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싱 업체가 나라를 지킨다? 탈것뭉치



냉전기 이후 방위산업이 민수산업을 이끈 경우는 찾기 어렵다.
람보르기니 디자이너들은 F-22의 디자인에서 레벤톤과 아반타도르의 영감을 얻었다고 하지만, 글쎄. 단순히 각진 면의 조합을 가져온 것을 제외하면 기술적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람보르기니 디자이너들이 과속단속용 레이더에 대한 스텔스 능력을 제공하기 위해 스컹크 웍스의 레이더 반사 기술을 받아오지는 않았을 거 아닌가.
반대로 민수산업의 눈부신 유산을 군수산업에서 야금야금 받아다 쓰는 경우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최근에는 민수기술의 군수 전용 대열에 레이싱 업체가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고 계시다.

그 주인공은 캠브릿지셔의 롤라, 1957년 개업해 F1 부터 인디카, 르망까지 다종다양한 분야에 섀시를 제공해 온 레이싱 전문업체다.
이 뼈대있는 마이스터들은 총 수익의 2/3을 항공우주와 방위분야에서, 그것도 총을 찍거나 전차를 조립하는 대신 기술 협력과 생산 지원만으로 거둬들이고 있다.
즉 위대한 롤라느님의 기술을 여러 방위산업체가 굽신거리며 구입해 간다는 이야기다.
이런 괴상한 구도가 성립된 것은 1990년대 중반, F1 에서 기술적 경쟁력을 잃고 물러나면서 자금난에 빠진 롤라가 "자신들의 가용자원을 팔아 돈을 마련할 방법을 찾으면서" 시작되었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던 롤라의 경영진은 곧 방위산업체의 경량 복합소재 개발/설계/생산기술이라는 것이 굉장히 미개하고 원시적이며 자신들이 그 바닥에 진출한다면 헤파이토스와 같은 존재가 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칭 방위산업체들은 원시적인 인력에 의존해 어디가 하이테크인지 알 수 없는 하이테크 병기를 제작하고 있었으며 납기일정과 개발예산은 초과하라고 주어지는 것처럼 여기곤 했다. 당연히 트러블을 줄이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예수탄생 이전의 기술을 사용하는 주제에 시험기가 아닌 생산기에서나 문제를 확인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반대로 롤라는 매년 FIA 와 경쟁 팀에 맞서 신소재와 신형상을 디자인하고 초단기간 내에 신뢰성을 검증하며 철야를 불사해 예선 전날까지 쉐이크다운을 해 내야 하는 전쟁터에서 살아온 업체다.
아마 같은 일을 (방위산업체인) BAE나 빅커스에 주문한다면 진지하게 정신과 상담을 권유받을지도 모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롤라가 기술 지원 서비스를 개시한 이래 십여년이 지나는 동안 그들의 고객 리스트는 크게 늘어났다.
저 유명한 탈레스/엘비트는 소형 무인기인 Watchkeeper 의 동체와 주익을 위해 롤라의 기술을 구입해 갔으며, 최근에 개발중인 대형 UAV인 Taranis 나 MANTIS, 수중용 무인장비인 Talisman 도 같은 기술을 바탕으로 제작중이다.
강력한 Type 45 방공구축함의 구면 레이돔 역시 BAE 가 롤라의 소재성형기술을 구입한 끝에 완성한 역작이다.
봄바디어조차도 그들의 민항기를 위해 롤라의 소재기술을 구입해 간다.
최근에는 대서양 건너 미국의 노드롭 그루만이 LEMV (Long-Endurance Multi-intelligence Vehicle) 개발을 위해 롤라의 협력을 얻고 있는데, 이들은 소재 기술 외에도 롤라가 모터스포츠에서 정립한 노하우 - 즉 빠른 결정과 신속한 시제 제작, 제작과 병행하여 진행되는 데이터 시뮬레이션, 그리고 소요비용 예측에 근거한 예산관리와 이 모든것을 복수의 프로그램에 병행 추진하는 실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런 기법을 자신들이 무기를 만드는 데 적용하고 싶어 한다.
롤라에서는 이런 업체들에게 매우 호의적이다.
전투기를 만들던 이들이 레이싱 업계에 뛰어들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뛰어든다 한들 롤라나 달라라 같은 전통의 강호들을 꺾고 레이싱 시장을 장악할 가능성은 더더욱 없으니 견제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것.
방위산업체들의 입장에서도 롤라의 존재는 복음서와 같다. 롤라의 기술분야 수익목표는 5000만 파운드 가량인데- 거대한 방위산업 분야에서 이만한 비용은 코묻은 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이유로 롤라의 "짭짤한 부업" 은 당분간 계속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아마도.

