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바라크 옛것뭉치


*시위 기간 중에는 독재자 옹호한달까봐 못 올리다 이제사 정리.
*그래봐야 별 건 아니고. 그냥 그 시절엔 저랬던 사람이 이제 망했다네- 정도로 봐 주시길.

0. 공군기
1947년 11월 사관학교 입학, 1949년까지 학사과정을 거치고 공군으로 편입. 그리고 이듬해 곧바로 조종사로 임관.
1952년부터 공군사관학교 교관을 겸임하다 1952년 군사혁명 이후 사다트와 만남. 이후 1956년 수에즈 사태를 거치며 정치적 색이 없는 유능한 관리자라는 평을 받았고 그 결과 1961년 수도 인근이자 이스라엘 대응 방공부대인 웨스트 카이로 항공대 단장으로 취임.
나세르가 정책적으로 친소정책을 펼치면서 교관단 교환으로 1964년부터 프룬제 사관학교 고등과정을 이수.
귀국 이후 1962년부터 계속되던 예맨 내전에 참가. 1967년 휴전 시기까지 총 비행시간 6000시간을 돌파한 이집트의 몇 안되는 영관급 장교였다.
1967년 3차 중동전쟁 당시, 개전 초기 이스라엘의 급습에 대한 책임을 물어 대다수 공군장성들이 숙청당하자 친 사다트계 인사로 특진. 1968년 공군사관학교장으로 취임 후 1969년 공군참모총장으로 특진.
1970년 나세르 사망 이후 사다트의 눈에 들어 1972년부터 공군 사령관으로 사다트가 요구하는 대 소비에트 협상 및 공군 재편성을 진두지휘했다.
1973년 기간동안 나름대로 분전한 결과 그 공로로 전쟁영웅 호칭을 받아 이듬해 공군 원수로 취임.

1. 정치입문
공군원수가 된 이후 사다트의 지원과 국민적 인기를 바탕으로 이듬해인 1975년 정권 2인자인 부통령에 취임.
그리고 1977년 이집트 빵 폭동 (빵 보조금 지급 중단으로 인한 생계형 시위) 당시 시위대 진압의 총책임자를 담당.
이후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상의 실무도 지휘했다. 이 과정에서 이집트는 타 아랍국가들에게 단교당했지만 84년까지 84억~90억 달러에 달하는 지원을 얻었다.
1979년. 착실히 더러운 업무를 수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여당인 국민민주당의 부총재로 취임했다.

2. 대통령.
1981년 10월 6일 사다트 암살 이후 국민민주당이 무바라크를 후계로 지명 - 국민의회가 추인했다.
그리고 1981년 10월 13일 국민투표에서 유일후보자로 98.4% 지지를 받아 대통령으로 당선.
사다트 사망 이후 이집트에서는 Asyut 등 일부 지방에서 무슬림 형제단을 위시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무장항쟁을 시도했고, 3일간 경찰 및 보안군 (Security force) 54명이 사망했다.
무바라크는 빵 폭동 당시의 경험을 살려 700명의 주동 전력을 지목-체포를 지시했고 계엄령을 발동해 카이로에 전력을 풀었으며 Asyut 에 무자비한 진압정책을 이행했다. 
(이 당시 이집트의 성공적인 진압은 이후 시리아에서 있었던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강경 진압 및 학살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이 오시라크를 폭격하는 등 상황이 좋지 않았으므로, 취임 직후 사다트가 잡아넣은 1600명의 야당인사들 중 800명을 석방시켰다.
동시에 사다트 재임기중 사임처분을 받은 기자와 교수들도 복권.  그리고 이듬해까지 정부 관리 하에 폐간지 부활을 허용했다.
소요나 폭동, 시위에 대한 강경정책은 1986년 보안군 폭동 당시에도 이어졌다. 당시 12000명 규모의 폭동은 국방부 장관 압둘 할림 아부 가잘라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었으며, 무바라크는 2개월 후 가잘라를 해임시켜 깔끔하게 뒷마무리를 했다.
(이후 2011년까지 카이로에는 보안군을 포함한 군 병력이 배치되지 않았다)

3. 집권 초기의 이미지. (필터링 필요)
1982년, 시리아에 피바람이 몰아치는 동안 자유주의 지향의 야당 기관지인 Al Ahrar 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정부가 가자 지구에 피라미드를 제외한 행락시설이 있어선 안된다고 결정했을때, 가장 먼저 제거된 것은 대통령의 별장이었다"
무바라크는 집권 초기부터 친지들이 무역업에 종사하지 못하게 했고. 스스로 "친척들에게 절대 특권을 주지 않을 것" 이라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그 약속을 지켰다.

결론 : 시위대 맞서서 군대 투입하는 건 저 할배 18번이었음.

덧글

  • 세피아 2011/03/15 10:59 #

    저러다가 이제... 참... ㄱ-
  • 네비아찌 2011/03/15 11:05 #

    이양반이 욤 키푸르 전쟁때 북한이 도와준 의리를 못잊어서
    김일성이 죽을때까지는 한국과 외교관계 맺는 것을 보류하고 있었더랬죠?
  • 하이버니안 2011/03/15 11:17 # 삭제

    그야말로 리즈 시절이군요.
  • 행인1 2011/03/15 12:58 #

    시위 진압으로 출세해서 시위 진압으로 망했군요.
  • 계란소년 2011/03/15 13:38 #

    영원히 진압할 수 있는 지도자는 없단다...
  • 措大 2011/03/15 17:44 #

    결국 저것도 잘 포장하면 박정희 mk.2 하지만 신도들은 절대 인정하지 않겠죠 --;

    김재규가 그날 일찍 귀가하고 마산에서, 혹은 83년쯤에 정권 엎어졌으면 박정희는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요.
  • 낙사엽 2011/03/17 05:17 # 삭제

    역으로 생각하면, 20년쯤 후에는 이집트에 무바라크 신도들이 생길지도 모를 일입니다...
  • 소시민 2011/03/18 19:30 #

    사다트라... 줄을 잘 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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