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9일인데 새로 글 쓸 여유가 없어서 일년 전 포스팅으로 대체하오니 방문자 분들께서는 짱돌을 분리투척해주시는 선진 시민의식을...(략)
*한국의 419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일본의 안보투쟁 관련 포스팅입니다. 전후관계 설명을 위해 2차대전 직후부터 시작하느라 글이 쓸데없이 깁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의 공식 항복 이후 미군의 목표는 "일본 전역에 대한 신속한 장악" 이었습니다.
연합사령부가 치안을 담당할 군과 경찰을 모조리 날려버리고 그 자리에 미군 60만명을 동시에 박아넣는 무리수를 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짓을 60년 후에도 저질렀군요)
물론 군 인력의 급격한 사회유출과 이로 인한 조직 결성 및 사회혼란을 막기 위해 "전후 복구 지원" 이라는 명목으로 "복원성" 이라는 기구를 설치하긴 했습니다만 (이건 60년 뒤보다 좀 낫네요) 기존 군 관련 조직을 갈기갈기 찢어 분산배치하고, 장교 출신들은 한직에 모아 철저하게 감시하는 등등의 옵션이 붙었습니다.
실제로 전범 재판을 피한 일부 극우계 인사들은 "일본군 재건" 을 목표로 위사총대 같은 사조직의 구성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만, 양키들에게 가차없이 숙청당했죠.
문제는 미국의 "구 일본군 인력의 집단화" 에 대한 반감이 전후 사회 통제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심각했다는 겁니다.
사람들 뻔히 있는데도 기본적인 검역 인력조차 구성하지 못하게 막아서 전염병이 돌게 된다면 당연히 민중의 반발이 생길 수밖에 없는 법. 이런 상황에서 연합사령부 사령관 맥아더가 방패막으로 내세운 것이 히로히토 천황입니다.
즉 당시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지지도를 유지하고 있던 히로히토를 통해 "맥아더 자신이 추진했다면" 반발을 살만한 부분을 일본 천황의 이름으로 밀게 한다는 겁니다.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정신적 지주인 천황을 처벌할 경우 일본인들의 소요가 발생할 수 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해외에서는 전범 천황 나오라고 합니다. 히틀러는 죽었는데 저놈은 왜 밥먹고 잘 사냐고 씹어댑니다.
맥아더의 입장에서는 퍽 골치아픈 일이었습니다. 자신이 편하게 일하려면 천황의 이름이 필요한데, 자기 상관이나 전우들이 히로히토 잡아 죽이라고 난리니 말입니다.
고민하던 맥아더씨. 일본 각료들 중 나름대로 베프였던 요시다 시게루 총리를 불렀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 전 미국 원수와 요시다 시게루 (당시 총리) .
1954년 요시다 수상 방미 당시 촬영한 사진.
1954년 요시다 수상 방미 당시 촬영한 사진.
요시다 총리를 만난 맥아더는 히로히토에 대한 전범처분을 회피해 줄 테니, 그 대신 일본의 새 헌법에 완전 비무장 및 정치적 평화주의 조항을 넣어버리라고 종용했습니다.
즉 히로히토 전범 처벌 요구에 대해 "일본은 충분히 밟아 줬으니 그만 해도 된다" 고 말할 핑계를 요구한 겁니다. 사실상 국제적 사법거래죠.
게다가 이런 거래는 은밀히 진행된 것도 아닙니다.
당시 요시다 시게루는 구 귀족층이 군비 포기에 반발하자 신헌법 개정에 대한 귀족원 청문회에서 "패전중인 지금 어떻게 국가를 구하고 어떻게 황실의 안녕을 꾀할 것인가- " 를 주제로 한 연설을 통해 사실상 군비와 황실존속을 맞바꿨음을 시인했습니다.
결국 1946년 10월. 의회 내 압도다수 가결을 거쳐 1947년 5월 3일 발표된 일본 헌법에는 9조에 "국권발동에 의한 전쟁 및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 , "육해공군 및 기타 전력을 보유하지 않으며 국가의 교전권도 인정하지 않는다" 는 신규 조항이 통과되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평화헌법의 시작입니다.
동시에 대대적인 대국민 홍보작업이 대대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은 나쁜 것, 이제 우린 총포를 버리고 평화의 시대로 간다, 군을 포기하면 좋은점 등등등등등.
