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적 기자의 자세 옛것뭉치


발굴이야기 - 왕의 무덤에서 쓰레기장까지, 한국 고고학 발굴의 여정- 에서 따온 대목입니다.

신문기사 오보소동

당시 발굴조사에 따른 보도는 필요할 경우 공통으로 자료를 넘겨주는-즉 한꺼번에 취급하는 것이 경주 천마총 발굴조사 때부터 관행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경을 씨지 않고 발굴작업에만 열중할 수 있었다. 더구나 심초석 하부 조사 당시는 형식적이나마 작업 범위에 가시 철조망을 설치하고 경비원까지 두어 관계자 이외에는 작업장 출입을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서울신문 경주 주재 최암 기자가 현장에 나타나 작업 광경을 촬영하고 특종기사 (1978년 7월 26일자) 를 낸 일이 있었다.

-경주시 구황동 사적 제 6호 황룡사터 9층목탑 심초삭 아래에서 신라 제 27대 선덕여왕 때 창건할 당시에 안치한 사리함과 사리항아리, 순금제 귀고리 1쌍과 명문이 새겨진 동판 1점, 금동으로 장식한 칼 2점, 구슬 등 각종 유물 150여점이 나와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신라의 신비 1천 300년 만에 햇빛.
이날 유물은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비롯, 진홍섭 문화재위원 (이화여대박물관장) 김정기 문화재연구소장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라 삼보 중의 하나인 9층목탑 심초석 (무게 28톤) 과 연좌석 (무게 5톤)을 들어올리는 순간 강회로 다진 적심석 위에서 발견했는데 청동 사리함(가로 세로 약 20센티미터 높이 15센티미터) 안에 뚜껑이 덮힌 사리항아리 (높이 10센티미터) 와 그 주변에 길이 8센티미터 가량의 순금제 귀고리1 쌍, 명문이 새겨진 둥근 청동판 (지름 12센티미터) 1점, 동경 1점, 팔각곡옥구슬 등이 1천 3백여 년 만에 햇빛을 보게 되었다. 목탑의 기초는주 먹만한 냇돌을 강회로 다져 그 위에 사리함을 안치한 뒤 동서 4미터, 남북 3미터, 높이 1~1.5미터의 자연석(심초석)이 놓여져 있었다.
이 탑은 신라 선덕여왕 14년 (서기 645) 에 자장법사에 의해 창건된 동양 최대의 목탑으로 높이가 2백 25자 (68미터) 이며 9번에 걸쳐 중수한 사실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지난 1964년에는 심초석과 연좌석 사이 사리공에서 신라 경문왕 12년 (서기 872) 에 중수한 기록과 탑지가 발견된 바 있는데 이번에 사리함에서 이 명문 청동판이 발견됨으로써 창건 당시의 기록이 명확하게 밝혀질 것이다.
발굴조사를 맡고 있는 한 관계자는 탑지에서 순금제 귀고리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고 밝히고 지금까지 무덤에서만 발견되던 태환이식이 장례 의식용으로만 나왔으나 이번 탑지에서 발견됨으로써 신라 때 귀족들이 실제 패용했던 것으로 학설이 뒤바뀔 가능성이 짙다고 말했다.
발굴조사단은 또 이날 발결된 신라 항아리가 중국제 또는 신라제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토기항아리로서 유약으로 처리된 이 같은 형태는 처음 발견돼 국보급이라 평가했다. 이 항아리 안에 든 사리는 당시의 대사 또는 왕의 사리로 추정되고 있다.

-기사 내용을 보면 9층 목탑터 심초석 아래서 사리함 등 유물 150여점 출토부터 틀린 내용이었고 창건 기록 새긴 동판 이란 것도 출토된 사실이 없었다. 사리함이 발견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옮기지도 않은 심초석을 옮겼다고 한 것만 보아도 얼마나 엉터리 기사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심초석은 기사가 난 지 이틀 후에 옮겼다. 기사 내용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독자들은 이런 사정도 모르고 보도된 내용을 믿을 것이 아닌가. 정정 보도라도 내어야 할 형편이었지만 기사를 쓴 기자의 양심에 맡기기로 하였다.
사실 통제구역 내에 어떻게 기자가 들어오게 되었고 그러한 기사를 쓰게 되었는지 궁금했는데, 전날 승용차를 타고 와 "단장님을 뵈러 왔다 '는 말에 경비원이 방문 인사인 줄 알고 아무런 의심 없이 들여보냄으로써 일어난 것이다.
기자가 방문하면 현장에 스피커로 발굴조사 요원만 아는 방송을 하여 긴급히 보호조처토록 하면서까지 보안에 신경을 쓰고 있었지만 일순간에 보안조치가 무너졌던 것이다.
기자들이 계속해서 찾아오면 직업에 지장이 따르기 마련이고 중요한 보도거리가 있으면 일률적으로 한꺼번에 하는 것이 서로에게 더욱 편리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규율을 지켜왔던 것이다 .그러한 전통이 지금도 이어져 오지만 가끔 엉둥하게 깨지는 경우도 있다.

그때 특종(?) 이라고 한 기사 내용은 발굴단에서 공식적으로 언급한 내용이 아니라 단순히 기자의 추측에 의한 것이었다.
후에 기사 내용에 대해 사실이 아닌 보도라 지적했을 때 "기사 내용은 20퍼센트만 맞으면 된다" 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 말이 뇌리에 박혀 있다.


발굴이야기 : 조유전 저, 1996. 대원사. 200-201p


딱히 어느 주간지/일간지 집어서 하는 포스팅은 아니고요 (  -)

덧 : 문장이 좀 까끌까끌한건 원문이 그래서.

덧글

  • 행인1 2012/05/26 10:43 #

    "20퍼센트만 맞으면 된다"라...;;;
  • BOT 2012/05/26 11:14 # 삭제

    교양과 상식이 있는 사람은 기사따위를 바로 믿지 않습니다.
  • 해색주 2012/05/26 15:56 #

    저딴 분들을 기자라고
  • 아나뷁 2012/05/26 16:10 #

    저시절부터 저랬군요
  • 구데리안 2012/05/26 19:07 #

    하도 저레서 발굴 약보고서 나오기 전까지는 아예 현장에 기자 따위는 출입을 안시키는게 나음.
    나오고 나서도 외인 출입은 솔직히 꺼리고. 이게 좀더 나가서 발굴현장에서 발굴인원이 개인적으로 촬영이나 기록하는거도 안됨. (실상은 알음 알음 전해진다지만...)
  • 홍차도둑 2012/05/26 21:08 #

    원전인 '발굴 이야기' 보면 아주 패악질까지 나오더군요...후우...
  • Mavs 2012/05/26 20:19 # 삭제

    그보다 저런 일을 수십년 동안 겪어왔으면서 아직도 방송언론을 신용하는 인간들이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 dhunter 2012/05/26 21:24 # 삭제

    이 블로그도 가끔 20%만 맞는 느낌도...
  • -_-;; 2012/05/27 00:58 # 삭제

    "80%만 맞으면 된다" 아닌가요? 80%가 맞고 20%가 틀릴 때 우리는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_-;;

    20%만 맞고 80%가 틀리면 그것을 넘어서 완전 개막장 안드로메다이죠.
  • 무갑 2012/05/27 09:24 #

    무령왕릉떄는 기자들이 들이닥쳐 이리저리 헤집는 바람에 인골도 상하고 유물도 상하고...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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