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해상자위대 건함사 (1) 옛것뭉치


*2008년에 썼던 궁극의 재탕 포스팅... (...)
다음화가 언제 나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완전히 폐선된 코류급 잠수함들의 잔해. 점령군 최고사령부는 구 일본 해군 소속의 전투함을 모두 폐선하거나 동맹국에게 공여하고, 이후 조선소까지 파괴하는 방식으로 재무장능력을 완전 말소하려 했다.

1. 전후 일본해군의 해체.
1945년 9월 2일, 일본의 공식 항복 이후 미국의 첫 번째 목표는 일본의 군사적 재기 가능성을 최대한 말살하는 것이었다.
트루먼의 항복 수용과 히로히토 천황의 무조건 항복 발표 이후 급편된 군정선발대는 항복선언 후 보름이 채 지나지 않은 일본에 입국했으며, 이틀 후에는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일본 땅을 밟았다.
맥아더 원수가 담당하는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대본영과 군령부의 지휘권을 인수하는 것과 동시에 60만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연합군의 손으로 직접 무장해제를 실시했다.
그에 따라 결정조직인 대본영과 군령부가 10월 중순에 완전히 해체되었고, 휘하조직인 육군성과 해군성도 11월 30일을 기해 대본영과 군령부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기형적으로 규모가 확대된 상태였던 일본군 소속의 인력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단기간에 민간 사회로 흡수될 경우, 연합군의 힘만으로는 사회 불안과 유사시 발생할 소요를 억제할 수 없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결국 연합군 최고사령부 측은 육군성과 해군성의 인력과 조직구조를 유용하여 제 1 복원성과 제 2 복원성을 설치했다.
복원성들은 기본적으로 군의 조직을 활용한 기관이었지만, 조직을 통솔할 주요 지휘관은 전범이 되거나 감시가 용이하고 실권은 없는 한직으로 밀려나고 일선 인원들에게는 치안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개인용 전투장비도 제대로 지원되지 않은 상태였다.
특히 해군성을 바탕으로 조직된 제 2 복원성은 그 구조상 후생성 산하의 "임시기관" 으로 구분되어서 최소한의 무장함정마저 보유할수 없었고 그나마도 "조직의 점진적 축소" 를 강요받았다.
전쟁 말기의 공습으로 인해 몇 척 남지 않은 구축함이나 해방함 등은 전량이 1947년까지 연합국에 배상함으로 인도 되었으며, 패트롤 보트에 가까운 초계특무정과 소해정만이 남아 무장의 태반을 제거당한 채 연안 작전에 한정적으로 투입되었다.
당시 일본에게 보유가 허용된 선박은 1호형 초계특무정 14척과 1호형 구잠특무정 11척, 각종 소해정 수십여척 정도에 불과했고, 배상함 명단에서 제외된 함정 가운데 그나마 전투용도로 사용이 가능했던 우쿠루급 해방함 4척은 무장을 해제당한 채 대기하다 최기상관측선으로 개조되어 버렸다.
즉 전후 일본이 보유한 극소수의 잉여함정과 잔존인력은 완전히 격리되어 어느 쪽도 정상적으로 가동되지 못했던 것이다.
예외적으로 소해부대와 함께 구 해군 군령부 작전과가 제2 복원성 자료 정리부로서 살아남았다.
자료정리부는 사실상 실권이 전무한 한직이었으나, 일본 해군 당시에 작성한 조직운영에 필수적인 인사 자료와 기록 정보를 보존한데다 일본 해군 당시에 주목받은 몇몇 중진과 핵심인재들을 조직적으로 수용하여 이후 해상자위대 발족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업계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시에 해군성 소속으로 재편되었던 대부분의 조선소들은 해군성에서 독립되어 신설 정부조직인 운수성 휘하로 재편되었다.
전쟁 말기 일본이 사실상 선박건조능력을 상실하다시피 한 덕에 상당수의 조선소는 그럭 저럭 외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연합군 최고사령부측은 아예 "필요 최소한도의 조선소" 를 제외한 모든 조선소를 폐쇄하고 고정설비와 건조에 필요한 장비, 기술자료 등을 전면 압수했다.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 민생회의 지시를 통해 일본의 조선능력은 연 15만톤으로 제한되었으며, 100톤 이상의 선박이나 전금속제 선박의 건조는 무조건적으로 엄정한 심사를 거치도록 제약이 가해졌다.
전후 일본이 수용 가능한 최대 건조량이 연 80만톤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최고사령부의 지시는 일본 내 잔존 조선업계의 운신을 1/5 이하로 억제한다는 의미였다.
특히 군함 건조에 참가했던 기술자들은 엄정한 신원 감시를 받으며 이직시마다 등록을 갱신하도록 규제 하는 등 엄정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결과적으로 상당수의 조선업계 종사자들이 조선소를 떠났으며, 그 결과 일본이 보유하고 있던 대형 선박-전투함 건조능력과 무장 제조 및 탑재 능력은 극소수의 인적자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무력화 될 것으로 예측되었다.
하지만 최고사령부측이 시행한 일련의 제한조치들은 일본 국내의 전후 식량난과 물자 수송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일선의 요청에 밀려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일본 조선업계는 "긴급 소요" 라는 명목 하에 전금속제 선박만을 기준으로 17만톤 이상을 건조할 수 있었으며, 48년 이후에는 최고 사령부의 승인 하에 공식적으로 건조량을 확대하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선박 건조 인프라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강경 정책으로 전투함 건조능력의 태반을 상실했음에도 완전한 몰락이라는 최악의 상황만은 그럭 저럭 피해갈 수 있었다. 이는 차후 해상자위대 설치와 일본 국산 전투함 건조 능력의 기반으로 연결되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전 미국 원수와 요시다 시게루 (당시 수상) 가 1954년 요시다 수상 방미시 촬영한 사진.
두 사람의 개인적 친분관계는 한국전쟁 초기까지 해상보안청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2. 해상보안청 발족