하지만 헌법 9조 자체의 완성도는 식후 좌담회의 이상론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당장 기본 구상부터가 요시다와 맥씨와 빅딜하며 대충 튕겨나온 것이다 보니, 외교적카드로 사용할 임팩트는 고려했어도 정작 실효적 적용시 주어질 부담 같은건 거의 연구검토를 하지 않은 겁니다.
전범국가로서 반성의 의미가 완전히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현실적인 대안은 전혀 아니었던 셈입니다.
이런 부분은 1946년 의회 청문회에서도 확인됩니다. 한 의원이 "9조에 따르면 침략전쟁에도 저항해선 안되는가?" 라고 질의하자 요시다 총리는 "자위권, 즉 본국을 방어하는 전쟁도 포기한다" 고 단언해 버렸습니다.
당연히 이런 비주얼에 치중한 정책 따위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기존에 자신들이 일본에서 담당하던 이런 임무 저런 임무 죄다 일본 정부 측에 떠넘기며 적극적인 재무장을 촉구하기 시작합니다.
(저러지 않았으면 RoK 란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을테니 마냥 미워할수만도 없고...꽤 애매한 문제입니다)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방침을 바꿔버린 미군들 때문에 일본 정부도 다급해 졌습니다. 요시다 총리는 일단 미군이 폭격기로 뿌려댄 기뢰를 처리하던 후생성 산하의 소해대 (구 일본해군 가운데유일하게 살아남은 집단...) 을 새로 개설한 해상보안청 보안국 소해과로 편성하고, 여기에 구 해군성 출신 인사 및 조직,하위기관들을 이리저리 밀어넣어 버렸습니다.
사실상 (소규모지만) 구 일본해군을 부활시킨 셈입니다.
한마디로 당시 요시다 내각에는 실재로 평화헌법 9조를 이행할 의사도 의지도 없었던 겁니다.
내각 필두인 요시다 수상부터가 사석에서 "한국전쟁은 하늘이 내려준 재무장의 기회"라고 평했으니...
한편 맥아더가 인천상륙에 이어 두번째로 추진한 대규모 상륙전인 원산 상륙작전이 북한에서 부설한 대량의 기뢰에 차단당하자, 미국은 마침 일본 해역에 부설된 기뢰들을 상대하느라 노하우만은 만랩을 찍고 있던 구 후생성 소해대 - 이후 신설 해상보안청 보안국 소해과의 지원을 요청합니다.
문제는 헌법 9조에 따르면 소해정 파견도 전력의 운용 및 해외파병으로 볼수 있었다는 겁니다.
2차 대전을 계기로 반전성향이 강해진 국내외의 반발을 생각하면 개정헌법을 전면적으로 위반하는 소해대 파견은 요시다 내각의 정치생명을 위협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결국 소해대에는 총리의 "극비 출동" 명령이 내려졌고, 이에 따라 25척의 소해정이 원산으로 파견됐습니다.
(참고로 소해 작업을 하던 도중 소해정 한척이 기뢰에 접촉해 1명이 전사(당시 행방불명) 하고 나머지 18명은 구조됐고, 전사자의 가족에게는 함구령이 떨어졌습니다. 이런 판에 "대규모 일본 지상군" 파견은 아무래도 무리)
그리고 한국 전쟁이 장기화되자 미국측은 본격적인 일본군 재군비를 종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미국과 강화조약을 추진중이던 요시다 총리는 미국측이 "장비와 훈련을 지원할테니 재무장을 추진하라" 고 권하자 이미 인력은 준비되어 있다며 "5만여명 규모의 지상 및 해양 자위병력을 창설하겠다"고 즉답했습니다.
이 협상 결과에 따라 1951년 9월 8일, 센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일본 재무장 및 미군 주둔을 약속하는 미일안전보장조약이 공표됩니다.
소해대 파견 당시만 해도 평화헌법을 지지하고 러브&피스를 외치던 일본 국민들도 전쟁이 장기화되자 윗동네인 한국이 무너지면 언제 쏘롄이 우르르르 몰려올지 모른다-는 공포심으로 인해 재무장을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이 지긋지긋해서 재군비를 지지했다고 할까요. (아닌 인류들도 몇 있었겠습니다만)
1951년 9월에 실시된 강화조약 관련 국민여론조사에서 "독립국이 될 경우 자위군 창설에 대한 안건" 에 대한 일본국민들의 답은 찬성 71%, 반대 16%, 기권/무효 13% 였습니다.
