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의 아들인 박종채의 기록에서 스물댓살 적 금강산 유람 부분을 발췌합니다.
을유년 가을, 동쪽으로 금강산을 유람하셨다.
유언호와 신광온이 바야흐로 나란히 말을 타고 금강산 유람을 떠나고자 하면서 아버지에게 함께 가자고 하였다.
아버지는,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에 감히 멀리 놀러갈 수 없다" 고 하며 (핑계) 두 분을 하직하고 돌아오셨다.
그러자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왜 함께 가지 않았느냐? 명산에는 인연이 있는 법이거늘 젊을 적에 한번 유람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지만 노자가 없었다.
그때 김아중김이중이 마침 우리 집에 들렀다가 이 말을 들었다.
그는 돌아가 나귀 살 돈 100냥을 보내면서 이 돈이면 유람을 떠날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돈은 마련되었지만 데리고 갈 하인이 없었다.
이에 어린 여종으로 하여금 골목에 나가 소리치게 했다.
"우리 집 작은 서방님 이불집과 책상자를 지고 금강산에 따라갈 사람 없나요?"
응하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이에 새벽에 출발해 다락원에 이르러 유공과 신공을 만났다.
뜻밖에도 아버지가 나타나자 두 분은 처음 금강산에 가기로 약속한 것보다 더 기뻐하였다.
아버지는 금강산 안팎의 여러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고, 만폭동에 이름을 새겨두고 돌아오셨다. (박지원 베프 유씨랑 신씨한테 묻어서 왔다감 ㅋㅋㅋ)
삼일포의 사선정에는 연구로 된 현판을 걸어놓으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금강산을 유람하실 때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보고'라는 시를 한 수 지으셨다. 판서 홍상한이 아들 집에서 그 시를 보고 놀라면서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도 이런 필력이 있었던가? 이는 거저 읽을 수 없다." 라고 하시면서, 외제 명품 중국 붓 크고 작은 것 이백 개를 문객으로 하여금 갖다주게 하여 정중한 뜻을 표하였다.
결론 :
1. 젊을 적엔 여행을 해야 한다.
2. 친구는 잘 사귀어 두어야 한다.
3. 옛 조선인들도 메이드 호객에 약했다.
4. 그때나 지금이나, 범인이나 위인이나 여행지 낙서는 피할수 없는 관문. (틀려)
덧글
낙서를 간지나게 해놓으면 100년 뒤 쯤에는 명문이 되어있을지;
한편 여러 명산에 두루 글을 남기신 울희 태양 수령님께서는(...)
그리고 포스팅거리 제공 감사합니다. (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