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사 12. 영국 vs 유대인 연재뭉치

중동전쟁사 11. 2차 세계대전 (스크롤 압박)...에서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졸려서 사진 나중에 붙입니다. 원래 1948년까지 단숨에 갈 걸 끊은거라 분량도 애매 내용도 엉망. 죄송합니다.
*버그/오탈자 지적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어차피 다시 쓸거지만)

대전 말기 중동의 정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사망이었다.
1945년 4월 12일, 루즈벨트의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은 대통령 이임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던 시오니스트와 의회의 로비에 말려들었고, 아랍인과 유대인. 양자의 협의가 전제되지 않는 한 팔레스타인의 어떠한 정치적 결정도 지지하지 않겠다던 미국의 중동정책은 이때부터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존에 루즈벨트의 노선을 지탱하던 행정부는 뇌 없는 의회와 여론을 등에 업은 트루먼의 새로운 방침에 경악했다.
이미 루즈벨트 재임시기의 중동정책을 재차 삼차 강조했던 국무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 Edward Stettinius 는 시오니스트들의 무재한 이민과 유대국가에 대한 미국의 지지가 중동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저해하는 것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중동 정세 자체에 결정적인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고 엄중히 경고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트루먼은 정치적인 이익이 아니라, 자유주의나 도덕적인 관점에서 유대인들의 독립이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끝내 행정부의 반발을 물리쳤다.
이는 거의 전적으로 유럽에서 핍박받던 유대인에 대한 동정심과 중동정세에 대한 트루먼의 몰이해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는 (순진하게도) “인도주의적 측면에서도 유대인과 같은 소수민족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것은 정당하며”“벨푸어 선언 역시 미국의 이상,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족 자결주의를 팔레스타인에 적용할 경우 팔레스타인의 주인은 유대인이 아니라 다수민족인 아랍인이 되어야 했다. 비록 그 동기는 인도적이었지만,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의거해 시오니즘을 두둔하는 트루먼의 결정은 자기당착에 가까웠다.
트루먼의 친 유대 성향은 독일의 항복으로 유럽 전선이 종결된 1945년 5월 8일 이후에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승전국 사이에서 유대인 피난민을 위한 정부간 위원회가 조직되자, 트루먼은 친유대성향의 인물인 펜실베니아대 법학과 학장인 해리슨 Earl G harrison 을 파견해 유럽의 유대인 현황을 직접 조사하게 했다.
유럽에서 생존 유대인들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해리슨은 8월 20일자 보고서를 통해 “독일과 오스트레일리아에 분포된 수용소에서 최소 10만명의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켜야 한다” 고 주장했고, 트루먼은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영국측에“영국은 팔레스타인 이주 제한을 풀고 10만명의 이주를 용인해야 한다”는 내용을 전달했다.
스테티니우스의 후임이자 자신의 측근인 국무장관 제임스 번즈 James F Byrnes 역시 트루먼의 정책에 무리가 많다며 루즈벨트 재임기의 정책 채택을 요구했으나, 트루먼의 결정은 끝내 바뀌지 않았다.