여하간 우리는 롤라의 성공에서 대략 두 가지 정도 의미심장한 메세지를 찾을 수 있다.
일단 상용 자동차와 종적 결별 수순에 들어선 것처럼 보이는 F-1 의 기술이 여전히 (자동차 시장은 아니지만) 다양한 분야로 확산될 만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 그리고 우리의 목숨을 지키는 고가의 첨단 기술이라는 것들이 실은 터무니없이 비싸고 뒤떨어졌다는 점이다.
롤라의 임직원들도 두 번째 지적에 대해서는 얼굴을 찡그렸는데, 그들도 세금을 낸다는 걸 생각하면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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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로리 2012/01/12 09:55 #

    T_T

    그냥 눈물이...포뮬러 닛폰이나 챔프카 만들었던 스위프트도 UAV 제작에 도움을 주는 듯 하던데...
  • 위장효과 2012/01/12 10:05 #

    마지막 문장에서 공감 x 100000. 거기다가 룰라 임직원들이라면 "저런 쉑들이 우리 회사에 들어오면 딱 그날 오후로 몽땅 FIRE!!!!" 이런 심정이었을지도요.
  • 계란소년 2012/01/12 10:08 #

    하지만 롤라도 F1에서는 후지다고 퇴출당했다는...
  • Muphy 2012/01/12 10:16 #

    나랏돈은 주워가는게 임자...라는 논리의 새로운 증명. -_-
  • 이네스 2012/01/12 10:39 #

    역시나 세금은 눈먼돈이지요.
  • Luthien 2012/01/12 10:54 #

    첨언 : 이건 롤라 관점입니다. 롤라도 20년마다 1종씩 만들면 거기서 거기. 그냥 전공분야가 다른거고 이동네 루저가 저기선 걸리버더라 정도
  • dunkbear 2012/01/12 11:01 #

    글쎄요... 복합재료 하나 잘 다룬다고 좀 잘난 척 하는 분위기랄까요.

    그리고 한 국가의 정규군이 무기 제작에서 방산업체에 요구하는 스펙
    과 구성은 F1 스포츠카에 비교될 수 없을텐데?
  • 로리 2012/01/12 11:39 #

    문제는 시즌내내(!) 새로운 디자인을 적용하고 그러면서도 FIA가 정한 안전 규격을 통과해야한다는 점 입니다. 아주 빠르게 빠르게 흘러가기 때문에 1~2주 단위로 새 부품이나 디자인을 적용해서 경기에 투입해야할 때도 있고... 그러면서도 안전 규격을 완전히 통과해야한다는 것이 문제이죠.

    오히려 복합소재 가공 기술보다 저런 레이싱 업체의 뛰어난 점은 제품 개발과 테스트의 프로세스입니다. 워낙 빠르게 기획, 제조, 검증 이 같이 하기 때문에 그런 노하우가 엄청난 것이고 그게 일반적인 방산업체들의 느린(사실 느리진 않는데...) 페이스와 비교가 된다는 것이지요.