맥아더 후임으로 착임한 리지웨이가 총리 회동에서 구축함과 상륙함의 지원을 확약하는 등, 미국 역시 실무진 차원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결국 1952년 5월 일본이 주권을 반환받은 것과 동시에 자체적인 치안 및 경비능력을 확보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보안청법 심의 착수를 시작으로 1952년 8월에 보안청이 창설되었으며,1952년 10월 15일에는 총 11만명의 지상/해상 보안대가 발족합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의 속도.
이때 보안청에 대한 일본 정부의 시각은 사실상 군대의 재창설이었습니다. 총리겸직으로 보안청 장관에 취임한 요시다 총리가 보안청의 설립을 두고 “새로운 군의 토대” 라고 언급한 것도 이런 시각의 연장선상입니다.
물론 의회 내에서 "헌법심의 당시 요시다 수상은 자위권도 헌법으로 금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을 받자 "보안대는 치안의 연장일 뿐" 이라며 오리발로 받아쳐 버렸습니다마는.
이렇게 국방이라는 국가중대사가 조령모개식으로 처리되다 보니 (당연히) 내부 진통이 뒤따랐습니다.
단적인 예가 바로 함정 인수 지연사건입니다.
미국이 가져다 쓰라며 옛날 배들을 던져준 것은 1952년인데...정작 국내에서 이 배들을 일본이 인수할 때 민간선인 "선박" 으로 규정해야 하는가, 군용 선박인 "전투함" 으로 규정해야 하는가를 두고 행정적 논쟁을 벌이는 바람에 1953년에나 배가 정식 인도되었던 겁니다.
정치권의 재무장 의사는 있었지만, 정작 조직은 커녕 제도적 준비조차 완비되지 않았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1954년 자위대 창설 퍼레이드. "돈이 없었던" 당시의 일본은 일단 구 경비대에서 편조를 확대개편하는 선에서 방위청을 설치해야 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무장은 미국에서 공여받은 잉여장비들 뿐.
물론 이런 눈가리고 아웅이 주변국들에게 환영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소비에트는 당연히 전범국 주제에 건방지다 (...) 며 일본을 맹 비난했고,심지어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레일리아 조차도 (미국 입장에서는) 다 지나간 히로히토 전범처벌건을 거론하는 등 전쟁 피해국가로서 일본을 곱지 않게 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인 미국과 일본은 이미 자체적인 방위력 구성에 대한 합의를 마친 상태였고, 사실상의 행정적 절차만을 남겨둔 상태였습니다.
결국 1953년 9월에는 온건 보수 지향의 자유당 대표인 요시다 시게루와 개진당 대표 시게미츠 마모루 간의회담을 통해 헌법에 저촉되는 군을 대신해 자체적인 국가 방위를 담당할 무장단체를 구성한다는 “자위력” 개념을 정식으로 합의했습니다.
경찰조직의 독자적 보유마저 인정받지 못하던 전범국가가 한국전쟁 이후 불과 3년 3개월만에 전투조직의 법제적 합의 단계까지 일을 진행시킨 겁니다. (즉 한국전쟁만 아니었다면 일본의 재군비는 수십년 늦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도출된 자위력이란 개념이 평화헌법 이상으로 대충대충 말 갖다 붙인 수준의 졸속 정책이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의회에서 "보안대가 치안전력이라면 자위대는 무엇인가" 라는 질의가 나오자, 요시다 총리는 "자위대는 전력이 아닌 군대" 라고 간단히 답해 버렸습니다. (대체 뭔소린지...)
이런 저런 반발과 혼란이 뒤따르긴 했지만, 결국 1954년 6월 9일. 법률 제 165호 - 자위대의 임무, 자위대의 부대의 조직 및 편성, 자위대의 행동 및 권한, 대원의 신분 취급등에 관한 법률(일명 자위대법) 과 법률 제 164호 - 방위성 설치에 관란 법률 (일명 방위청법) 등 소위 "방위 2법안"이 의회를 통과했고, 1954년 7월 방위청과 휘하의 전투집단을 개편하는 자위대법이 시행됨에 따라 본격적인 자위대 조직이 개설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당시 정국을 주도한 요시다 시게루가 친 황실이나 제국주의적 있는 인물은 아니었단 겁니다.
당장 1936년 외무상에 임명되었다가 군부에서 "너무 외국과 친하다" 며 반대하다 쫒겨났고, 1945년에는 연합국에 최대한 빨리 항복하기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다 6월달에 군부에 체포당하기까지 했던 것이 요시다 시게루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반서양파면 맥아더랑 친할 리도 없지요. (...)