이렇게 점령 첫 해부터 시작된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강도높은 군사력 억지정책은 일본의 군사적 능력을 말살시키는 데에는 퍽 유용했지만, 정작 다른 부분에서 치명적인 문제를 노출했다.
연합군에게는 이미 자생능력을 상실하다시피 한 일본에게 정상적인 수준의 지원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일본 각지에서 기아나 소요, 기타 치안 차원의 문제를 드러냈던 것이다.
특히 해상은 밀입국, 밀수, 무허가 조업 등이 성행하고 있었지만, 당장 일본 근해 치안을 담당하기로 내정되었던 태평양함대나 연합군 최고사령부측은 업무상의 부조화로 인해 제대로 된 초계활동을 펼치지 못했다.
결국 항복 후 반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옛 군부가 아닌 "운수성"에서 자체적인 해상치안 확보를 위한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이 의견은 일본의 자체적 치안조직 설립을 옹호하던 요시다 시게루 (당시 외무대신) 등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연합군 최고사령부측은 일본 정부측의 해상 치안조직 기획안 작성 과정에 옛 일본 해군측 인사들이 개입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강한 불신감을 표시했다.
이미 해운부 산하에 불법 입국선박 감시본부 (1946년 한반도 콜레라 창궐로 설립되었다) 가 설치되어 있음에도, 별도로 독립 치안 기관을 설립하는 것은 구 일본해군 출신 인사 재집결과 해군 재무장을 위한 수순이 아니냐는 것이 최고사령부측의 입장이었다.
반대로 일본 측에서는 장기간에 걸친 전시체계로 인해 해군을 제외한 선박 운용능력이 크게 쇠퇴한 만큼, "당장 치안 조직을 설립하는데 투입할 인력은 구 해군 출신 인사 외엔 없었다" 고 항변했다.

결국 해양 치안조직 설립안은 양자 간의 짧지만 격렬한 논쟁 끝에, 일본 정부 측의 관련자료를 바탕으로 조직을 승인하되 미국 코스트가드의 지휘관을 파견하여 일본 근해의 치안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구체적 방침을 정하는 방향으로 결론지어졌다.
1946 년 5월에 파견된 미국의 코스트가드 감찰단은 일본에도 주요 항만을 중심으로 한 최소한의 통관 및 해상 검역 조직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그 결과 1947년 5월에 운수성 휘하에 독자적인 해상 치안기관을 구성하는 방안이 최고사령부의 승인을 얻었다.
새로운 치안 기관은 해상보안청으로 명명되었으며, 1948년 5월에 공식으로 설립되어 불법 입국선박 감시본부의 임무를 인계받았다.

그러나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해상보안청에 완전한 자유를 부여한 것은 아니었다.
해상보안청은 그 규모가 8000명 미만으로 제한되었으며 작전권 차원에서도 미국 해군에게 예속되었다.
당연히 작전계획과 내역에 대한 정보는 모두 정기적으로 제출해야 했고, 원양 활동은 완전히 금지되었다. 특히 해군이 제 2 복원성으로 격하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조직과 장비를 유지했던 "유일한 조직" 이었던 소해대는 여전히 후생성 산하에서 소방기관처럼 "재해구난조직" 으로 취급되어 해상보안청과는 별도로 활동하고 있었다.


알레이 버크 제독과 노무라 요시로, 한국전쟁 이후 초기 해상자위대 설립을 주도했다.


