트모어 계획 Biltmore Programme, 혹은 빌트모어 강령이라고 명명된 4개 항은 지금까지 발표되었던 그 어떤 시오니즘 선언보다도 공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벤구리온은 벨푸어 선언에 기반한 이 강령에서 “아랍민족과의 협조를 희망한다” 고 발언하긴 했지만, “유대인 무제한 이민, 이민을 포함한 유대인 관련 모든 임무를 유대 기구에 위임할 것,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국가 건설과 이를 위한 유대인 창설” 등을 향후 유대기구 행동의 원칙으로 삼는다고 발표하여 백서 10조 4항 이행을 주장하는 팔레스타인 무슬림 및 아랍 연맹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러나 빌트모어 강령은 동시에 시온주의 역사상 “가장 우울했던 시기” 를 상징하는 선언이기도 하다. 당장 중동에 대한 독일의 군사적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영국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유대인으로서는 영국의 오락가락하는 정책에 맞서 빌트모어 강령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히브리대 총장 Judah Magnes, 철학자 Martin Buber, 미국의 Hadassah 창립자 Henrietta Szold 등은 빌트모어 강령에 반대하고 아랍인과 통합을 기본 골자로 하는 팔레스타인 내 복합민주국가를 지지하기 위해 Ihud 당을 조직했다. 물론 그 영향력은 미약한 편이었다)


(여기가 빌트모어 호텔)

“영국과의 외교” 에도 실패하고 “독자적 군사력 보유” 도 좌절당한 유대기구의 노력은 자연스레 미국과의 외교로 집중되었다.
바이츠만은 7월까지 미국에 머물며 섬너 웰스 국무장관과 루즈벨트 대통령 등을 차례로 접견하고 필사적인 설득을 거듭했다. 유대인 생활의 참상은 웰스의 마음을 어느정도 움직이는데 성공했으나, 정작 바이츠만의 표적이었던 노회한 루즈벨트는 시오니즘을 미국이 정책적으로 인정해달라는 유대인들의 요청을 교묘히 회피했다.
루즈벨트는 처음부터 “팔레스타인 문제는 분열이 아닌 화합” 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했으며, 바이츠만이 “아랍 동의 하에 유대인 국가가 세워져야 한다면 유대인 국가는 영원히 세워지지 않을 것” 이라고 반박했음에도 그 의견을 끝까지 바꾸지 않았다.
이런 신중한 자세는 미국의 중동 진출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루즈벨트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이븐 사우드 등과 중동정책에 대한 논의를 교환했으며, 미국 내 유대인의 정치적 압력 (몰표) 와 관계없이 “유대인 지원이 향후 미국의 아랍권 진출에 도움이 될 요소가 없다” 고 판단하고 있었다.
(루즈벨트는 이븐 사우드와의 접견에서 “미국은 아랍과 유대 양자의 협의가 전제되지 않은 팔레스타인의 어떠한 정치적 결정도 지지하지 않겠다” 고 보장하기도 했다)
루즈벨트가 교묘하게 확답을 피하자 시오니스트들의 로비는 덜떨어진 국회의원들에게 집중되었다.
시오니스트들에게 설득당한 하원은 1943년 8월에 “대통령의 시오니즘 반대가 지속될 경우 의회의 국정조사권을 행사한다” 는 내용을 통과시키며 신중론을 견지하던 행정부와 루즈벨트를 위협했다.
이는“맥도널드 백서에 대한 반대 성명”으로 이어졌지만, 루즈벨트는 이 성명에서조차도 원칙적인 이야기만을 늘어놓은 뒤“미국 정부는 영국의 정책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으며, 위임통치 자체는 미국과 아무 연관이 없다.” 는 내용을 삽입하여 하원의 압박을 교묘히 빠져나왔다.