그가 추구한 것은 일본의 전후 복구와 안정적인 경제 성장, 그리고 이를 위한 "미국과의 협력체제 구축 및 그에 따른 이익의 환수" 였습니다. 즉 평화헌법의 의의 따위는 그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는 겁니다. 경제만 살리면 되는거지
그러니 해외의 부정 여론과 국민의 반전정서를 무마시키기 위해 헌법 9조는 유지하면서, 미국의 정책에 공조할 수 있는 "방어력" 은 보유하기 위해, "헌법 9조는 자위권을 부정하지 않으므로" (자신은 부정했었지만) "자위대와는 별개로 헌법개정은 불필요하다" 는 괴악한 외줄타기식 해석을 만들어 낼수 있었던 겁니다.
원리원칙보다는 실리를 중시하던 요시다 내각의 특성이 반영된 사례라고 할까요.
문제는 이런 외줄타기가 가능한 것은 오래 전부터 실리주의 외교관이었던 요시다 총리 뿐이었다는 것.
요시다 총리 퇴임 이후에 평화헌법 및 자위권에 대한 일본 정계의 반응은 크게 두갈래로 나뉘어 버렸습니다.
하나는 평화헌법을 개정해 보통국가로 나가자는 개헌진영, 다른 하나는 이상적인 평화주의 비무장을 표방하는 헌법 9조는 그 기원과 관계없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호헌진영입니다.

뻐드렁니가 인상적인 민주당 간사장 '쇼와의 요괴' 기시 노부스케.
개헌진영은 민주당의 간사장이었던 기시 노부스케가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상공대신으로 재임했으며 이후 영구전범으로 구분되었으나 재판없이 석방되어 사업가 활동을 거쳐 정계에 복귀한이 아저씨는 전쟁에 책임을 느끼고 있는(-혹은 느끼고 있는 듯이 보이는) 입장이었습니다.
기시 노부스케와 그 휘하의 세력들은 요시다 시게루의 지난 친미 종속 정책이 "어쩔수 없는 선택" 임은 인정한다 해도, 향후 일본이 독자적인 국가로 일어서는 데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고, 그 대표적인 사례로 평화헌법을 꼽았습니다.
당장 자위대가 등장해 평화헌법이 유명무실해진 마당에, 종속적인 형태로 맥아더의 입김에 따라 작성된 헌법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겁니다.
따라서 기시 노부스케는 평화를 추구하되 (정말?) 일본은 자립적인 보통국가로 성장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위력을 명시한" "일본인이 작성한 헌법이 필요하다" 는 민주당의 주장에 동의하는 입장이었습니다.
1953년 당시, 개헌에 대한 찬반 여론 역시 찬성 41% 대 반대 38% 로 우위에 있음이 확인되자, 기시가 소속된 민주당은 곧 개헌을 위한 물밑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대형 사고가 터졌다는 점.
1954년 3월 1일, 미국이 실시한 비키니 환초 수소폭탄 시험 당시, 인근 해역에서 조업을 하던 어선 제 5 후쿠류마루호가 방사능에 정면으로 노출되어 선박 및 23명의 선원들이 전원 방사능에 오염되었고, 그 중 한명은 귀항한지 열흘만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겁니다.
영화 고지라의 모티브가 된 이 제 5 후쿠류마루 사건 이후, 후쿠류마루 호 외에도 인근 해역의 어선 100여척이 방사능에 오염되었다는 점이 확인되자 일본에서는 다시 비핵 반전 운동이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모든 국민들이 꼬맹이와 뚱땡이로 한대씩 맞아본 공포를 간직하고 있던 시절입니다.
"자신들이 맞았던것 보다 훨씬 강력해진 핵병기" 에 "자신과 같은 일본 국민"이 피해를 입는 사건. 당연히 "핵을 사용하는 전쟁" 에 대한 공포심은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핵을 뻥뻥 쓰는 것이 전쟁의 추세로 여겨졌습니다, SALT? START? 새로 나온 소금인가요?)
이로 인해 여론은 급변, 1954년 국민여론조사에서는 개헌에 대한 찬성의견이 38% 까지 떨어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기시 이하 민주당측은 이에 굴하지 않고 (...) 헌법개정을 위한 필요조건인 중의원 및 참의원 도합 2/3 의 찬성표를 목표로 물및접촉에 착수, 결국 보수계 정당인 자유당과의 교섭을 통해 합의점을 도출하고 1955년 11월 15일에는 민주당-자유당의 통합에 성공해 거대 정당인 자유민주당 (이하 자민당) 을 창당했습니다.