미국에서 성공을 거둔 시오니스트들은 1945년 7월 전후 영국 총선에서 애틀리 Earl Attlee of Walthamstow가 이끄는 노동당이 승리하자 외교노선에 더욱 힘을 싣기 시작했다.
노동당은 1939년 맥도널드 백서가 채택될때부터 “팔레스타인 이주를 열망하는 유대인들의 귀향을 방해하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변호의 여지가 없는 사악한 결정” 이라며 꾸준히 보수당의 친 아랍 노선에 반대해 왔고, 새로운 내각에도 친 유대계 인사들이 다수 포진시키고 있었다.
대전기 내내 영국과 치열하게 대립해온 유대기구의 시오니스트들은 영국과 미국이라는 강력한 아군을 확보한 이상, 팔레스타인 내 독립국가 확보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판단했다. 이는 트루먼과 미국의 친 시오니즘 인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노동당은 유대인들의 예측(혹은 기대) 와는 달리 “전시내각의 중동전쟁 계승”을 선택했다.
가장 큰 원인은 경제난과 소비에트의 남진이었다.
전시경제의 후유증으로 인해 허우적대며 여전히 배급제를 유지하고 있던 영국으로서는 중동의 석유와 수에즈 운하를 통한 물류는 경제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요소였고, 그런 상황에서 다다넬즈 해협의 공유를 요구하고 이란에서 노골적인 공산주의 확산을 시도하던 소비에트의 남진정책은 영국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중대한 위협이자 친 아랍정책을 위한 계기, 혹은 명분으로 작용했다.
치명적인 경제난을 하에서도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를 지속하여 양국의 공산화를 저지한 노동당 내각은“예정대로 1946년 중에 맥도널드 백서에 명시된 계획을 폐기한다면”아랍과 소비에트의 연대를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물론 노동당 내에서도 기존의 친 유대 기조를 유지하기 위한 조사와 노력이 진행되었으나, 결론은 언제나 절망적이었다.
노동당 내각이 유대인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호의는 트루먼이 제시한 최대 10만명 규모의 일시 이주가 아니라,“매월 1500명, 연간 18000명”의 이주. 즉 맥도널드 백서의 이민규정을 연 2000명 가량 확대한 지속적 이주 허가 뿐이었다.
노동당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지속하던 유대기구의 구성원, 특히 바이츠만은 영국의 변절에 큰 충격을 받았고, 해당 제안을 공식적으로 거절했다. (다만 영국은 유대인의 반응과 별개로 이를 승인했다)

노동당의 변절이 명확해지자, 유대기구는 외교적 노력의 비중을 축소하고 그간 수정주의자들을 위시한 이르군이나 LHI 등 과격파들이 주도하던 무장투쟁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아리엘 샤론의 표헌을 빌리자면) 해리 트루먼의 끝내주는 폭탄 두발이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전쟁을 마무리하는 동안, 유대기구 휘하의 자경대인 하가나는 이르군, LHI 의 잔존세력과 손잡과 테누아트 후메리 Tenuat Humeri 동맹을 조직하여 영국의 방침에 전면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했다.
테누아트 후메리는 영국에 대항한 무장항쟁이라는 점, 민족 내 경쟁/반목 세력의 연합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1936년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총파업 및 무장항쟁과 흡사한 형태를 띄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비해 준비되어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유대인들의 전력이 충분횄다고 보긴 어렵다.
당시 유대기구 직속전력이었던 하가나의 가입자는 이미 5만명을 돌파한 상태였지만, 조직 자체가 소집체계여서 상비전력은 얼마 되지 않았고 얼마 되지 않는 상비병력들은 팔레스틴들의 산발적 기습이나 집단 충돌에 대비해 정착촌 방어를 위한 예비대로 돌려졌다.
장비 역시 산발적으로 구입하거나 밀수한 소형 보병화기 및 폭발물이 전부였다.
따라서 테누하트 후메리에 참가한 하가나 병력은 이갈 알론 Yigal allon 이 통솔하던 팔마흐 1900명으로 제한되었다. 당시 이르군의 전력은 1500여명, 리더를 잃은 LHI 의 전력은 1000명이 채 되지 못했으므로 실질적인 테누아트 후메리 전력은 3500여명 가량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테러는 제한된 병력, 빈약한 장비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했다.
1945년 10월까지 적어도 500회 이상의 불규칙적인 공격이 철도역과 같은 영국을 위한 산업 인프라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더 큰 문제는 과격하지만 비효율적인 이르군이나 LHI 가 아니라, 영국군에 의해 전문적으로 사보타주 교육을 받은 팔마흐가 주력으로 활동했다는 점이다.
팔마흐 지휘관 이갈 알론은 SNS 시절 영국군에게 교육받은 전술과 영국군의 강점 및 약점을 철저히 응용했으며, 그 결과 결정적이진 않지만 뚜렷한 피해를 유발하는 사회기간시설에 대한 공격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그간 이르군이나 LHI 가 주도한 “요인암살”은 매우 충격적인 것 처럼 보이지만, 정작 관료제를 채택한 영국 기관들의 입장에서는 “후임이 쉽게 임무를 승계할 수 있기 때문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철도역과 같은 사회기간시설에 집중되는 공격은 영국의 경제적 여력에 직접 타격을 가할 뿐만 아니라, “공격 지점과 시기를 예측하기 어려우므로” 방어에 필요한 전력을 모든 주요 표적에 배치할수 없었던 영국군은 일부 시설에 방어전력을 집중할 경우 타 시설이 공격받고, 모든 시설에 병력을 분산배치할 경우 공격측에 의해 쉽게 돌파당하는 악순환에 빠져버렸다.

