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덴 플라스 - 베이비 롤스로이스 (메탈 이야기 아님) 탈것뭉치



0. 반덴 플라스는 원래 19세기 말부터 가구나 마차 내장재를 다루는 벨기에 기업이었습니다만 (읽는 법도 벨기에식!) 영국 귀족 나으리들 사이에서 자동차라는 장난감이 유행하게 되자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이 때만 해도 반덴 플라스의 기본 방침은 외주로 엔진과 섀시를 납품받아다 자사의 장기인 호화찬란한 인테리어 주문제작으로 초고가 시장을 노리는 것. 덕분에 재료비를 무시하다시피 하는 초호화 인테리어 전문업체-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코치빌더- 이름을 날렸고, 1차대전 직전에는 영국 왕실에도 차를 공급하는 로열 브랜드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2차대전을 연이어 치르는 과정에서 발생한 거대 불황으로 초고급차의 수요가 급감했고, 경영난을 겪던 반덴 플라스도 1946년에 저가 전문 브랜드인 오스틴에 인수당합니다.



1. 오스틴에 인수된 반덴 플라스는 저가 브랜드였던 오스틴의 대형 세단인 A99 웨스트민스터를 바탕으로 최초의 오스틴-반덴 플라스인 프린세스 3/4 Litre 를 내놓습니다.
원형이 된 웨스트민스터는 그럭저럭 괜찮은 차였습니다만, 롤스로이스/재규어/오스틴-BMC 등으로 이어지는 영국 특유의 계급별 차종선택의 벽에 막히기도 했고, 옵션 역시 해본 가락이 없다 보니 고급차만 타 오던 고객의 눈에는 다소 미흡한 편이어서 고급차 시장 공략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덴 플라스는 엄연히 로열 브랜드에다 초호화 옵션에 대한 노하우를 가진 업체, 이 아저씨들의 손을 거친 웨스트민스터는 어메이징하면서도 어썸한 (...) 슈퍼 럭셔리로 부활합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영국 왕실의 (보조) 의전차량 선정. 프린세스가 웨스트민스터를 바탕으로 만든 변형이라는 건 알 사람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여왕님 일행이 타는 차를 모리스제 싸구려라고 비웃을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오스틴 입장에서는 (자회사 덕분이라지만) 제대로 신분상승을 한 셈입니다.
(이 과정에서 고급차에 대한 추가 수요를 맞추기 위해 롤스로이스의 4리터급 L6 엔진을 받아다 올린 것이 프린세스 4Litre R)

2. 반덴 플라스의 모회사인 오스틴은 모리스와 합병을 통해 1952년부터 BMC를 구성합니다.
하지만 만성적인 불황에다 1956년 수에즈 크라이시스로 인한 석유값 상승까지 겹치면서 영국 자동차 업계는 만성불황 상태로 전락했고, BMC는 타개책으로 경제적인 소형차 개발에 착수합니다.
이때 이시고니스 경이 슥삭슥삭 설계한 낸 시대의 명차가 바로 BMC 미니.
1950년대 말에 등장한 미니는 1960년대부터 사회현상 수준의 붐을 일으킵니다. 코딱지만한 대중차를 여왕폐하가 몰고 다니질 않나, 차 이름을 딴 스커트가 나오질 않나... (미니스커트의 어원이 바로 BMC 시절의 미니)
워낙 차가 이쁘고 실용적이다 보니 상류층인 금융/기업가나 귀족들도 미니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특히 교외에서 시내로 오가거나 길이 좁은 지방도시에서 행정업무를 보는 관료급 인사들에게는 차체가 작아서 타고 다니기 편한 미니는 굉장히 매력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구매 브랜드별로 히에랄키가 적용되는 영국사회에서 그야말로 개나소나여왕이나 다 타고다니는 차를 타기는 영 껄끄러웠고. 그래서 마개조 미니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3.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자 BMC도 1962년부터 모리스 1100, 즉 ADO16 차대 기반의 고급차 개발을 검토하기 시작합니다.
이시고니스 경이 직접 설계한 ADO16 은 ADO15로 구분되는 미니의 직접적 후계+확장형으로, 미니에 비해 실내공간이 꽤 크고 트렁크도 달려 있었지만 여전히 다른 세단에 비해서는 작고 경제적인 모델이었습니다.
(덕분에 1970년대 까지는 동사의 미니와 영국 자동차 시장을 양분하는 베스트셀러였지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 생략하고...)
BMC 산하에서 머리 굳은 귀족 나으리들에게도 먹힐만한 브랜드는 울슬리와 반덴 플라스 정도.
결국 반덴 플라스 브랜드, 그것도 중대형 고급차였던 프린세스의 후계차로 ADO16 기반의 반덴 플라스 프린세스 1100 이 등장합니다.
전장 3.7m 의 소형 차체에 구형 프린세스를 능가하는 호화 내장을 적용한 변태적인 소형-고급차 컨셉은 미니를 좋아하지만 체면 때문에 탈 수가 없었던 츤데레 고관대작들에게 제대로 먹혀들었습니다.
(물론 귀족들의 평소 의전차 까지는 아니고, 공무용 세컨카 수준에 머무르긴 했습니다만)
베이비 롤스로이스라는 이명이라던가, 헤로즈나 리츠 호텔 로비에 차를 세웠더니 벤츠보다 먼저 문을 열어주더라는 일화도 다 이 시절에 출발했습니다.