덕후안경이중턱이 특징적인 아사누마 이네지로.
아사누마를 중심으로 한 우파사회당측의 주장은 개헌이 "초기의 의도와 관계없이" 결국 군비증강으로 직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한차례 대전 (+ 꼬맹이랑 뚱땡이도 하나씩) 을 겪은 호헌파는 개헌저지선인 1/3 의석 확보를 위해, 자민당보다 한달 앞선 1955년 10월 13일 좌파사회당과 통합, 총 156석을 확보했습니다.
좌우파 사회당이 모두 1951년 분당 이해 견원지간이었던데다 규모면에서는 좌파사회당이 더 컸고, 우파사회당 내에서도 니시오 스에히로 같은 "재군비파" 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이질적인 결속이었습니다.
이 결속의 목적은 당시 제정된 일본 사회당 강령에서 찾아볼수 있습니다. "평화, 민주헌법 수호"
여론조사 결과도 찬성 37% 대 반대 42% 로 역전된 판에 더 이상 싸울수 있겠냐는 거지요.
이에 맞서는 (...) 자민당의 강령은 "자위군 정비" 및 "헌법의 자주적 개정"
이것이 바로 일본 근대 정치사를 도배하고 있는 자민당-사회당 양당대립의 소위 55년 체제의 시작입니다. (...)
그리고 1956년 7월 8일, 55년 체제 출범 이래 최초의 대규모 선거인 제 4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가 열렸습니다.
선거 결과는 총 127석 가운데 자민당 61, 사회당 49.
그에 따른 의석 비율은-
| 정당명 | 개선 | 전국구 | 지방구 | 비개선 | 합계 |
|---|---|---|---|---|---|
| 여당 | 61 | 19 | 42 | 61 | 122 |
| 자유민주당 | 61 | 19 | 42 | 61 | 122 |
| 야당 | 66 | 33 | 33 | 62 | 128 |
| 일본사회당 | 49 | 21 | 28 | 31 | 80 |
| 녹풍회 | 5 | 5 | 0 | 26 | 31 |
| 일본공산당 | 2 | 1 | 1 | 0 | 2 |
| 기타 | 1 | 1 | 0 | 0 | 1 |
| 무소속 | 9 | 5 | 4 | 5 | 11 |
| 합계 | 127 | 52 | 75 | 123 | 250 |
로 자민당의 과반수 의석 확보 실패. 개헌이 저지됩니다.
하지만 야당 연합 (특히 사회당 및 녹풍회) 의 연합만 없다면 다수의석을 획득한 자민당은 여전히 강력한 여당으로 기능할 수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자민당 창당을 주도했던간사장 기시 노부스케는 1956년 당내 총재선거에서 이시바시 단잔에게 패했지만 곧 이시바시 내각의 외무상으로 취임했고, 이시바시가 사의를 표한 1957년 2월, 드디어 일본 총리로 집권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날고 기어도 2/3의석 확보 실패로 개헌은 불가능한 상태.
그래서 기시 총리는 묘안을 짜냅니다. 바로 "미일 안보조약을 개정하자" 는 것.
이시바 시게루가 센프란시스코에서 덤으로 해치워버린 미일 안보조약 - 정식명칭 미합중국 및 일본간 상호 협력 및 안전보장조약(Treaty of Mutual Cooperation and Security between the United Statesand Japan) 에 따르면 일본은 지속적으로 미국의 주둔을 허용하며, 일본에게는 기지제공의 책임이 있지만 정작 일본이 침략당할 경우 미국이 자체적 기지 방어 외엔 일본을 방위할 의무가 없습니다.
연합군의 점령지 일괄철수 이후에도 미군이 일본에 주둔할수 있었던 것은 이 조약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조항을 불평등하다고 판단한 기시 노부스케는,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면 국민들은 자민당에 표를 던질테고, 그 표를 바탕으로 개헌을 하면 된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럴리가)
기시는 취임후 곧장 주일대사를 불러 이 항목을 상호방위의 형태로 변경하자고 제안합니다.
약 3년여에 걸친 물밑 협상 끝에 확정된 개정조약은 1960년 1월 총리 이하 전권단이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젠하워 대통령 이하 실무진들과 접촉해 세부 조율을 마친 후, 1월 19일 워싱턴 DC에서 양자서명 하에 공개되었습니다.