3. 한국 전쟁 발발, 노무라-버크 재건안의 탄생
이런 경직된 구도가 변화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은 일본에 집중되어 있던 미국의 극동 주둔 전력을 한반도로 이동하게 했고, 그 과정에서 기존에 점령군이 담당하던 각 영역들은 일본에게 자연스레 인계되었다.
이를 두고 당시 총리 요시다 시게루는 "한국전쟁은 하늘이 내려준 재무장의 기회" 라고 평가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한반도의 전황이 급속도로 진행되는 동안 후생성 산하의 소해대가 해상보안청 보안국 소해과로 은근슬쩍 편입되었고, 이 과정에서 구 해군성 출신 인사 및 조직, 하위기관 들 역시 이름을 바꿔 대거 해상보안청 아래로 들어갔다.
한국전쟁 발발로 초 긴장 상태에 놓여 있던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이런 변화를 확인하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대처능력의 한계를 이유로 묵인해야 했다.
특히 해상보안청 산하의 소해부대는 장비 낙후로 인한 작전능력 제약이라는 문제가 있었지만 일본 근해에서수년간 대량의 기뢰를 소해한 경험을 지닌데다 일본 해군 시절 수집한 한반도 해역에 대한 정보도 보유한 정예집단이어서, 미국은 해상보안청 소해대를 상륙작전시 부족한 자국의 소해전력을 보완해줄 몇 안되는 카드로 인식하고 있었다.
실제로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1950년 중순에 일본 정부측에 소해대 파견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1950년 10월에 25척의 소해대가 원산상륙작전을 위한 소해예비대로 투입되었다.
(이 사건은 잘 알려지지만 않았을 뿐, 이후 요시다 시게루 수상의 독단에 따른 전력 투입과 그로 인한 법적 문제, 인명피해 등으로 인해 정치적 논란을 야기했다)
이런 정세를 호재로 파악한 제 2 복원국 내의 구 제국해군 출신 인사들은 정부내 강경파의 지원 하에 이듬해인 1951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해군재건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전 제국 해군 대장 노무라 요시로를 중심으로 한 자문진들은 4척의 항공모함 보유안까지 포함된 두 종류의 해군 재건안을 작성하여 대표적 친일파 미군이었던 극동방면 해군 참모장 알레이 버크 소장에게 제출했다.
1949년 제독의 반란 사건으로 해군내에서 강한 지지층을 보유하고 있던 알레이 버크 소장은 노무라 요시로의 제안을 극동 해군 사령관 터너 조이 중장에게 보고했고, 한반도 해역 전개로 인한 전력 공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터너 중장은 일본 해군 재건안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며 재검토 지시를 내렸다.
이후 노무라와 알레이 버크 양자간의 실무적 협의와 조율 과정을 거쳐 개정된 일명 "노무라-버크 재건안" 은 포레스트셔먼 미국 해군 작전본부장에게까지 보고되었으며, 동년 3월 포레스트 제독은 이 “노무라-버크 재건안” 을 일본 정부가 동의한다는 전제 하에 승인하기로 결정했다.
이 노무라-버크 재건안은 동년 미국 의회와 재무부의 예산 집행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으나, 이후 해상자위대 설립과정에서 중요한 마스터 플랜으로 사용되었다.

노무라-버크 재건안은 의회와 재무부에게 사살당했지만, 일본의 해상전력 증강안 자체가 침몰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 전쟁이 장기화의 조짐을 보이던 1951년부터는 연합군측도 일본 해역에서의 연합군 해군 이탈을 고려해 해상보안청의 추가적전력증강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이미 완성되어 양국 일선의 호의적 평가를 끌어내었던 “노무라-버크” 재건안이 검토자료로 활용되는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때 일본 정부측은 해군 재건과 해상보안청 보강 방안을 두고 많은 고민을 거쳤다.
구 일본 해군출신의 인사들은 "해군 재건" 을 강하게 주장했으나, 국내에 상존하는 재군비에 대한 부정적 반응과 국제사회의 비난 등을 감안할 경우, 해상보안청의 조직을 보완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연합군 최고사령부 측의 판단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의 묵인을 받았다고 해도 즉시 전력을 구축할수는 없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집요한 견제를 받았던 조선능력과 해상 작전능력을 미국이 요구하는 수준까지 단기간에 복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미국 역시 일본의 제한적인 재무장을 승인한다 하더라도 일본이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재군비를 추진하는 것은 원치 않고 있었다.
결국 양자는 2차대전 당시 건조되었던 대량의 미국제 2선 전투함들 가운데 일부를 일본측에 제공하는 방안에 주목했다.
일본의 독립에 대비한 재무장에는 찬성하지만 전후복구와 경제발전을 저해할정도로 방위산업과 군비에 대한 투자가 집중되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았던 온건보수파 (후일 자민당계) 인사였던 요시다 총리의 입장에서도 미국의 함정공여안은 일본측의 부담을 최소화 하면서도 전력을 구축할 수 있는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1951년 Life 표지를 장식한 리지웨이 대장과 요시다 수상. 양자간 회담에서 미일 함정대여방안이 협의되었다.


4. Y 위원회, 해상경비대 설치

함정 대여안이 처음으로 공식화 된것은 맥아더 원수의 후임인 리지웨이 장군의 방일회담이었다. 연합군 최고사령관직에 취임한 매튜 리지웨이 대장은 직접 요시다 시게루 일본 수상과 접촉하여 공식적으로 프리깃 (PF) 18척과 대형 무장상륙정 (LSSL) 50척의 무상 대여를 제안했다.
이 제안에는 미군내 친일계 인사였던 알레이 버크 제독과 러스크 대령,실즈 대령 등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리지웨이 대장의 제안을 즉각 수용한 요시다 수상은 오카자키 가쓰오 내각관방장관에게 함정 인수 준비를 지시했고, 오카자키 장관은 전 해군 군무국장 출신이자 제 2 복원국 총무부장이었던 야마모토 요시오 전 소장과 야나기자와 요네키치 해상보안청 장관의 자문을 받았다.
이들은 곧 함정 대여와 대여함정의 운용안을 논의하는 총리 직속 자문집단을 구성했으며, 이 자문집단은 구성원의 주축이었던 야마모토 소장과 야나기자와 장관의 이니셜을 따 Y 위원회라 명명되었다.
1951년 9월에 있었던 강화조약에 대한 국민여론조사에서는 "독립국이 될 경우 자위군 창설에 대한 안건" 에 대해 일본 국민은 찬성 71%, 반대 16%, 기권/무효 13% 의 표를 던졌지만, 당시 언론과 야당 측에서는 여전히 재군비에 강한 반발을 보이고 있었다. 결국 Y 위원회는 관방장관 직할의 비공개조직으로 활해야 했다.