한편 유대기구의 외교정책이 영국과 미국에서 모두 결정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팔레스타인 내에서는 외교 대신 행동으로 독립을 달성하자고 주장하는 레히LHI ( Lohamei Herut Ysrael, 스턴 갱) 등 반영, 반아랍 활동도 점차 심화되고 있었다.
스턴 갱은 영국의 요청에 따라 유대기구가 원칙적으로 준수하던 “아랍과의 휴전”을 무효라고 주장하며 1942년 초부터 영국 및 아랍에 대한 테러에 착수했다.
이들의 목적은 테러에 의해 영국이 빌트모어 강령에 따른 순수 유대국가 건설계획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었다.
당시 스턴 갱은 200명 내외의 인원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유대인 지역 사회의 간접적인 지원을 받았다. 유대기구는 이들의 활동이 외교정책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자제를 촉구했지만 처음부터 유대 기구에 반발해 이탈한 과격파들이 그런 권고를 받아들일 리 없었고, 경찰서, 방송국, 일부 지방 관계자 등에 대한 기습 및 폭탄 테러가 이어졌다.
2월에는 기습 과정에서 스턴 갱의 창시자 아브라함 스턴Abraham Stern 이 영국군에 의해 사살당했지만 스턴 갱의 활동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팔레스타인 내에서 영국의 혼란과 유대인 및 아랍세계의 대립이 심화되는 동안, 독일에서는 1942년 1월 20일 베를린에서 반제 회의Wannsee Conference 가 개최되었다.
게쉬타포의 하이드리히, 뮐러, 그리고 전초 유대인 감시를 주도한 아이히만등이 참석한 이 90분간의 회의에서 유럽에 남아있던 1100만 유대인들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최종해결Endlősung 이라고 불린 이 계획은 독일 및 유럽 점령지 내 유대인들은 동부 점령지로 이동후 노역에 ‘사용’되고, 사용이 종료된 뒤에는 ‘폐기처분’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미 반제 회의가 진행되기 이전인 1941년 9월 3일부터 아우슈비츠에서 독가스 학살이 시작되었지만, 이것이 연합군과 유대인 측에 명확히 알려진 것은 좀더 이후의 일이었다.

아프리카 군단을 정비하고 있던 롬멜도 5월 26일 2차 공세에 착수해 6월 21일 토브룩을 함락하고 6월 30일에는 엘 알라메인에서 영국군을 재차 격파했다.
영국 수뇌부는 1941년의 공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드리아 항에서는 지중해 함대가 급히 탈출을 시작했고, 영국 사령부는 카멜 플랜을 통해 유사시 팔레스타인까지 포기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거론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단의 역량과 보급선을 고려하지 않은 롬멜의 무모한 공격은 처음부터 지나치게 허술한 부분이 많았다. (특히 후방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작전을 선행한 뒤 지원의 부재를 탓하는 것은 지휘관 보다는 세살 어린애 투정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1941년에 돈키호테의 맹진에 놀라서 달아났던 풍차는 1942년이 되자 현실의 물리법칙을 인지하고 방어를 굳힌 채 가을까지 착실히 전력을 보강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영국의 강력한 지중해 함대는 지중해 제해권을 철저히 장악- 북아프리카 군단으로 향하는 보급을 성공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시간에 쫒긴 롬멜은 8월 말에 알람 할파에서 공세를 시도했지만 오킨레크의 후임인 신임 8군 사령관 몽고메리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신경성 위장병 증세를 보인 롬멜은 잠시 전열을 이탈했다가 10월에 다시 아프리카로 복귀했는데, 그 기간동안 영국은 11개 사단을 동원한 섬멸전을 준비할 수 있었다.
결국 1942년 10월 23일부터 시작된 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영국 8군과 몽고메리는 롬멜과 북아프리카 군단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영국의 중동 사령부는 엘 알라메인 전투 이후 최소한 1943년 봄 까지는 북아프리카에 대한 결정적인 군사적 위협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으며, 이후 연합군이 튀니지까지 패퇴하는 독일군을 추격하자 사실상 위협이 종결되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연합군은 미국의 패튼이 이끄는 서부임무부대를 모로코에 상륙시키고 프레와 라이더의 부대를 알제리에, 시칠리아의 케셀링을 튀니지로 투입하여 북아프리카 추축군에 대한 대 포위망을 완성했고, 이듬해 5월 13일, 튀니스를 함락시켰다.
중동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일소된 것이다.