영국은 병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제 6 공수사단을 팔레스타인으로 급파하여 총 4개 사단 규모의 치안전력을 확보했으나 그 성과는 비교적 미미했고, 결국 1945년 11월에 전임 고트경을 대신해 치안 관리 경력이 있는 커닝햄 장군이 팔레스타인 고등판무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1월이 되어서도 유대인들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트루먼의 10만명 이민제안이 에틀리 내각에 의해 공식적으로 거절당하자 유대인들은 153개에 달하는 주요 교량을 연속으로 폭파하고 텔 아비브에서 대규모 폭동을 일으키며 영국의 위임통치청을 압박했다.
영국군은 텔 아이브에 제 3 공수여단 전병력을 투입해 5일간 야간통금을 포함한 초강력 압수수색작전을 펼치며 유대인들의 저항에 맞섰지만, 돌아온 곳은 유대인들의 비협조와 해안경비소 및 영국 공군의 주둔지에 대한 테러 소식 뿐이었다.
유대기구 역시 영국의 위임통치청 및 식민부의 모든 협조요청을 거부하며 영국측에 맞섰다.
영국군과 위임통치청은 사태를 조금이라도 호전시키기 위해 무장항쟁조직 및 장비에 대한 대규모 탐색작전을 전개했지만 대전중에 진행된 계절 작전과 달리 유대인들은 어느 누구도 영국인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고, 결국 영국군의 행동은 유대인들의 적대감을 조장할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유대인들의 무장저항운동이 가시적으로 활성화되자, 팔레스타인 및 주변 아랍국가들의 반 시오니즘 정서 역시 점차적으로 구체화 과정을 밟고 있었다.
당시 영국 및 프랑스의 분할정책으로 분열되어버린 사우디 아라비아, 이라크, 트랜스 요르단과 시리아 등의 아랍국가들은 “하나의 아랍 을 주장하며, 분단된 아랍국가를 하나로 통합하려 하고 있었다.
이런 움직임들은 이미 1942년 2월 아랍 국가 수뇌회담과 1944년 9월 25일 알렉산드리아 준비회의를 통해 “아랍 연맹” 이라는 형태로 체계화된 상태였다.
이들은 알렉산드리아 의정서를 통해 “팔레스타인은 단일 아랍국가의 일부이며 영국은 1939년 맥도널드 백서를 통해 규정된 10년 후 독립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반대로 맥도널드 백서가 추인한 7만 5천명 이외에 추가로 월 1500명의 이민을 허용한다는 노동당 내각의 방침은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팔레스타인 및 주변국가의 아랍인들에게 있어 맥도널드 백서는 그들의 받아들일 수 있는 “호의” 의 상한선이며, 더 이상의 양보는 납득할수 없는 정신적 마지노선이었다.
아랍 연맹은 미국에도 루즈벨트가 이븐 사우드에게 약속했던 대로 “팔레스타인 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아랍의 견해와 이익을 고려하라” 며 거세게 항의했다.
영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랍 연맹의 팔레스타인 관련 성명은 유대인들의 과격한 저항 못지 않게 골치아픈 난점이었다.