  • dunkbear 2012/01/12 15:18 #

    현 방산업체의 전신들이 2차 대전 당시 얼마나 많은 무기들을 미친듯이 찍어냈는지,
    로리님도 잘 아실 겁니다. 지금 방산업체들이 그 스피드를 잊어버려서 못하는 것일
    까요?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처음부터 밑도 끝도 없는 스펙을 요구하는 정부와 군에 발맞춰 줘야하고 그 스펙요
    구조차 개발 중에 달라지는 걸 감안하면 F1 분야는 오히려 천국일 듯 합니다. FIA
    의 요구사항이 방산시장처럼 된다면 저런 자기도취적 발언은 꿈꾸지도 못할텐데...
  • 로리 2012/01/12 16:22 #

    FIA의 규정은 고무줄로 유명합니다.(...)
    안전규정은 안전규정이고, 이기지 못하면 광고주는 사라집니다. 문제는 그거죠. 어떤 규정을 바탕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다음 경기에서 금지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정부가 스펙 정하거나 조정하는 것이랑 FIA가 기술 규제를 하거나 규정 발표하는 것이나 솔직히 확 다르진 않다고 봅니다.

    좌우지간 그 유명한 스컹스웍스의 경우와 F1팀이 비슷하다고 보시면 될 듯 합니다. 문제는 현재의 방산 업체들이 너무 덩치가 커지고 무기 개발이 늦어지면서 개발 프로세스가 느려지고 거기에 너무 익수해져왔다는 것이죠. 물론 여기에는 업체만의 책임은 아니고 정부의 관료주의도 있습니다. 일단 닭치고 이기기만 하면 문제가 없는 F1이나 레이싱과도 다른 것은 사실이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방산 업체들의 개발 프로세스나 여러 부분의 최적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 로리 2012/01/12 16:29 #

    그리고 좀 더 첨언을 하자면, F1 메이커는 단순 복합소재를 더 잘 사용한다가 아니라 대부분이 종합 엔지니어링 회사에 가깝습니다. 항공기 제작업체와 가장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실제로 풍동 장비가 있고, CAD/CAM을 통한 CFD 라던가.. 내부에 CnC장비들 있어서 부품 깍고 하지요 ^^;

    http://www.swiftengineering.com/

    포뮬러 닛폰 레이싱카와 미국 인디카에 레이스 카를 만든 스위프트 엔지니어링 홈 페이지를 가보시면 어떤 일을 하는지 아실 듯 합니다. 그러니깐 설계, 검증 대행 업체쯤일까요 ^^;
  • 중요한 건 2012/01/12 16:39 # 삭제

    "즉 빠른 결정과 신속한 시제 제작, 제작과 병행하여 진행되는 데이터 시뮬레이션, 그리고 소요비용 예측에 근거한 예산관리와 이 모든것을 복수의 프로그램에 병행 추진하는 실력"

    터무니 없는 요구조건에 밑빠진 독에 물붓는 관료제 탓만 할 게 아니고, 스컹크 웍스나 2차대전 때 스핏파이어 개발처럼 무기개발체계가 돌아가야 혈세 낭비를 줄일 수 있겠죠.
  • dunkbear 2012/01/12 16:55 #

    - 최소한 FIA 규정은 짧은 기간 동안만이라도 유효하지 않습니까. 업체들도 그걸 알고 있고...

    - 느려진 것이 단순히 방산업체의 나태함 때문만은 아니죠. 정부와 군의 스펙에 따라 새로
    만들고 개발하고, 첨단 기술을 적용하는 데는 - 그것도 동체부터 내부 센서까지 다양한 종류
    의 부품에 -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죠.

    - F1 메이커들의 장비야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겠죠. 하지만 그 목표는 레이싱카, 항공기 등
    매우 한정된, 자사의 장비들이 소화할 수 있는 수준 아닌가요? 방산업체들은 그보다 훨씬 더
    다양한 분야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게 좋은 것은 아니지만요.
  • 로리 2012/01/12 17:47 #

    록히드 마틴이나 보잉, 레이시온이 모든 것을 다하지 않지요. F1 메이커도 페라리처럼 엔진까지 만드는 메이커도 있고 엔진을 다른데서 받아서 만드는 메이커도 있습니다. 전자장비를 타업체(예를 들어 마그네틱 마렐리나 2D/3D같은)에 받아서 만들기도 하고요.