Y 위원회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았다. (괄호 안은 군 관련 재직시 직위)


Y 위원회 구성원

야마모토 요시오 (山本善雄) 전 해군 소장 (해병 46기, 군무국장)
아키시게 미노루 (秋重実恵) 전 해군 소장 (해기 28기, 군수국 제 4부장 )
나가이 타로 (永井太郎) 전 해군 대령 (해병 48기, 교육국 과장)
나가사와 히로시 (長澤浩) 전 해군 대령 (해병 49기,군무국 제 1과장 겸 군령부 제 3과장)
하츠미 에이고로 (初見盈五郎) 전 해군 대령 (해경 8기, 경리국 제 3과장)
요시다 사카에 (吉田英三) 전 해군 대령 (해병 50기, 군무국 제 3 과장)
모리시타 류이치 (森下陸一) 전 해군 대령 (해기 34기, 해군 예비생도 시험 임시위원)
테라이 요시모리 (寺井義守) 전 해군 중령 (해병 54기, 군령부 제 1과 부원 겸 군무국원)
야나기자와 요네키치 (柳沢米吉) 해상보안청 장관 (동경대 졸 외 특기사항 없음)
미타 카즈야 (三田一也) 전 해군중령 현 해상보안청 경비구난감 (상선학교 졸업, 해군 예비역 중령)
야마자키 코고로 (山崎小五郎) 해상보안청 차장 (동경대 졸 외 특기사항 없음)

11명의 구성인원 가운데 8명은 구 일본 해군의 중진이었으며, 특히 요시다 시게루 소장은 대표적 친일 군인이었던 알레이 버크 제독과 함께 일본 해군 재건안인 노무라-버크 재건안을 작성한 바 있는 대표적 재건파였다.
그나마 해상보안청 장관인 야나기자와나 차관 야마자키, 경비구난관 미타 등 민간인 출신들은 당시 일본의 국가적 역량 부족과 국제정세, 국내반발등을 이유로 해상보안청 강화를 넘어선 해군력 재건에 강한 반대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Y 위원회의 구성 목적은 도입 함정의 효율적 운용안 마련이었기 때문에, 위원회 내부의 핵심은 자연스레 도입 전투함을 운용할 조직으로 옮겨갔다.
위원회 내부에서는 당장 해상보안청이 전투함을 인수한다 해도, 이를 향후 해상방위력-즉 국방전력으로 구분하여 별개의 전투집단으로 독립시킬 것인가, 혹은 해상보안청의 작전범위 (거리가 아닌 임무의 개념) 확대로 보아야 할 것인가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구 해군파는 전자를, 해상보안청측은 후자를 지지했다.
결국 Y 위원회는 새로운 전투함 세력은 해상보안청 전력을 바탕으로 구성하되, 전투함을 보유하는 만큼 조직 자체는 해상보안청에서 독립시켜야 하며, 이를 위해 신설 최고지휘조직 창설과 해상보안청법 일부 개정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해당 법안의 기초안을 작성했다.
신규 조직의 명칭은 당초 경찰 예비대를 모방해 "해상 보안 예비대" 로 가 예정되었지만, 후일 "해상 경비대" 로 변경되었다.
Y위원회의 해상보안청법 개정안은 급박한 한반도 정세와 친일 성향 미군 인사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쉽사리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재가를 얻었으며, 결국 1952년 3월에 해상보안청법을 개정 - 해상경비대법이 통과되었다.

5. 해상경비대의 초기 구성 함정.

해상경비대의 초대 총감은 Y위원회의 마지막 참가자인 해상보안청 차장 야마자키 코고로가 내정되었으며, 후일 지방대로 재편될 지방감부장으로는 역시 Y위원회 출신인 요시다 사카에 전 해군 대령이 취임했다.
최초의 해상경비대는 해상보안청의 인력지원을 통해 6000여명의 인력으로 편성되었으며, 해상경비대법 발효 1개월 후인 1952년 4월에 공식 출범했다.
그리고 1952년 5월 일본이 주권을 반환받은것과 동시에 새로운 국방조직에 대한 논의가 급부상했고, 그 결과 1952년 8월. 보안청이 창설되었으며 이때 해상경비대는 보안청 휘하로 개편되었다.
총리겸직으로 보안청 장관에 취임한 요시다 총리는 보안청의 설립을 두고 “새로운 군의 토대” 라고 언급하여 재차 논란을 빚기도 했다.
한편 같은해 11월 해상경비대법에 근거한 미-일 선박 대여 협정이 채결되어, 이듬해인 53년 1월부터 12월까지 타코마급 프리깃 (PF) 대형 상륙지원정 LCS(L) (Landing Craft, Support Large, 혹은 LSSL, Landing Ship Support Large.)50척 (후일 3척 추가) 등이 미국에서 대여되었다.
미국이 지원한 타코마급 프리깃과 LCS(L) 은 1952년에 인도되었지만, 정작 일본 내에서는 이를 "선박" 으로 규정해야 하는가, "군함" 으로 규정해야 하는가를 두고 행정적인 논쟁이 발생하는 바람에 최종 인도가 1953년에나 이뤄지는 해프닝도 발생하기도 했다.
Y 위원회가 그랬듯이, 일본 국내에서도 여전히 국론 통일은 이뤄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초기도입 함정 - 타코마급-LCS(L), 쿠스급과 유리급