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해 기본적인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미국의 순진한, 혹은 무분별한 개입도 유대인이나 아랍 연맹 이상의 골칫거리였다.
영국 외무상 어네스트 배빈Ernest Bevin 은 영국과 서구권 국가들이 소비에트에 맞서 중동내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이 “나치의 위협이 사라진 유럽에 정착하고”팔레스타인 문제는 시일이 걸리더라도 유대인과 아랍인의 합의를 통해 해소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트루먼 이하 미국의 정치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베빈과 주미대사 헬리팩스 경의 설득은 이론이고, 지역구의 유대인 득표는 현실이었다.
미국은 9월 이후 영국측에 꾸준히 외교적 압력을 가했고, 미제 분말달걀 배급이 없다면 크리스마스 케이크 하나 제대로 만들기 어려운 상황에서 영국이 미국의 주장을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베빈은 “절충안” 으로 영국과 미국 양자가 선발한 인원으로 구성되는 합동 조사위원회 (이하 영미 합동조사위원회 A joint anglo-american committee of inquiry) 구성을 제안했다.
이는 원칙적으로 본다면 유럽 전선 연합군의 두 주축이었던 영국과 미국이 전후 특정민족의 난민 문제를 함께 조사/해결하자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권리 및 책임이 없는 상태에서”인권을 무기로 영국의 정책에 막연히 간섭하던 양키 애송이들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시키려는 목적이 더 강했다.
베빈은 동시에 합동조사위원회의 구성으로 미국과 유대인의 압력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 수 있다면,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유럽도 어느정도 안정될 것이고 유대계 난민들 역시 척박한 팔레스타인 보다는 윤택한 유럽을 택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베빈과 영국 외무부는 조사회의 목적을 신중히 조절했다. 그 결과 조사의 목적은 “유럽내 유대인의 인구 조사 및 현황 파악” 에 두고, “해당 유대인들의 유럽 재정착 가능성” 과 “타 지방 이민시 보장받을 수 있는 여건” “기타 수단” 등을 비교 모색한다는 조사안이 확정되었다.
베빈의 제안은 10월 19일 주미대사 헬리팩스를 통해 미국측에 전해졌고, 트루먼은 “팔레스타인을 주요 조사지역으로 포함시키고” “10만명 이민이라는 기존의 방침을 바꾸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위원회 설립에 동의했다. (이 시점에서 유대인 난민 문제를 팔레스타인 문제와 떨어뜨리려 했던 베빈의 노력은 무효화되었다)
결국 양국은 11월 13일, 총 120일간의 위원회 활동에 최종 합의했다.
유대기구와 아랍 연맹은 조사기구 설립 소식에 크게 반발했다. 베빈의 의도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던 유대기구는 위원회가 유대이민 제한의 명분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고, 아랍 연맹 역시 트루먼의 입김에 왜곡된 위원회를 신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위원회 구성은 이미 미국의 정치적 의지와 영국의 국가전략을 건 대립구도에 접어든지 오래였다. 결국 1945년 12월 10일, 영국과 미국에서 각각 6명씩 선발된 12명의 영미 합동조사위원회가 당사자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조사에 착수했다.