4. 이후에 BMC가 무너지면서 함께 사라졌다던가, 재규어나 랜드로버의 프리미어 브랜드 이름 정도로만 남아있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생략 (...)
여튼 소형-고급차라는 흔치 않은 장르에서도 극히 예외적인 "성공사례" (수출은 망했지만) 라, 이래저래 의미가 깊은 차-라고 합니다.




덧글

  • 리리안 2011/11/09 12:48 #

    계급별로 타는 차라는 개념이 신기하군요. 역시 영국이라고 해야 하나...
  • deokbusin 2011/11/11 09:19 # 삭제

    일본도 영국하고 비슷하게 계층별로 타는 자동차가 따로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매한가지이며, 어느 정도는 세계공통이기도 하지요.
  • maxi 2011/11/09 13:50 #

    이 차 귀엽다
  • 백선호 2011/11/09 14:34 # 삭제

    일본에서는 1990년대에 이 차에 대한 "매니아"가 엄청 생겨 살아남은 차들이 많이 "수출"되었다고 하네요.

    http://www.aronline.co.uk/blogs/2011/07/19/bmc-11001300-japanese-variations/
  • 백선호 2011/11/09 14:48 # 삭제

    1960~70년대 영국의 계급별 자동차에 대한 데일리 텔리그라프의 생생한 설명입니다.

    http://www.telegraph.co.uk/motoring/classiccars/8048294/Classic-Vanden-Plas-Princess-4-litre-R.html

    Being Britain, manufacturers offered a marque for every stage of the social climber’s journey. Drivers who parked their buttocks on the leather of a Rover knew they were cut from finer cloth than those stationed on the mixed fibres of a Triumph. But Triumph Man could look down on Austin Man. And he might attempt a little haughtiness with Morris Man. Oh, and just as Rover Man sipped his G&T in his Alfred Dunhill suit, what had next door come home in: a new Wolseley? “Gertrude, grab your hat. We need a new car.”

    가죽 시트 Rover 타는 사람은 천 시트 Triumph 타는 사람을 깔보고, Triumph 타는 사람은 Austin 타는 사람을 깔보고, Austin 타는 사람은 Morris 타는 사람을 깔보는데 알프레드 던힐 수트를 입고 진토닉을 홀짝 거리던 Rover 타는 사람은 옆집 사람이 Wolseley를 몰고 들어오자 (더 좋은) 새 차 사야겠다고 부인에게 말합니다.
※ 이 포스트는 더 이상 덧글을 남길 수 없습니다.


트위터+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