타코마급은 영국의 리버급 프리깃을 바탕으로 2차대전 중 총 96척이 건조된 선단 호위용 전투함이다. 기준배수량은1430톤, 만재 2450톤에 불과했으며 대량 건조를 위해 상선 규격을 적용해 전투함으로서의 신뢰성은 그리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건조와 유지에 드는 비용이 저렴해서 영국으로 역수출되거나 소비에트에 대여되는 등 전중에도 주력 수출함으로 활용했고 전후에 공여용 함정으로 다수의 국가에 수출되었다.
(특히 네임쉽인 PF-3 타코마는 1945년 소비에트에 임대되었다 1949년에 반납, 다시 1951년에 한국에게 공여된바 있다. 한국은 본함을 대동이라고 명명하여 1973년까지 운용했으며,대동을 포함 5척의 타코마급을 두만급 경비함으로 운용했다)
추진기관은 항양성능과 신뢰성을 위해 앞서 개발되었던 영국의 리버급에서 가져온 3보일러 2터빈, 2축 추진을 채용했다.
다른 미국산 호위용 프리깃들이 대부분 단축 추직을 채용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나름대로 특이한 선택이었다.
타코마급에 사용된 터빈은 대당 5500마력 가량의 출력을 냈다.
설계 최고속도는 20kt 였으나 허술한 설계로 인해 실제 속도는 18노트 이상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반면 항속거리는 12노트 기준 9500마일에 달해, 해안선이 긴 일본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유용한 편이었다.
무장은 호위용 프리깃 답게 함포와 폭뢰로만 구성되었다.
주포는 3인치 50구경장 단장식 포인 Mk.22 3문으로, 포방패 없이 노출된 구조에 고각사격능력을 갖춘-대공포에 가까운 함포였다. 사거리는 최대 13.3km 가량이었고, 수동장전식으로 분당 15-20발의 발사속도를 낼 수 있었다.
부포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도 무방할 전설의 M1 보포스 40mm 쌍열 대공 기관포 2문과 Mk.10 20mm 대공포 9문이 장착되었다. 함포 관제는 조준기를 통합한 두 개의 Mk.51 사격관제장치가 담당하며, 기본적인 대공 화망 및 대수상 사격은 Mk.51이 제공하는 재원에 따라 통제된다.
사격관제장치들의 정보는 전부 CIC 에서 통제가 가능하도록 집약화 되어, 없을 때의 허전함을 채워주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는 구 일본 해군식 사격통제체계 숙련자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대잠무장으로는 Mk.10 해지호그 대잠로켓 1세트와 Y-gun 이라 불리는 Mk.6 폭뢰투사기 8문. 그리고 Mk.9 폭뢰레일 2세트 등이 장착되었다. 다만 체계적인 대잠 공격을 위한 별도의 자체 센서는 인도시 장비되지 않았으며 후일 추가되었다.
경비대에 인도된 18척의 타코마급은 "쿠스くす" 급 경비정으로 명명되었다.




쿠스급과 동시에 도입된 LCS(L) 기본적으로 연안에서 상륙을 위해 제작된 함정이었다.
LCS(L) 은 기본적으로 보병상륙함인 LCI(Landing Craft Infantry)와 동일한 선체를 바탕으로 설계되었으며, 대전 중 총 130척을 건조하여 그 가운데 53척을 일본에게 대여했다.
LCS (L)은 만재 254톤 가량의 소형함이어서 기본적으로 장거리 항해나 원해 작전을 수행하기는 어려움이 많았다.
추진기관은 200마력급 디젤엔진 8대를 묶어 2축을 돌리는 방식으로, 최고속도는 16.5kt 여서 타코마급 보다도 발이 느렸다.
다만 처음부터 최소한의 함대기동을 위해 12노트 순항능력을 요구받았고, 항속거리도 이상적인 상황에서 5500마일로 소형선박으로서는 나름대로 우수한 편이었다.
주무장은 타코마급과 같은 Mk.22 3인치 50구경장함포 1문과 M1 보포스 40mm 쌍열 대공 기관포 2문, Mk.10 20mm 기관포 4문 등으로 타코마급의 절반 수준에 맞춰졌다.
사격통제장치 역시 저가 대량 건조함의 공용장비인 Mk.51 을 사용했다.
사격통제체계와는 별도로 4정의 Cal.50 기관총과 상륙지원용 Mk.7 로켓런쳐가 10세트쯤 장착되었으나, 장비의 특성 상 일본 인도 이후에 사용될 일은 없었다.
미국에서 운용되던 LCS 는 별도의 고유함명이 부여되지 않았으나, 일본에서는 초도함을 유리ゆり라고 명명해 이후 LCS(L)을 유리급으로 일괄 호칭했다.
유리급은 그 특성상 연안초계용으로 활용되었지만, 함 자체가 급조된데다 성능 한계로 인해 임무가 제한되는 바람에 일선의 불만이 심심찮게 재기되었고, 결국 1958년부터 차례대로 제적되어 미국측에 반납되었다.
도입함 가운데 일부는 상륙정의 특성을 살려 일반 초계가 아닌 지원업무에 투입되기도 했지만, 지원용으로 사용된 함정들 역시 1976년까지 반납이 마무리되었다.