엘 알라메인 (참고용)


1942년 말부터 시작된 영국 및 연합군의 군사적 성공은 유대인들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독일의 군사적 위협이 일소된 것은 분명 환영할 일이었지만, 정작 연합군의 성공이 이어지자 “유대인 부대” 의 연합군 참전을 주장할 명분이 약화된 것이다.
유대인들이 “유대국가의 군대” 를 양성하기 위해 유대인 부대 창설을 요청한다는 점을 꿰뚫어보고 있던 영국 내각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영국군 휘하의 Palestine buffs 나 치안조직인 유대인 에비경찰 Jewish Auxiliary Police 이상의 징병은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중동에서의 위협이 사라진 만큼 영국 내각이 유대인 부대를 허용할 가능성은 그만큼 낮아진 것이다. 시오니스트들과 영국 내각 및 군부의 관계는 한층 더 냉각되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은 1943년 1월 Palestine buffs 로 편성된 유대인 포병중대 하나가 팔레스타인을 떠나 이집트로 재배치되면서 한층 더 악화되었다.
영국 육군은 “외국인으로 편성된 유대인 부대를 이탈시킨 것” 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유대인들은 “자국인으로 편성된 부대를 빼앗겼다” 고 받아들이며 노골적인 거부반응을 보였다.
이 시점에서 영국은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진 만큼 유대인들이 1936년 이후 팔레스타인의 총파업과 무장항쟁과 같은 “반란” 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었으며, 이들이 영국의 중동권 핵심 인프라인 하이파-바그다드 도로와 하이파-칸타라 철도, 그리고 하이파-키르쿠크 송유관과 해군기지 및 육/공군 기지 등을 위협할 확률도 높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유대기구는 전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도 대규모 밀입국 및 무기밀수를 추진하고 있었다.
유대 기구는 유럽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및 친 유대 지하조직들과 연계해 독일의 눈길을 피한 유대인들을 불러모았고, 이를 통해 잔존 유대인들의 탈출을 위한 연합 구출 위원회(United Rescue Committee) 를 설립했다. 이들은 수십명에서 수백명 규모의 유대인들을 육로와 해로를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이탈시켜 팔레스타인으로 내보냈다.
실제로 1930년부터 1943년까지 19000 명의 유대인이 합법적으로 이민한 반면, 밀입국의 규모는 집계된 것만 20000명에 달했다. 목숨을 걸고 밀입국하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능동적인 탈출을 기도할 정도로) 잘 교육받았으며 생존의 위협을 계기로 시오니즘에 깊숙히 빠져 있었다.
이들을 무장시키기 위한 무기 밀수는 1939년 본격적으로 그 규모가 확대되었고, 1943년 초에 절정에 달했다. 밀수되는 무기는 대부분 폭발물이나 개인 화기 정도였으며, 군수품을 빼돌리거나 미국 등의 공장에 몰래 주문하는 형태로 확보되었다.
북아프리카에서의 대결로 영국군의 보급 물자가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에 대규모로 반입되자, 이를 빼돌리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상 유대 기구는 유대인의 정부로서 기능하고 있었으며, 하가나는 공식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 유대 기구의 “군대” 였다. 영국군이 반란을 경계한 것은 필연적인 수순일 수밖에 없었다.

영국 중동사령부는 4월부터 유대 신병 보충대 수색을 시작으로 유대인 밀집지역 수색을 통해 대량의 개인화기들을 압수했다. 유대인들이 크게 반발하자 7월에는두 번째 유대인 중대를 팔레스타인 외곽으로 이동시켜 버렸다.
무기 압수수색 작전은 9월에 재개되었는데, 11월까지 이어진 이 검색으로 인해 하가나와 이르군의 전력 구성은 심각한 장애를 겪었다.
갑자기 강경해진 영국 육군측의 반응에 분개한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고등판무관에게 “유대인의 반란”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현재의 정책을 중단하라고 협박했다.
그간 영국군과의 정책적 협조 관계를 유지하던 이르군 역시 영국의 현지정책이 돌변하자‘정복자 영국에 대항해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며 무장항쟁으로 정책을 선회했다. 조직원이 2000명에 달하는데다 태반이 하가나 출신이었던 이르군이 대영 무장항쟁에 착수하면서 팔레스타인 내부의 대립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유대기구는 연합군의 핵심으로 급부상한 미국을 통해 영국에 간접적 압력을 행사하려 했으나, 영국은 1943년 5월 외무부장관 이든의 명의로 “워싱턴의 시오니즘 로비스트들 때문에 중동에서의 연합 전선이 분열되고 있다”는 성명을 전달해 외교적 고지를 선점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영국군과 유대인들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동안, 영국 내각은 팔레스타인의 처리를 두고 격론을 거듭하고 있었다.
내각에 자문으로 초대된 웨이벌 장군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존재하는 한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대립할수밖에 없으며, 양자의 분쟁은 향후 영국의 이권에 큰 손해를 끼칠 것” 이라고 확신했다. 이는 팔레스타인 고등판무관을 포함한 대부분의 실무진들이 지닌 공통의 견해기도 했다.
이에 따라 내각의 팔레스타인 위원회는 필 보고서와 우드헤드 보고서에 근거한 “분할안” 을 검토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두고 찬반 양론이 거세게 대립했다.