(새로 나온 조약이기에 신 미일 상호방위조약, 혹은 60년 상호방위조약이라고 합니다)
신규 조약에는 일단 내란 관련 미국의 개입 조항 삭제와 미국과 일본의 공동 방위를 주축으로 한 일본의 핵심 제안이 통과되었고, 양국간 사전 협의 및 사법권 등 일본의 제안이 상당부분 반영되었습니다.
조약발효는 동년 6월 23일로 예정되었고, 남은 것은 국회의 조약비준 심리와 표결 뿐.
그런데 이 "엄청난 성과를 거둔" 개정 상호방위조약은 치명적인 폭탄을 품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ARTICLE NO.5
Each Party recognizes that an armed attack against either Party in theterritories under the administration of Japan would be dangerous to itsown peace and security and declares that it would act to meet thecommon danger in accordance with its constitutional provisions andprocesses.
Each Party recognizes that an armed attack against either Party in theterritories under the administration of Japan would be dangerous to itsown peace and security and declares that it would act to meet thecommon danger in accordance with its constitutional provisions andprocesses.
즉 이 조항에 근거하면 "미국이 공격받을 경우 공동으로 대응해야 하므로 무력 사용을 포기한 일본이 미국과 타국의 국제 분쟁에 휘말릴 소지가 있다!" 는 겁니다.
간단히 말해 이 조약은 헌법 제 9조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개정 조약이 공개되자, 사회당측은 당장 해당 법조항들을 일일이 물고 늘어지며 자민당과 실력대결을 벌이기 시작했고, 미군 기지 앞에서 놀던 성급한 운동권 출신 시위대들도 헌법을 무시한 협상이라며 정부를 격렬히 성토했습니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소비에트도 일본의 신안보조약을 맹비난하며 저런 방식으로 미국 주둔을 연장할 경우 러시아가 점유중은 북부의 섬들을 반납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상황파악 못하던 자민당이나 미국측의 반응은 소비에트가 후방에서 조작한거 아닌가. 빨리 비준 넘겨버리자. 정도.
그 시점에서.
자민당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사건이 터졌습니다.

U2왔져염 뿌우 'ㅅ'
1960년 5월 1일. 소비에트 영공 내에서 미국 고고도 정찰기 U2 추락.
그동안 손도 못대던 고고도 정찰기를 한방에 잡아버리는 데 성공한 흐루시초프 서기장은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이후 미국이 소비에트를 향해 정찰기를 발진시킬 경우 동맹국의 기지라도 공격하겠다!"
고 성명을 발표해 버렸습니다.
문제는 그때 미국은 러시아 극동방면 감시를 위해 아츠기 기지에 U2 를 배치중이라는 것. (...)
만일 흐루시초프가 정말 예고대로 공격을 해버릴 경우, 미군 기지가 공격받게 되므로 일본은 신 미일안보조약에 근거하여 미국과 함께 소비에트를 상대로 전쟁을 해야 되는 겁니다. (............)!
사회당은 (속으로 만만세를 부르며) 맹렬히 자민당을 공격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민당 측에서는 여전히 상황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약 심의과정에서 사회당이 "정말 공격받으면 어쩔거냐" 라고 묻자, 외무대신 후지야마 아이치로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혹시 무력공격이 있다면 제 5조를 발동한다" (=해석 : 한판 붙자)
이에 대해 소비에트는 짧게 반응합니다. "공식 선언으로 받아들이겠다"
이렇게 되자 전국적으로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연일 언론 지면은 관련 논란으로 도배, 사회당은 필사 저지 천명. 하지만 개헌과 달리 조약은 절반 이상의 득표만 있으면 얼마든지 개정안을 비준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민당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었고 말입니다.
힘에서 밀린 사회당은 의회 출석 거부까지 시도했지만, 기시 노부스케는 "군의 보유와 신안보조약 모두가 일본 평화를 위한 수단이다. 강행해야 한다" 며 정치생명을 건 강행돌파로 맞받아 쳐 버렸습니다.
...처음엔 그냥 득표율로 인기 끌어 개헌하려던거 아니었나 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5월 19일. 입구 막고 사회당 의원 결석 상태에서 자민당 단독으로
"날치기 통과"
조약의 6월 23일 발효가 확정되었습니다.