1953년 5월 14일에는 새로운 미-일 함정 대여 협정이 맺어졌고, 이에 따라 두 척의 글라베스(Gleaves) 급 구축함(DD) 임대안이 확정되었다. 이 두 척의 구축함은 초기 해상자위대에 여러 가지 측면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글라베스급은 사실상 리버모어급 구축함과 동형함으로, 일부에서는 글라베스급을 벤슨급 계열에 구분하기도 하나 글라베스-리버모어급은 모두 Gibbs & cox 의 작품이며, 사실상 동일한 설계의 함정이다.

최초의 DD, 글라베스-아사카제급

글라베스급 구축함은 기준 배수량 1630t, 만재 배수량 2060t 으로 앞서 도입된 타코마급과 비교해 선체의 크기 측면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었지만, 그러나 기관의 구성과 무장의 체급 면에서는 체급 자체가 다른 본격적인 구축함 (당시 기준) 이라고 할 수 있었다.
4대의 보일러와 두대의 증기터빈으로 2축을 돌리는 기관계는 최대출력이 50000마력으로 타코마급의 다섯 배에 육박했다.
이런 고출력 기관과 106x11(m)의 날렵한 선체 적에 글라베스급 구축함은 최대 37kt의 고속정급 최대속도를 낼 수 있었다.
항속거리도 12노트에서 6500마일로 상당히 준수한 편이었다.
이런 고기동성은 신규 도입될 구축함이 20kt 미만의 속도밖에 내지 못해 언제나 제한된 해역에서 다수의 선박을 집중 운용해야 했던 기존의 경비함들에 비해 훨씬 여유 있게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2차대전 당시 일본 해군과 비교한다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긴 했지만, 경비대는 각 방면대 기함으로 글라베스급을 배치하는 등 최초의 구축함을 상당히 중요시 했다.
글라베스급은 무장 면에서도 기존의 경비정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주포는 Mk.30 5인치 38구경장 단장 함포 4문으로, 같은포신을 사용하는 연장형 함포인Mk.12에 비해서는 열세였지만 사격과 장전이 반자동화 되어 기존에 사용하던 Mk.22 3인치함포와는 체급이 다른 화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분당 발사 속도는 15발로 사격속도 면에서도 3인치 수동장전식인 Mk.22와 대등했으며 사거리는 16km 로 3km 이상 우세했다.
5인치 함포 통제용으로는 전용 FCS 인 Mk.37을 탑재하여 주포 명중률 역시 역시 쿠스급이나 유리급보다 훨씬 높았다.
Mk.37은 5인치 포 가동용으로 설계된 레이더/광학 거리측정 겸용의 사격통제장치로, 항공모함부터 전함, 순양함, 구축함 등 미국제 5인치 포 탑재함들 사이에 폭넓게 배치되었다.
5인치 포와 전용 사통장치가 채용된 만큼,  순수한 주포 화력 투사 능력만을 비교할 경우 글라베스급의 화력은 타코마급 2~3척에 필적했다.
일본은 1959~1960년에 대공/대수상 레이더도 최신형으로 교체해 초계능력을 보강했다.

부무장으로는 쿠스급이나 유리급과 같은 보포스 40mm 쌍열과 2문과 20mm 단장포 2문이 탑재되었는데, 이는 기존의 경비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다.
포무장 외에는 대함 공격에 유용한 533mm 어뢰 튜브가 양현에 10세트, 잠수함 공격용 폭뢰 투하 레일이 2세트 설치되었지만, 이는 전쟁 후반에 양함이 모두 소해구축함으로 재편되면서 철거되었다.
이때 4번 Mk.30 주포도 철거되었지만, 일본에 인도 과정에서 재설치되었다.
반대로 높은 곳에 장비된 2번 주포는 함의 복원성능 저하를 이유로 철거되었다.
1954년 일본측에 인도된 글라베스급 구축함- DD-454 엘리슨과 DD-458 마콤은 호위함 "아사카제"あさかぜ 와 "하타카제"はたかぜ 로 명명되어, 초기 자위함대 주력으로 1969년까지 운용되었다.