한편 중동정책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대립도 점차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노련한 루즈벨트는 유대인의 요구들을 태극의 원리로 흘려버리면서도 “영국의 제국주의적 중동정책” 에 대해서는 거부 반응을 뚜렷이 했다.
연합국 내 대립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석유였다. 미국은 1940년대 이전부터 향후 석유 확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영국이 선점한 중동의 유전에서 지분을 얻으려 했다.
영국은 이미 이란 석유의 독점권과 이라크 석유회사 (IPC, Iraqi Petroleum Company) 의 최대지분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미국의 석유업체들은 공격적인 매수작전으로 IPC 의 지분을 확보하고 사우디 아라비아와 바레인에도 진출하기 시작했다.
석유문제가 1943년 3월 American Presidental committee on International Petroleum Policy 에서 상원의장 해리 트루먼의 발언 (“장차 미국의 석유 수요는 미국의 자체 생산량을 초과할 것”) 으로 공론화되자, 미국 국무장관 힐은 영국 대사 헬리팩스와 접촉해 중동 석유 분할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힐과 헬리팩스의 논의로 시작된 양자의 실무논의는 1944년까지 지리하게 이어졌으나, 소비에트의 남진과 이를 통한 페르시아만 석유-페르시아 철도-페르시아만 부동항 확보를 저지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진 못했다.

영국이 해답을 회피하자, 미국측은 시오니즘을 무기로 삼기 시작했다.
1942년 말부터 나치의 유대 탄압 및 학살과 관련된 이야기가 유럽 외부로도 유출되기 시작했다.
이에 격분한 유대인들은 바이츠만을 중심으로 집결하여 3월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집회를 가지고 유럽 내 유대인의 참상을 미국인들에게 호소했으며, 유대인들의 캠페인은 미국 국민들에게 대중적인 동정여론을 조성시켰다.
동시에 바이츠만이 주도하는 미국의 팔레스타인 위원회는 67명의 상원의원과 143명의 하원을 지지자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이런 정치권의 지지는 사실 유대인들의 절박한 처지가 지닌 인도적 호소력 보다는 강력한 정치적 영향이었다. 유대인들은 뉴욕에만 250만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펜실베니아, 일리노이, 뉴잉글랜드 등 동부의 주요 투표구에서 선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만한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에 시오니즘에 동정적인 미국내 여론까지 고려할 경우, 미국 내에서 시오니즘의 정치적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반면 아랍인은 1943년 당시 전체를 통틀어 107000명이 거주중이었으며, 그나마도 거의 집단화되지 않았다)
미국 의회의 팔레스타인 위원회는 1943년 10월부터 1944년 1월까지 빌트모어 강령에 대한 의회 지지안을 제출하는 등 강경한 친유대 성향을 드러냈다.
루즈벨트는 영국에 대한 압박을 위해 이런 움직임에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외려 1944년 공화당이 “나치에 희생당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이 무제한 이민과 무제한 토지소유를 허용해야 한다” 고 주장하자, 여기에 반박하는 대신 “팔레스타인 내 유대 자유민주국가 건설을 지지한다” 며 유대인측의 입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런 반응은 누리 사이드 같은 친 연합군계 아랍인들에게조차 “미국의 친 시오니스트 정책” 이라며 비난을 받았지만, 루즈벨트는 얄타 회담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왕 이븐 사우드를 만나 배후 의견을 조율하는 노련한 외교를 통해 (적어도 아랍 상층부의) 불만을 억제했다.
미국의 정책 변화와 미국계 시오니스트들의 켐페인에 당황한 영국은 아랍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맥도널드 백서의 이민 제한이 끝나기 전에 새로운 팔레스타인 정책을 확정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내각 회의 및 참모회의를 연이어 개최하며 격론을 거듭했다.