위원회는 워싱턴과 런던에서 양국의 정치적 견해와 상황을, 독일과 오스트리아, 폴란드에서 유럽 유대인들의 현황을 파악했으며, 카이로에서 청문회를 개최해 아랍인들의 의견을 묻고 연이어 팔레스타인을 순방하며 유대인 대표인 바이츠만, 벤구리온, 그리고 Jemal Husseini , Auni Bey 등과 접견하며 차례로 정보를 수집했다.
유대기구는 위원회 활동 전반에 걸쳐 로비를 전개하며 팔레스타인은 수백만의 유대인을 흡수할 수 있고, (믿건 말건 자유지만, 일단은) 유대국가가 건립된다 해도 아랍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며 주변국과 우호관계를 확립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반대로 아랍인들은 “유대인 박해의 책임은 이슬람이 아닌 유럽에 있으며, 유럽의 반유태주의에 희생당한 유대인들을 구제하기 위해 아무 연관이 없는 무슬림들이 희생당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며 유대인 이민 중단 및 아랍의 독립을 요구했다.
그간의 정황을 모두 확인한 위원회는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 조사단원들은 유럽의 유대인들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점에 동의했으며, 미국측 조사단원들 역시 대규모 이주와 유대인 독립국가 설립은 정답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양국 정부의 방침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3월부터 보고서 작성에 착수한 위원회 구성원들은 보고서의 방향을 두고 심각한 대립을 벌인 끝에, “나치와 파시스트의 박해로 발생한 유대인 희생자들을 구제하는 데 팔레스타인만이 희생될수는 없으나” (아랍측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유럽의 상황을 고려해 유럽에 수용된 유대인 10만여명에 대한 이민이 1946년 내에 승인되어야 하며” (해리슨의 보고가 사실로 확인되었다) “팔레스타인은 단일 유대 국가, 혹은 단일 아랍국가로 독립할수 없고” (영국의 연구결과가 반영되었다) “유대인과 아랍인간의 적대관계가 해소될때까지 Un의 신탁통치를 유보하고 현재의 위임통치구조를 유지한다.” 는 등 10개 항의 보고에 합의했다.
1946년 4월 20일 최종 작성된 이 보고서는 당초 애틀리와 트루먼이 동시 공개할 예정이었으나, 트루먼은 약속을 깨고 일정보다 하루 가량 빠른 4월 30일 단독으로 발표해 버렸다.
보고서는 위원회 구성 당시처럼 당사자인 유대인 및 아랍인의 반발에 직면했다. 유대인들은 이 보고서가 백서의 이민 및 토지거래 제한 철폐를 요구했지만 장기적으로는 다민족국가 체제 하에서 “유대인들이 박해받는 소수” 가 될 수 있다며 반발했고, 아랍인들은 아랍인이 요구하는 백서 집행의 요구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보고서의 내용을 부정했다.
미국의 트루먼은 당초 예정된 10만명의 이민을 관철시켰으나 그 외에는 실질적 이득이 없었고, 영국의 베빈은 당초 계획했던 이민 지연 및 미국의 책임분담 가운데 어느 것 하나 관철시키지 못한 채 유대인과 시오니스트의 적으로 낙인찍혀 버렸다.
결국 베빈의 주도 하에 시작된 1945년 말- 1946년 초에 걸쳐 지속된 영미 합동조사단의 작업은 당사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동의하지 못하는 결론만을 남긴채 종결되었다. 위원회가 남긴 유일한 유산은 “모두가 만족하는 형태의 결론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 뿐이었다.