한편 1951년부터 수출용 선박 건조가 재개되면서 일본 국내 조선업계도 어느 정도 활기를 띄기 시작했지만, 한국전쟁이 종결 이후 소요와 선박수주량이 동반 감소하기 시작하자 거대 불황에 대한 불안감이 업계에 확산되었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경기 불황 회피와 조선산업 보호를 명목으로 보안청예산과 긴급 예산을 포함해 130억엔 규모의 "국산 함정 건조비" 를 1953년 예산으로 통과시켰다.
 예산을 배정받은 주요 조선소들은 국산 전투함 건조준비에 착수하여, 해자대가 운용하기 시작한 미국의 장비들을 연구하거나 구 일본해군과 관련된 기술자들을 복직시키는 등 자체적인 준비에 나섰다.
1954년부터는 선박 건조 경기가 극적으로 향상되어 경제적 측면에서는 더이상 전투함을 건조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수출경기가 항상 호조일 수는 없다는 것을 파악한 일본의 조선소들은 일정한 매출이 정기적으로 보장되는 전투함 건조에 대한 투자를 꾸준히 유지해 나갔다.



1954년 자위대 창설 당시 장면. "돈이 없었던" 당시의 일본은 일단 구 경비대에서 편조를 확대개편하는 선에서 방위청을 설치해야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무장은 미국에서 공여받은 잉여장비들이었다.

6. 자위대 창설과 추가 도입함정

해상경비대 창설과 방위청 설립, 함정대여법을 통한 쿠스급과 유리급, 아사카제급의 도입, 그리고 자체적인 국산 호위함 건조 등 일본의 재무장 정책은 미국의 통제와지원 하에 제한적으로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비난에 직면했다.
 특히 러시아나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동서진영을 막론한 국제적 비난은 물론, 이후 장기간에 걸쳐 국내에서 논란의 핵심이 된 평화헌법 제 9조에 대한 국내의 정치적 해석논쟁도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내 정치집단의 재무장 추진 의지는 매우 확고했다.
1953년 9월에는 온건 보수 지향의 자유당 대표인 요시다 시게루와 개진당 대표 시게미츠 마모루 간의회담을 통해 헌법에 저촉되는 군을 대신해 자체적인 국가 방위를 담당할 무장단체를 구성한다는 “자위력” 개념을 정식으로 합의했다.
그 결과 야당과 시민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쇼와 29년 6월 9일 법률 제 165호 - 자위대의 임무, 자위대의 부대의 조직 및 편성, 자위대의 행동 및 권한, 대원의 신분 취급등에 관한 법률 (일명 자위대법) 과 쇼와 29년 6월 9일 법률 제 164호 - 방위성 설치에 관란 법률 (일명 방위청법) 등 소위 방위 2법안이 의회를 통과했으며 1954년 7월 방위청과 휘하의 전투집단을 개편하는 자위대법이 시행됨에 따라 휘하조직인 방위대 역시 해상자위대로 개편되었다.
이때 승인된 해상자위대의 규모는 재직원 16000여명으로, 해상경비대 당시의 6000여명에 비해 3배 가까이 늘어났는데, 이때의 충원을 통해 해상자위대는 추가 도입될 함정에 배치할 승무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자위대 기지배치. 해상자위대 설립 당시에는 요코스카와 사세보에만 각각 1개 호위대군이 설치되었고, 마이즈루와 오미나토 지방대가 편입되었다.

최초의 해상자위대는 방위청 산하의 자위함대사령부를 두고, 자위함대 사령부가 제 1 호위대군과 제 2 호위대군, 그리고 제 1 경계대군으로 지휘하며, 기본적으로 2개 분함대 이상마다 상급 지휘제대를 두는 방식으로 편성되었다.
 이에 따라 요코스카의 제 1 호위대군은 휘하에 제 1 호위대, 제 2 호위대를. 사세보의 제 2호위대군은 제 3 호위대와 제 4호위대를 담당했다.
각각의 호위대는 3~4척의 쿠스급으로 구성되었으며, 유리급(LSS(L))은경계대 휘하에 편성되어 4척 단위로 경계대를 구성했다. (예외적으로 제 10 경계대는 1호위대군 직속으로 편성되었다)
이후 해상자위대는 각 지방대기지를 바탕으로 아사카제급과 같은 대형 호위함이 확장될때마다 신편 호위대를 구성하고, 호위대의 수가 충족되면 호위대군을 늘려나가는 방식으로 조직을 확장하여 최종적으로 4개 호위대군을 편성했다.
 한편 구 경비대의 근간인 요코스카 지방대와 마이즈루 지방대, 사세보 지방대와 오미나토 지방대는자연스럽게 해상자위대로 전환되었고,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요코스카 지방대에서 구레 지방기지대가 독립하여 구레 지방대로 재편되었다.
경비대가 해상자위대로 재편됨에 따라 Y 위원회 소속이었던 일부 인사들이 전면에 나서기도 했다.
나가사와 히로시 전 해군 대령은해상막료장으로 취임했으며, 요시다 사카에 전 해군 대령은 해상자위함대 사령을 거쳐 요코스카지방총감으로 재직했고, 테라이 요시모리전 해군 중령은 요코스카 지방총감 자리를 차지했다.
해상자위대는 1954년 7월. 시코쿠만을중심으로 최초의 연합훈련을 실시하여 전력화가 진행된 PF와 LSSL의 연계작전능력을 검증했으며, 1955년 4월에는 사세보 항근해에서 미일 연합훈련인 "소해특별훈련" 을 실시해 미국과의 공조 작전 능력을 재확인했다.
한편  상호 안전 보장법 (Mutual Security Act) 과 그에 근거한 함정대여법에 따른 미국 해군 잉여 함정 도입도 계속되어, 1955년 6월 14일에는 글라베스급의 뒤를 이어 캐논급 호위구축함 두척이 추가로 인도되었고, 1959년 3월 11일에는 글라베스의 뒤를 이어 두번째 DD 급에 해당하는 플래처급이 인도되기 시작했다.
2종의 구축함은 각각 2척씩 총 4척이 일본 측에 넘겨졌다.