한편 바이츠만은 1943년 9월 이탈리아에 연합군이 진군하면서 “아랍 지역 이외의 전선” 이 형성되자 (자신의 숙원이었던) 유대인 부대의 걸림돌이 하나 사라졌다는 것을 직감하고, 1944년 3월 처칠과 국무장관 그리그 등에게 서신을 보내, “유대인들은 유럽 해방 전쟁에 참가할 의향이 있다”며, “유럽에서 영국의 지휘 하에 유대인이 참전한다면 아랍의 반발도 없을 것” 이라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내각은 유대인 부대를 이탈리아에 파견하는 방안을 육군측에 검토하라고 지시했으나, 영국 군부는 유대인 부대가 정치적 부담에 비해 효용이 지나치게 부족하다며 반대 의사를 표했다.
당장 유대인을 징집한다 해도 쓸만한 병력을 완성하는 데에 수개월의 시간과 만만찮은 장비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1944년 당시 하가나는 100000명까지 증강되어 있었으나, 그 가운데 무장이 가능한 인원은 25000명 이하였고, 팔마흐를 포함하더라도 실전경험이나 훈련을 거친 이들은 200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이미 팔레스타인 부대 가운데 유대인으로 구성된 3개 포병중대가 있었지만, 이들을 이탈리아로 보내기 위해 영국인 포병중대 3개를 팔레스타인에 전개하는 것도 지나친 낭비였다.
바이츠만의 주장에 호의적이었던 처칠로서도 육군의 반발을 마냥 무시할수는 없었다. 양자는 의견 조율 끝에 “여단급” 부대를 시험 편성해 이탈리아에 파견하는 방안에 합의했고, 육군도 “유대여단이 어떤 전선, 어떤 전투에도 영국의 결정에 따라 투입되어야 하며, 장비의 기본 소유권도 영국군에 있다” 는 기본조항, 그리고 “여단이 팔레스타인 내에서 해산해서는 안되며, 팔레스타인 외부에서 모집된 여단 참가자는 해산후 팔레스타인에 입국할수 없고, 유대 여단에 유대인 독립국가를 상징하는 마크를 사용하지 못한다” 는 추가조항을 전제로 처칠과 유대인의 제안을 수용했다.
처칠은 독자적 마크의 사용정도는 허용한다는 정도를 제외하면 육군의 의견에 동의했고, 결국 내각은 9월 13일 유대 여단의 징병 공고를 승인했다.
유대인 참전이 (명목상으로나마) 승인받는데는 무려 5년이 걸린 것이다.
유대여단은 팔레스타인 징병자 및 영국군에 복무중이던 유대인의 차출 형식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때까지 영국군에 소속된 유대인은 총 43000명에 달했다)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어 영국군의 보조부대로 활동했다.
다만 시오니스트의 기대와 달리 전후 평화회담에서 유대인이 연합군 측에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데는 실패했고, 결국 유대여단의 성과는 군사적인 분야로 한정되었다.
한편 유대인 여단이 편성되면서 1941년 모인 경이 제안했던 기술자의 고용 및 하청도 본격화되었다.
여기에 모집된 유대인 기능공들은 대부분 유럽에서 기술을 익힌 망명 출신으로, 영국군에 소속되어 군수품 생산에 투입되었다.
영국은 1939년부터 1944년까지 군수품 생산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공업능력에 1억 1300만 파운드의 군비를 투자했는데, 유대인들은 이를 통해 55개의 금속 가공업체와 78개의 섬유업체, 48개의 화학제품업체를 설치할수 있었다. 군비투자의 목적은 유대인 지원이 아닌 팔레스타인 전체에 대한 투자였지만, 아랍인은 이 시점에서 서유럽과 대등한 기술력 및 인력을 보유한 유대인들과 경쟁할수 없었다.
아랍인에 대한 투자는 건설하청 및 농업 경기 부양 정도에 머물렀고, 유대인은 차후 독립전쟁의 발판이 될 군수품 제조능력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1945년. 유대 여단)