한편 조사단이 팔레스타인을 순회하는 동안에도 영국은 아랍측과의 협상을 지속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반발을 뻔히 짐작하면서도 협상 테이블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중동에서의 이권 유지였다.
당장 해운의 핵심인 수에즈 운하를 보유한 이집트는 2차대전 중 영국군의 “점령군에 가까운” 태도에 강하게 반발하며, 국왕의 후원을 받는 와프드wAFD 당이나 이집트 공산당을 중심으로 영국군의 이집트 철군을 요구한 상태였다. 수에즈 운하의 이권만은 반드시 지켜야 했던 영국으로서는 전면적 철군을 포함한 이집트측의 요구 다수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을 직접 지켜본 유대기구는 영국과의 공조에 의한 독립 가능성 대신 영국에 대항한 작전과 향후 자력 독립을 염두에 두고 대규모 군비투자에 나섰다. 1946년에는 최초로 30만 파운드 가량의 예산이 집행되었으며, 이 예산은 이듬해 11배인 330만 파운드까지 폭증했다.
유대인 이민 역시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치안 유지나 아랍과의 마찰 방지를 위해 이민 거부에 나설수밖에 없었던 영국은 해안에 대수상 레이더를 설치하고 선박 초계 및 임검을 확대하는 등 전방위에 걸쳐 유대인 불법이민을 단속하고, 수십~수천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을 체포하여 키프러스나 기타 수용소로 압송했다.
그러나 키프러스 수용소가 최대 26000명에 달하는 검거 유대인들로 채워지는 와중에도 매월 규정이민자수에 필적하는 1000여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을 밟고 있었다. 1946년부터 독립 직전까지 유대인 이민자는 25만 6000명에 달했다.
테누아트 후메리에 속한 유대인 무장저항단체들 역시 1945년에 시작된 무장저항운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비록 1946년 1월에 있었던 가자 지구 아키르Aqir 공군기지에 대한 이르군의 공격은 100여명의 무장병력이 동원되었음에도 목표 파괴에 실패하고 30여명이 사살당하거나 포로로 잡혀 영국군 신임 사령관 바커 경 Evelyn Barker 을 만족시켰지만, 이르군 등은 곧이어 텔아비브에 위치한 제 6 공수사단 주둔지의 주차장을 기습공격하며 공군기지 기습실패가 자신들의 한계가 아님을 확실하게 입증했다.
물론 유대인의 타격 역시 만만치 않았다.
기습작전이 장기화 되면서 적지 않은 수의 무장저항단체 조직원들이 아키르 공군기지 기습 당시처럼 사살되거나 체포당했으며 (특히 유대인 무장조직들은 장비의 질과 병력의 숙련도 면에서 영국 정규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고, 정면 교전은 필패로 이어지곤 했다) 대부분 아크레 감옥으로 압송되거나 국외로 추방당했다..
이르군을 위시한 유대인 무장저항단체들은 적극적인 보복작전으로 이에 대항했다.
보복전은 조직의 결속을 다지고 영국군을 압박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제한된 인력을 최대한 구제하기 위한 어쩔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보복전은 1946년 6월에 시도된 장교 인질극이다.
3월에 사라판드 육군 병영 습격과정에서 체포된 이르군 요원 두명이 영국군 살해죄로 사형선고를 받자, 이르군이 보복차원에서 6명의 영국군 장교를 납치한 것이다.
장교급의 목숨을 위협받게 된 영국은 결국 두 요원에게 감형을 선언했고, 이르군은 영국군의 이미지에 치명적 타격을 가하는데 성공했다.
영국군 역시 역 보복전을 전개했다. 장교들이 석방된 직후인 1946년 6월 29일, 테누하트 후메리의 구성원인 이르군과 레히, 팔마크는 물론 유대기구, 하가나의 전투부대 지휘자들까지 표적으로 삼은 Agatha 작전에 착수한 것이다. (영국은 기습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유대교의 안식일을 노려 작전을 기습적으로 결행했으며, 이로 인해 Agatha 작전에는 검은 토요일이라는 이명이 붙기도 했다)
이 작전에서 영국군은 주요 유대인 거주지역을 완전히 포위하고 모든 가옥을 동시에 집중 수색하는 전술을 채택했다. 수색조들 및 극소수의 유대인 협력자들은 보복을 대비해 모두 두건으로 얼굴을 가렸으며, 가담 용의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는 사람은 무조건 체포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영국군은 3000명의 유대인을 끌어내고, 그 가운데 135명의 팔마크 대원을 포함해 총 600명의 용의자들을 추려내어 아크레와 지역 수용소에 수감해 버렸다.
하지만 이런 작전은 식량분배와 같은 일상생활 지원 활동은 물론 응급환자나 출산같은 문제에까지 트러블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유대인의 비협조를 넘어 유대인들의 공분으로 이어졌다.
체포된 조직원들의 상당수는 곧 분노한 유대인 자원자들에 의해 메꿔졌고, 전 민족에 걸친 적대감으로 인해 이제는 일반 유대인들조차 영국군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기 시작했다.
특히 2대전을 전후해 팔레스타인으로 건너온 동유럽계 유대인들은 사선을 헤치고 나온 경험으로 인해 영국인의 강압적 치안활동에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나치와 공산주의자의 눈을 피해 움직이는 지하활동에 소양이 있었고, 이를 영국군을 상대로 응용하곤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영국 군인들은 자신들을 “집적적인 표적” 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나, 이르군의 보복작전 및 주둔지 기습 등을 당한 뒤에는 “살아남기 위해” 유대인들을 경계하게 되었다.
상황이 악화되고 대규모 수색작전이 전개되자 병력 부족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영국군은 이미 친영 성향의 트랜스 요르단에서 아랍 군단을 육성하고 팔레스타인에 경찰을 포함해 8만명의 전력을 배치시킨 상태였지만, 전방위에 걸친 유대인 단체들의 사보타주를 수습하기에는 여전히 병력이 부족했다. 공격에 노출된 영국군과 관공서는 전력 공백을 피하기 위해 시설 주변에 철책을 둘러야 했다.