캐논 - 아사히급




캐논급은 대전 중 72척이 건조된 기준배수량 1240t, 만재 1620t 급의호위구축함(DE)로,DD로 구분되는 글라베스급에 비해 선체가 한체급 가량 작았으며, 무장 역시 단순해서 전반적인 작전능력 역시 아사카제급 보다는 쿠스급에 가까웠다.
추진기관으로는 넉 대의 디젤 엔진과 동일한 숫자의 발전기, 전동기를 조합한 2축 구동식의 디젤-일렉트릭 구조를 채택했다.
해상자위대 역사상 잠수함을 제외한 디젤 일렉트릭 추진함 채택 사례는 이 캐논급 뿐이다.
디젤 기관의 총 출력은 6000마력 급으로 최고속도 역시 함대작전에 필요한 하한선인 21kt 에 머물렀다.
그러나 연비가 좋은 디젤 추진의 특성 상 항속거리는 매우 길어서, 최대 항속거리는 쿠스급보다도 긴 12kt 순항 기준 10800nm 에 달했다.
무장은 쿠스급과 유리급에서 사용된 3인치 50구경장 단장식 포인 Mk.22 3문과 M1 보포스 40mm 쌍열 대공 기관포 3문. Mk.10 20mm 대공포 8문 등으로 구성되어, 종합적인 화력은 쿠스급과 유사한 수준이었다.
인도된 함은 DE-168 아믹과 DE-169 애서톤으로, 각각 아사히あさひ와 하츠미はつひ로 재명명되었다.
아사히급은 1959년에 신형 소나를 장착하고, 1962년에는 일본이 독자 개발한 OPS-16 레이다를 올리는 등 꾸준히 실험함으로 활동하다 필리핀으로 넘겨졌는데, 그 가운데 하츠미는 여전히 필리핀 해군에서 현역 기함으로 활동하고 있다.



플래처- 아리아케급






  플레처급 구축함은 2차대전 중 총 175척이 건조되었으며 이후에도 독일이나 이탈리아, 스페인, 터키, 대만,일본 등에 대여되거나 판매된 베스트셀러로, 기준배수량 2050t 에 만재는 2500t 에 달해 당시 일본 해상자위대를 기준으로는가장 큰 전투함이었다.
주 추진기관은 증기터빈이었으며, 최대출력은 60000마력으로 최대속도는 36.5kt 에 달했고 항속거리 역시 15kt 기준 5500마일로 준수한 편이었다.
주포는 Mk.30 5인치 38구경장 단장 함포 5문과 보포스 40mm 대공포 5문, 20mm 대공포 7문, 5연장 533mm 어뢰 발사관 2세트 등으로 글라베스급인 아사카제보다도 우세했다.
그 가운데 선체 중앙에 배치된 3번 주포와 20mm 대공포, 533mm 어뢰발사관은 도입 후에 철거되었고, 그 공간에 실습생도용 거주구가 설치되었다.
주포와 어뢰발사관을 포함해 상당수의 주력 무장을 제거한데다 초계임무보다는 순항훈련에 자주 사용되는 등 (비교적)  비전투성향이 강해 보이지만, 해상자위대 입장에서 볼 때 플레처급 DD는 여전히 공격적인 수단이었다.
플레처급의 함포 사격통제장치는 글라베스급과 동일한 레이더/광학 거리측정 겸용의 Mk.37을 사용했다.
두 척의 플레처급은 아리아케 ありあけ 와 유우구레 ゆうぐれ 로 명명되었다.
  1963년 말에 잠시 호위대 배속에서 해제되어 순항훈련용으로 활용되기도 했으나, 해상자위대의 임무가 대잠 중심으로 짜여지기 시작한 1964년 2월에는 B포지션에 장착된 2번주포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Mk.108 대잠 로켓 발사기를 탑재하여 대잠능력을 강화한 후 일선에 복귀했다.
1971년에는 다시 실험대로 배속이 전환되어 1번 주포마저 제거하고 이후 OQS-101 이라는 이름으로 실용화된 T-101 원거리 탐지용 저주파 바우소나를 장착하는 등 실험함으로 활동하다 1974년 3월에 미국 측에 반납되었다.



덧글

  • 마카로프 2010/08/19 11:21 # 삭제

    확실히 이런글은 괜찮은데 말이삼...




    중동전은? (후비적)
  • 네비아찌 2010/08/19 13:32 #

    결국은 김일성 놈이 원흉.....우리모두 김일성을 깝시다.^^
  • 信念의鳥人 2010/08/19 16:43 #

    초기에는 한국해군하고 비교해도 그렇게 큰차이는 없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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