그렇잖아도 자민당이 정말 일 자알~한다고 생각하던 사람들, 드디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국회의사당 앞에선 수만명이 모여 안보반대 안보반대 하며 빙글빙글 돌고, 서명행사에선 2000만명이 지장찍고, 지방 도시에선 상가가 단체로 파업을 하는데 인근 주민들이 환영을 하는 웃지 못할 사태까지 터집니다.
게다가 의회 진입과 기시 내각 퇴진을 요구하는 군중들을 기동대와 방패, 살수차만으로 막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러자 기시 노부스케는 악수중의 악수를 두고 맙니다.
자민당 내 지인들에게 요청해 야쿠자를 끌어들였습니다.
그에 따라 대략 6개 조직이 현장(?)에 투입.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3개 우익 연합회에도 "행동부대" 가 될것을 요청. 그에 따라 최소한 3만 8천여명의 동원이 기획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정부가 헬리콥터, 세스나기, 트럭, 차량, 식사, 그리고 사령부 건물이나 구급대 지원, 그리고 "활동비" 명목으로 약 8억엔 지출이 결정.
...이쯤되면 막장이 따로 없죠.
6월 10일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일 일정 협의를 위해 입국한 보좌관이 하네다 공항에서 시위대에 포위되어 긴급 출동한 미 해병대 헬리콥터에 구조당하는 사건이 터졌고, 개정안보조약 비준저지를 목표로 전학련 7000명이 기동대 저지를 뚫고 국회돌입을 시도하다 부상자 1000명 이상이 발생, 그중 406명이 입원하고 175명이 체포되고 시위대에 섞여 있던 동경대생 가바 미치코가 압사 당하는 사고까지 일어납니다.
이번엔 언론 차롑니다.
자민당과 연줄이 있는 재경 신문 7개사는 6월 17일 공동성명을 통해 "의회 정치를 수호할수 있다" 는 슬로건으로 시위대의 폭력과 사회당의 국회 보이콧, 과도한 정쟁을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일명 시치샤 공동선언)
물론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경찰측의 폭력은 불문에 부치고, 논의의 본질을 평화헌법 수호에서 폭력 반대로 비틀어 버렸다- 고 해서, 후세에 6월 17일은 "신문이 죽은 날" 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
...결국 사태수습을 포기하다시피 한 기시 총리는 18일에 방위청의 아카기 무네노리에게 "육상자위대는 치안출동을 준비하라" 고 지시합니다.
명령에 따라 자위대는 출동대기태세를 갖췄지만, 아카기 장관이 끝내 "소요사태 위험이 있으므로 대기상태를 발령하나 출동은 거부한다" 며 총리 명령을 반려. 결국 자위대 최초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치안유지활동...만은 피할수 있었습니다. (...)
하지만 폭동의 성향까지 띄기 시작한 시위와 소요사태가 이어졌음에도 자민당의 필사적 거부로 참의원 추가 개원 및 의결이 없었기 때문에 신 미일 상호방위조약 자체는 6월 19일 은근슬쩍 자연 비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조약은 조약대로 통과되어 버렸고, 정부와 치안조직에 대한 신뢰는 바닥까지 떨어지고, 두 분기 경제가 작살나고, 아이젠 하워는 무서워서 못가겠다고 방일 취소하고, 이래저래 나라만 난장판이 된겁니다.
물론 자민당이 무사했던 건 아닙니다.
기시 총리 이하 내각 전원은 자연 비준된 6월 23일을 기해 해당 사태에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를 발표했습니다.
이후 자민당에서는 이케타 하야토를 중심으로 신내각을 발족시켰습니다만, 그 전에 기시 총리는 열사괴한에게 폭행을 당해 중태에 빠지는 등 이런 저런 후폭풍이 뒤따랐습니다.
국민적인 반발도 외형적으로는 진정되었지만 이케타 신임 총리의 발언에 따라 언제든 다시 터질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1960년 10월에는 참의원 총선거가 확정되었습니다. 자민당으로서는 패가망신하지 않으려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
결국 1960년 9월 7일. 이케다 내각은 공식으로 "헌법 개정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고 발표하여 당내 개헌론에 못을 박아버렸습니다.
사실상의 패배선언. 이후로도 자민당은 개헌을 당론으로 거론하지 않는 전통아닌 전통이 자리잡았으며, 이후로 찬반이 반분되는 논란은 아예 정책으로 내는 것을 회피하게 되었습니다.
이 선언 덕인지 10월 총선거는 자민당의 승리로 종결되고, 시위는 유야무야.