한편 영국군의 표적이 되었던 팔마크, 이르군 등도 대규모 보복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점령 조직의 심장인 위임통치청이 위치한 예루살렘의 킹 다비드 호텔을 폭파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는 사실상 유대기구의 결단 하에 기획되었으며, 이르군에 의해 1946년 7월 22일 시행되었다.
이 공격으로 인해 91명의 사망자와 45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때 유대인 역시 17명이 사망했다)
영국군과 위임통치청은 이 테러의 배후에 하가나와 유대기구의 개입이 있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뚜렷한 근거가 없는 발언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꽤 예리한 추론이었다.
비록 유대기구 및 하가나는 최종 단계에서 실행을 유보했지만, 자신들이 발을 뺀다 해도 메나헴 베긴이 폭파 버튼을 누르리라는 점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테누아트 후메리는 이 공격의 정당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국제여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유대기구와 하가나, 팔마크 등은 시오니즘 운동 자체에 대한 국제여론 악화를 우려해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하는 공격을 회피하게 되었고, 과격파인 이르군과의 접촉 역시 대부분 차단하기 시작했다.
영국으로서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영국군과 위임통치청은 그 기회를 살리는데 실패했다. 영국군은 10만명의 용의자 후보군을 설정하는 산소 및 당분 낭비와 구태의연한 압수수색작전으로 허송세월했고, 결국 1946년 말까지 800여명을 구속했을 뿐, Agatha 작전과 같은 강렬한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이르군을 제외한 대부분의 그룹들이 영국군에 대한 공격빈도를 줄이고 사태를 관망하게 되면서 양자간의 사상자는 크게 줄어들었다.
팔레스타인 외부에서도 변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1949년 9월 영국군 철군이 확정되었고, 하시미트의 압둘라가 세운 트랜스 요르단 역시 요르단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하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시리아 역시 같은 해 프랑스에서 독립했고, 이미 1943년에 독립했던 레바논도 프랑스군이 철군하면서 어느정도 자주성을 갖추기 시작했다.
협상의 주체가 뚜렷해지자 다시 한번 외교적 활로가 열렸고, 실제로 영국은 9월부터 아랍 각국과의 회담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하지만 (예상대로) 협상이 무위로 돌아가자, 처음부터 아랍과의 분할에 비판적이었던 이르군 등은 연말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했다.
그간 수많은 기간시설 테러로 경험을 축적한 영국군은 예루살렘 역 폭탄테러를 사전 적발하여 완벽하게 저지하는 묘기를 선보였지만, 이런 행운섞인 기적이 그리 자주 일어나지는 않았다.
결국 1947년에 들어서자 참다 못한 커닝햄 장군은 유대인들에게 선사할 “최후의 한방” 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3사단을 추가로 파병받아 팔레스타인 주둔군을 8만에서 10만으로 늘이고, 1개 사단을 특정지역에 집중 투입하여 그 지역의 저항거점 자체를 분쇄한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었다.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청은 외무장관 베빈, 참모총장 몽고메리, 식민장관 그리치 존스 등과 격렬한 토의 끝에 3사단 파병을 보장받고, 대규모 기지강화공사와 동시에 군인 및 민간인 가족들을 본국으로 강제 송환하는 등 사실상 준 전시체제에 돌입했다.
영국은 이와 동시에 바이츠만과 벤구리온 등을 구슬려 2월에 런던에서 분쟁종결협상을 하자며 유화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에게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추진할만한 여력은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1946년 말부터 조짐을 보이던 영국의 경제난은 1947년 초부터 대공황의 형태로 구체화 되었고, 영국의 여유전력 역시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실제로 영국은 2차대전 이래 지원해오던 터키나 그리스 등 주요 국가에 대한 지원조차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자존심이 꺾인 영국은 미국에게 고개를 숙였고, 미국은 명예로운 고립을 포기하고 대 소비에트 봉쇄정책을 채택하며 3월부터 해당 국가들에 대한 지원임무를 승계했다.
결국 영국은 대대적 반격을 포기하고 패배를 인정했다.
내각이 “유대인과 아랍인들에 대해서는 어떤 해결책으로도 갈등을 해결할 방법을 찾을수 없다” 며 “9월에 있을 Un총회에게 팔레스타인 문제의 결정을 맡긴다” 고 공언한 것이다.
고등판무관 커닝햄 장군과 주둔군 사령관 바커 장군의 모든 노력은 이 시점에서 허사로 돌아갔다.
영국군의 입장에서는 실로 좌절스런 비대칭 전쟁이었다.