유대기구가 영국군 내에 유대 여단을 구성하는 동안, 이르군과 스턴 갱 같은 유대인 과격파들은 1943년에 영국정부가 보여준 일련의 압박 정책에 크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1944년 1월 이르군과 스턴 갱은 동맹에 합의했고, 2월 1일 이르군 리더 메나헴 베긴의 성명을 통해 “영국 정부에 대한 타협없는 반란” 을 선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무장투쟁 방식은 그들의 적이었던 아랍인의 영웅, 카삼의 방식과 닮아 있었다)
성명 이후 이르군과 스턴 갱에 의한 다수의 폭발 테러와 경찰에 대한 무장기습, 납치 사건등이 일어났다. 1944년 2월 12일에는 영국군 정보사령부가, 7월 13일에는 세무서가 폭탄 테러에 노출되었다.
영국정부는 “롬멜이 사라진 뒤에 날뛰기 시작한”일부 유대인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으며, 대다수 유대인들도 과격파의 활동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 성격 더러운) 벤구리온조차도 친영주의를 표방하고 유대 여단 구성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이르군과 스턴 갱의 전횡은 유대기구의 정책에 분명한 “장해” 요소였다.
이르군과 스턴 갱 등은 벤구리온과 하가나의 연합작전이나 지지, 적어도 묵인을 얻어내려 했지만, 8월까지 진행된 양자간의 회담은 모두 입장차로 인해 결렬되었다.
유대기구는 외려 10월에 “유대 여단” 타협의 대가로 영국군과 연합하여 이르군/스턴 갱에 대한 소탕작전을 전개하여 과격파에 대한 적대행동에 나섰다.

이런 유대사회의 혼란에 대해 대부분의 아랍인들은 방관적 입장을 유지했다.
베를린에 있던 아민 알 후세이니만이 3월 1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유대인을 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 종교를 기쁘게 할 것이며 참가자를 명예롭게 할 것이다, 알라께서 당신과 함께한다!” 고 성전을 선포했으나 별 반응을 얻진 못했다.
(이때 일부 아랍계 SS 지지자들이 텔 아비브의 우물에 독을 풀어넣으려는 행위가 적발되기도 했으나 이 역시 크게 이슈가 되지 않은 채 넘어갔다)

한편 영국 내각은 팔레스타인 위원회가 주장한 “분할안” 주장을 놓고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군부를 포함한 실무진들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분쟁을 고려하면 단일국가는 성립할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외무부는 팔레스타인의 분할을 통해 영국이 아랍권을 통제할수 없다는 점을 자인할 경우 중동권의 주도자 역할을 미국에게 빼앗길 수 있다며 분할안에 반대했다.
그러나 유대인과 아랍인의 치열한 대립은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책임을 부담스럽게 했고, 양자간의 분쟁이 전후에도 대전 후유증에 시달릴 영국 사회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결국 1944년 9월 내각의 팔레스타인 위원회는 분할을 팔레스타인을 위한 장기 해결책으로 확정했다.
분할 반대의 핵심이었던 외무부는 아메리 등을 중심으로 한 분할 제안에 맹공을 가했으며 분할안 지지자들도 분할 방안에 따라 사분오열되곤 했지만, 분할안이라는 큰 틀을 뒤흔드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처칠은 “독일을 완전히 점령하기 전까지는 어떤 실행안도 추진하지 않는다” 는 전제를 붙여 팔레스타인 위원회의 제안을 승인하고, 이 제안을 바이츠만과 벤구리온에게 전달했다.
처음부터 분할을 염두에 두고 있던 바이츠만은 영국의 분할안을 환영했으며, 분할안에 회의적이었던 벤구리온 역시 “독립을 위한 첫 계단” 으로서의 분할은 수용한다는 의사를 보였다.
반대로 아랍인들은 필이 제안했던 온건한 분할안조차 수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분할과 독립” 은 맥도널드 백서의 약속을 위반하는 것이며, 아랍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고등판무관 맥미카엘을 제외한 중동 모든 영국 주재관들은 팔레스타인의 분할에 대해 엄중히 경고했지만, 내각은 그들의 의견과 추가적인 소모성 논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맥미카엘은 분할되지 않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유입이 집중될 경우 발생할 혼란보다는 분할을 통한 분쟁이 차라리 가볍다고 판단했다)