이후 정계에서는 "개헌은 동의를 얻지 못했으나 조약은 암묵적 동의를 받은 것" 으로 간주되어 지금까지도 당시의 조약 및 헌법 개정 불가 방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바꿔말하면 아직도 신상호방위조약에 의거 미국이 전쟁나면 일본도 따라 들어갈 여지가 있다는 뜻)
사회당도 피해가 작지는 않았습니다.

아사누마 이네지로 피살장면
(참고로 저 사진은 1960년 퓰리처 상을 받았습니다.)
바로 사회당 서기장 아사누마 이네지로의 피살입니다.
선거 직전, 3당 통합 연설회가 열리던 10월 12일. 야마구치 오토야라는 17세 청소년은 아사누마의 연설을 기다렸다가 단상으로 달려들어 준비한 칼로 공격,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그 자리에서 과다출혈로 사망했습니다.
범인인 야마구치 역시 "살인은 후회하지 않지만 살해의 대가는 치러야 한다" 며 20일 후인 11월 2일 스스로 목을 매서 자살합니다.
참고로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칠생보국, 천황 폐하 만세. 라나요 뭐라나요. (...)
결국 당수를 잃은 사회당은 내분으로 자민당에 대항할 힘을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일련의 사건에 대한 평은 보는 분들께 맡길 일입니다만, 여러가지 의미에서 기시감이 남는 건 어쩔 도리가 없네요. 나름대로는 잘 하려고 한 일이라던지, 그 후폭풍이라던지.



덧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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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러시아가 깔고 앉아있는게 이래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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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물건을 2010에도 여전히 쓰고 있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쓸 건지.
한반도에서 고고도 비행하면 북한까지 좍 보여서 꽤 쓸만하답니다.
개인적으로 블랙버드 퇴역이 매우 아쉬웠습니다.(티타늄 재질이라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였던가...)
그리고 요시다 총리도 대단하지만 맥장군의 정치력도 생각 외로 쩌는군염..(..) 르메이 같은 단순무식한 부류인줄 알았는데 상당한 충격입니다.
제작년에 전쟁책임 천황에게도 있다 라고 발언한 나가사키 시장이 우익 야쿠자한테 총 맞아 죽었죠.
그나저나 당시 저 사진의 피해자인 아사누마 이네지로의 가족들은 오히려 범인을 용서하고 저 범인을 저 지경으로 만든 우익들에게 엄청난 분노를 토했죠.
1. 혹시 시치샤 공동선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을까요? 서점에 가봐도 일본 전후 현대사 관련 서적은 좀처럼 찾을 수가 없더군요. 인터넷에서 뒤져봐도 안 나오고...
2.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틀렸을 확률 큼.), 일본 점령군 사령관이 맥아더보다 좀 더 제정신 가지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부지런한 사람이었다면 일본의 국체변경(공화제라거나...)도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맥아더는 그저 좀 더 편하게, 좀 더 빨리 일본의 행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천황을 이용했을 뿐이고, 사실 천황제를 폐지하거나 쇼와천황을 전범재판에 회부한다고 해서 일본인들이 거국적으로 저항을 하거나 비협조적으로 나오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이미 국민들 사이에 '그동안 속아살았다.'는 분위기가 돌고 있었고(전쟁에서 지면 전부 끝장이라더니 끝장은 고사하고 귀축미영이 돈줘, 약줘, 초코렛까지 줘...), 그동안 눌려살던 좌익세력이 대거 사회 전면에 등장해 오피니언 리더 역할을 하기 시작했으니 말이지요. 당장 종전 후 1년만에 반정부 시위에 천황을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플랫카드가 등장할 정도였으니, 만약 미군정이 국민들을 상대로 "이게 다 천황 때문에 니들이 엿된 거야."라고 프로파간다를 했으면 별 저항 없이 천황제를 폐지하거나, 최소한 쇼와천황을 전범재판에 회부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도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만약 일본이 공화제로 국체가 변경됐다면 천황을 살리기 위한 어정쩡한 타협인 평화헌법도 없었겠지요. 그러면 일본에는 자위대 대신 '일본 공화국 방위군' 같은 제대로 된 군대가 있었을 테고...딱 아시아의 독일처럼 됐을라나요?
사실 맥아더는 일본의 왕이란 소리를 듣던 인종인지라 이래저래 전후관리에서 아쉬운 부분이 많지요.
하지만 맥아더 못잖게 근본적인 문제가 된 건 역시 한국전쟁...lllOTL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21/201001210182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