    물론 난이도면에서는 분명히 방산업체들과 1:1 비교는 어렵습니다만, 저런 레이싱 엔지니어링 업체들의 개발 프로세스는 분명 방산업체들이 이젠 반대로 배워야 할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 dunkbear 2012/01/12 19:08 #

    로리님 말씀이 맞다고 봅니다만...

    결국 중요한 건 양쪽이 몸담고 있는 분야의 본질적인 차이, 그리고 업체들이 상대하는 고객
    의 차이가 아닌가 합니다. F1과 방산 분야 모두 업체들이 그렇게 되도록 만든 환경을 조성한
    것이니까요. F1이 성과와 경쟁 지향적이라면 방산 분야는 비용과 효율 지향적이랄까요...

    그래서 (다른 회원님의 의견을 빌자면) 방산 분야는 업체들이 보수적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상대해야 하는 고객의 요구가 근본적으로 F1과는 다르니 말입니다. 방산 분야가 F1
    과 같은 환경이었다면 위와 같은 얘기가 나오지도 않았겠죠.

    그래서 레이싱 업체들의 개발 프로세스를 방산업체들이 무조건 들이기는 쉽지 않다고 봅니
    다. 일부 배울 점이 있기는 하겠지만... 글쎄요. 그 점은 모르겠습니다.
  • 로리 2012/01/12 19:38 #

    제가 주목하는 것은 유한한 자원과 개발 스케쥴에서 뽑아야 하는 효율성의 문제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레이스 관련 업체들의 효율성은 놀랍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물론 이렇진 않겠지만) 어떤 테스트를 위해서 충돌 실험을 해야할 때, 현재 방산업체들은 일단 전체 제품이 완성된 다음에 실험장에서 충격을 가해본다면 전체 자동차가 만들어질 수 없는 환경이니깐 레이스 업체들은 부품 하나하나를 나눠서 일단 완성되면 바로 충돌 테스트장에 가서 테스트를 하고 완성차를 만드는 식입니다.

    사실 이런 빠른 일처리와 TF팀을 통한 효율적 의사결정 과정으로 움직인다는 개념은 스컹크워스와 같은 방산업체에서 먼저 했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지요.

    정말로 어디소 방산업체들이 꼬였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 dhunter 2012/01/12 21:05 # 삭제

    다른 포인트 하나만 더 짚겠습니다. '잘난 척' 하는건 어디까지나 루뎅님의 텍스트(혹은 원문인 영어권의 어떤 언론의 텍스트) 일뿐 롤라 자신이 잘난척 한것 같진 않은데요. 목표 매출 규모도 아담하고 말이죠.
  • wasp 2012/01/12 11:54 #

    확실히 몇몇 기업들이 독식하는 군수산업보다, F1레이스의 규정을 지켜가며, 팀의 승리를 위해 매일매일 기술개발하고, 테스트해가며 제품품질을 높혀가는 회사의 품질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 지구밖 2012/01/12 14:23 #

    오홓 일리있네요. 잘 봤습니다.
  • 척 키스 2012/01/12 14:49 #

    F-2 제작 할 때 주익 탄소복합소재 일체성형기술은 록마가 오히려 일본에서 배워갔다고하니...
    전통적인 합급강 혹은 알루미늄 혹은 티타늄을 가지고 기체제작 능력은 있을지언정 복합소재 제작능력은 꽝일수 밖에 없겠죠. 탄소복합소재 도배 시작한 역사가 의외로 짧으니까요.

    PS: 스웨덴의 항공기술이 접목된 사브자동차 광고가 떠오르는데요. 그 비겐이 자동차위로 날아가던 광고말이죠.
  • Eraser 2012/01/12 23:36 #

    참 F1레이싱 팀들처럼 급변상황에도 대처하고 요구조건 다 맞춰가면서 일정 지킨다면 모든게 잘 될건데 현실은 그런거 없고 돈은 돈대로 일정은 일정대로 망가지는 이름을 말할 수 없는 모 전투기는....
  • 콩가 2012/03/21 12:58 # 삭제

    제바볼땐업체의특수성을모르고저런말을한게아닐까싶네요.
    애시당초에사업의규모가틀린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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