분할안의 시행을 두고도 적지 않은 진통이 이어졌다.
지역의 토지보유비율로 따진다면 야파 항은 유대인의 땅이 되어야 했지만, 인구비율로 땅의 주인을 결정한다면 유대인이 26000명, 아랍인이 66000명 가량 거주하고 있었던 야파는 아랍인의 땅이 되어야 했다.
단순 인구분포로 나눌 경우 해안지대는 유대인 38만 6000명과 아랍인 306000명이 거주중이었으므로 유대인의 땅이 되어야 했지만 (이것이 에머리 등의 주장이었다) 이를 시행할 경우 아랍인은 바다로 이어지는 주요 항구를 모조리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갈릴리 호수를 위시한 일부 지역도 문제가 되었다. 이 지역은 팔레스타인 전역으 수원인 요르단 강이 시작되는 곳이었으며, 동시에 팔레스타인 전역에 전기를 공급하는 수력발전소가 설치된 지역이기도 했다.
예루살렘 등 분쟁요소가 다분한 지역은 아예 영국의 “영구 신탁통치지역” 으로 구분되기도 했다.
4차의 걸친 회의에서 필 보고서의 B 안에 가까운 분할안이 확정되었으며, 이 안은 1944년 1월 내각에서 최종 승인된 이후 대전 승리 이후까지 봉인되었다.
그러나 영국 내에서도 식민부와 외무부가 분할결정에 대한 수정안과 분할 반대의 진상 (The case against partition) 이라는 반론문서로 확정된 분할안에 반발하는 등 분할안을 둘러싼 분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동안 팔레스타인에서는 결정적인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1944년 유대인 사회 내 4차 의원 선거에서 빌트모어 강령은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며, 벤 구리온이 이끄는 마파이 당은 빌트모어 강령의 추진 정책을 통해 66% 의 지지율을 달성했다.
(그러나 Agudat Israel 에 거주하는 종교적 원리주의자들이나 요르단을 노리던 극단적 수정주의자, 유대인 맑시스트, 비 시오니스트 유대인 등은 “지나치게 나약하다”며 빌트모어 강령을 반대하고 있었다)
탄력을 받은 벤구리온과 마파이는 1944년 11월 예루살렘의 시오니스트 의회에서 빌트모어 강령을 유대조직의 공식 정책으로 채택챘다.
이를 계기로 벤구리온은 팔레스타인 유대 사회에서 절대적인 위치에 올라섰으며, 유럽과 북미를 전전하며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바이츠만의 영향력은 점차 축소되기 시작했다.
분할안의 대두와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강경파 벤구리온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이르군과 스턴갱의 활동도 점차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영국군과 하가나가 추진한 Season 작전에 의해 250명 이상의 이르군 대원들이 체포된 후 유배나 추방, 수감형을 받았고, 잔존 인원들은 좀 더 신중하고 위협적인 계획들에 집중했다.
8월 8일에는 팔레스타인 고등판무관 맥미카엘이 예루살렘-야파간 도로를 이동 중 기습 공격을 받아 가까스로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기습을 계기로 영국은 중동에 파견된 주요 인사들에게 경계령을 하달했으나, 스턴 갱 등은 꾸준한 활동 끝에 1944년 11월 6일, 두 명의 스턴 갱 요원들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전 식민부 장관이자 중동국장 모인 경을 암살하고 말았다.

충격을 받은 영국은 분할안을 위시한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정책 관련 각의를 멈추고 이후 모든 팔레스타인 정책에 대한 재검토에 착수했으며, 당황한 유대기구는 더욱 강도높은 대 이르군/스턴갱 수색작전을 전개했다.
집중적인 단속 활동으로 인해 스턴 갱은 크게 위축되었고 적어도 1945년 중순까지는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하지 못했다.

덧글

  • 행인1 2009/09/07 15:53 #

    역시 노회한 루즈벨트, 책잡힐 일을 잘도 피했군요.
  • Luthien 2009/09/09 04:29 #

    저걸 이제 트루먼이 다 말아먹습니다
  • 少雪緣 2009/09/07 16:02 #

    열심히 지뢰를 까는중...조만간 지뢰밭에서 검투사들의 싸움이...
  • Luthien 2009/09/09 04:29 #

    이제 0차 중동전, 이스라엘 vs 영국편을...
  • 굽시니스트 2009/09/08 01:17 #

    오, 이리 훌륭한 연대기로 눈보양을 할 수 있음에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실 저도 약속받은 땅 굽신을 회복하기 위한 굽시니즘에 경도된 굽시니스트인지라 유대국가 건설을 향한 저들의 의지를 십분 이해하지만서도 이 유혈낭자의 기원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요
  • Luthien 2009/09/09 04:29 #

    사실 이쪽도 저쪽도 "생존투쟁" 인지라, 어느 한 쪽 편들기가 참 그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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