그렇다고 이르군의 공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 6월에 장교 납치로 재미를 본 이르군 등은 사관이나 부사관들을 노리기 시작했고, 4월부터는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거의 모든 영국군과 민간 관료들이 표적이 되었다. 심지어 예루살렘의 장교클럽에서조차 영국인들이 마음놓고 술을 마시지 못할 지경이었다.
적어도 철수할때까지는 팔레스타인을 책임질 의무가 있었던 위임통치정청은 이미 10만명으로 증가된 병력을 활용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특정지역 및 야간 통행금지령을 시행했다.
예루살렘과 텔 아비브가 완전히 포위되었으며 다수의 유대인들이 체포되었다.
유대인들 역시 보복 차원에서 하이파의 정유소를 기습하여 영국인들의 겨울철 난방유 관련 악몽을 자극했다.
사태는 소모전의 양상을 띄었고, 영국으로서는 더 이상 이런 “낭비” 에 자원을 낭비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팔레스타인의 상황은 베빈이 9월 유엔총회를 기다리는 대신 즉시 임시총회를 개최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영국군의 일제검거작전이 지나가자 추가적인 대규모 보복전이 이어졌다.
이르군 및 레히의 구성원들이 5월에 아크레 수용소를 기습, 50여명의 주요 요원 및 100명의 민간인, 171명의 아랍인 죄수를 모두 탈출시킨 것이다.
비록 이 가운데 과반수는 급히 출동한 공수부대의 공격으로 사살당했지만, 수용소 보다는 요새에 가까운 아크레의 파옥은 영국군의 치안 유지 능력과 방어력이 “유대인들의 기습” 에 무력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민 문제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특히 프랑스에서 4500명의 불법이민을 수송해오던 이민선 엑소더스 1947 과 관련된 분쟁은 영국과 유대기구의 대립을 격화시켰다. 이 배는 1947년 7월 18일 팔레스타인 해안 40km 서안에서 영국 해군에게 나포되었고, 하이파 항으로 예인되었다. 영국측의 불법이민자 강제송환 원칙에 엑소더스 1947의 유대인들은 선박을 점거한 채 2주간 저항했으나, 결국 양자의 충돌로 13명의 사망자와 77명의 부상자만을 남긴 채 강제로 귀환조치 당했으며, 이 과정에서 주동자로 체포된 유대인 세명은 아크레로 압송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에 분개한 레히는 두 명의 영국군 인질들을 같은 방식으로 교수형에 처하고 시체를 부비트랩으로 사용하는 치졸한 보복작전을 전개했다. (히틀러에게 팔레스타인 주면 영국과 싸워줄게, 했던 놈들 다운 선택)
영국군과 유대인들이 무의미한 마지막 분쟁에 열을 올리는 동안, 최후의 결정권은 트뤼그베 리 사무총장이 이끄는 UN에게 넘어갔다.

ps: 팔레스타인 아랍인 이야기가 없는 이유 = 이때는 정말 한게 없어서.

덧글

  • 행인1 2009/09/27 16:01 #

    미제 분말계란 없이는 크리스마스 케익도 못만들 지경이었다니 정말 안습의 영국....
  • Luthien 2009/09/29 00:18 #

    대충 넘어갔지만 1947년의 공황도 무섭습니다.
  • 바보이반 2009/09/27 16:25 #

    젖과 꿀이 흐르는 복받은 땅이아니고 피와 납이 흐르는 저주의 땅...
  • Luthien 2009/09/29 00:18 #

    하긴 고대부터 참 징하게 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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