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사라지는 전학련- 도쿄대 자치회가 일으킨 사회운동의 대격변 메모뭉치


저널리스트인 요요기 사요(代々木 小夜) 씨가 쓴 내용의 발번역입니다.원문은 이쪽 (JBPress)

전학련 (전일본 학생 자치회 총연합) 이라는 이름에 대한 감상은 두 갈래로 나뉜다.
과거 학생운동에 투신하던 60대 이상의 사람들은 대학 시절을 상징하는 학생운동의 거점으로 기억하지만, 60-40대 이하의 사람들은 낡은 사람들이 좌익 놀이를 하는 무대 정도로밖에 보지 않을 것이다. 그 아랫 세대가 되면 아예 공산취미자 (좌익이 취미인 사람) 이나 지금까지 남아있는 희소종 정치활동가 정도가 아닐까.
현재 다섯 개의 전학련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여겨지는 것이 "민청계열 전학련" 이라는 집단이다.
민청의 정식 명칭은 일본민주청년동맹이며 "일본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다" 고 말하는 청년 정치 조직이다. 그 민청이 집행부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어서 민청계라고 불리는 것이다.
바로 그 민청계열 전학련의 근시일 내 해산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대대로 민청 집행부를 장악하고 전학련을 주도해 온 것이 도쿄대학 교양학부 자치회, 통칭 동부C자치회인데, 바로 동부 C자치회 집행부가 지난 4월에 전학련 탈퇴를 결의한 것이다.
동부 C자치회의 탈퇴는 6월 대의원회에서 승인되는 대로 집행되며 이 사건은 민청계열 전학련의 와해와 해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재정적 파탄이 확실한 민청 계열 전학련
민청 계열 전학련이 해산한다는 추정의 근거 가운데 하나는 "기숙사련 (전일본 학생 기숙사 자치회 연합)"해산과 비슷한 패턴을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6년 3월 해산한 기숙사련은 민청계열 전학련과 형제관계에 있던 조직이다. 이런 조직도 가맹 기숙사 감소와 임원 부족으로 어떤 활동도 할 수 없게 되자 해산을 피하지 못했다.
해체 1년 전에 작성된 기숙사련의 내부문서에 따르면 가맹 기숙사는 13개였으며 기관지인 "녹색 깃발" 이 폐간되고 재간된 "Greens Eye's" 의 경우 불과 400부만이 발행되었다.
전학련의 기관지인 "조학" (조국과 학문을 위하여) 역시 한번 폐간되었다가 최근에는 복사기로 인쇄하는 형태로 부활해 1000부 이하만이 발행된다. 그 가운데 정기구독부수는 150부 이하로 찬조회원인 전학련 OB와 공산당 관계 독자를 제외하면 학생 가입규모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는 수준이다.
재정적 파탄의 근거는 보다 확실하다.
현재 민청계열 전학련에서 실제로 활동에 참가하는 회원 자치위원회가 있는 대학은 8개소, 그리고 민청이 집행부를 장악한 곳은 2-3개에 불과하다. 전학련 회원 자치위원회는 전학련에 "회원 회비"라는 연회비를 지불하게되어 있지만, 이마저도 지불하지 않는 자치회가 많다.
올해 전학련 예산은 회원회비 수입 357만엔 기준으로 책정되는데, 여기서 동부C자치회마저 탈퇴한다면 전학련의 회비수익은 200만엔 정도로 급락한다. 즉 동부 C자치회가 탈퇴할 경우 전학련은 사무실 임대료와 복사기 이용료조차 내지 못할 정도의 재정적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물론 공산당에서도 이전부터 전학련의 위기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본부사무소를 이전해 비용을 절약하고 적게나마 활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임대료가 들지 않는 새 사무소를 이전한 것이 바로 동부 C자치회였으니 결국 마지막 생존수단조차 끊기게 된 것이다.
인근에 있는 다른 회원자치회로는 이전을 할 수가 없는데, 외형적으로는 민청이 장악한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 민청의 힘이 빈약한 자치회에 기밀문서를 가지고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저장된 전학련의 투쟁 노하우
보다 심각한 문제는 IT의 발전에 따라 전학련의 투쟁 노하우가 인터넷에서 공유된다는 것이다.
과거에도 전학련 회원 자치회가 탈퇴한 사례는 있었지만 활동을 통해 얻은 노하우는 후진에 인수되지 않았다. 전학련이 회원 자치회 탈퇴를 알고도 산하의 다른 자치회에 통지하지 않은데다 탈퇴한 학생들이 졸업할 경우 노하우는 소실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부C 자치회는 최근 자신들의 진행결과를 트위터로 실황 중계하고 클라우드 공유 서비스에 자료를 업데이트 해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하고 있다. 자치회가 졸업하더라도 활동내역과 기본 노하우는 웹상에 남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소속 학생이 전학련을 공격하고 싶다면 그 노하우는 인터넷으로도 찾을 수 있게 된다.
전학련을 억지로 유지한다고 치자 (예를 들어 일본 공산당 본부 내에 설치한다던지-) 그 때 노하우를 축적한 학생들이 반발한다면 정작 민청이 쫒겨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대학 자치회를 "지도" 할 수 없게 된 전학련은 공산당의 입장에선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의 근거로 고려할 때, 민청계열의 전학련은 올해 안에, 늦어도 이듬해에는 활동정지상태에 몰려 해산할 것이다.

-최대조직인 전학련 해산의 의미

민청계열 전학련 해산은 일본 사회운동 사상 최대의 대사건이다. 20대, 30대의 젊은 독자에게는 감이 오지 않을테니 간단하게 전학련 역사를 정리해보자.
먼저 대학 자치회는 종전 후 곧바로 결성된 학생들의 자치 조직이다. 기본 부분은 지역 자치회와 상점회나 맨션 관리 조합 등과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대학 자치회는 이러한 일반적인 자치회외 달리 결성 당초부터 정치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얼마전까지 군국주의가 올바르다고 떠들던 교사들이 8월15일을 기점으로 "민주주의"를 주입하는 비양심적 행동에 따른 학생의 반발에 근거한 결과다.
이런 반발이 최초로 등장한 사건이 1945년 10월 이바라키현 미토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학생 파업이다. 이 파업의 목적은 군국주의자인 교장의 파면과 군국주의 교육에 합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해고된 진보적 교수의 복직이었다. 학생 운동이라는 학생 조직 정치 투쟁의 시작은 바로 이 시점이다.
미토 고등학교 운동에 촉발되어, 대학 자치회를 결성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1946년 5월 와세다 대학에서 일본 최초의 대학 자치회가 결성되고 이후 많은 대학 자치회가 등장했다. 그리고 당해 11월에 대학 자치회의 전국 조직으로 결성된것이 전학련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당시 엘리트층인 대학생을 당의 통제하에 두길 바라던 일본 공산당이 있었다. 따라서 초기 전학련은 일본 공산당에 순종하는 형태로 움직였지만 이후 공산당과 학생간의 노선 대립으로 인해 전학련은 점차 공산당 노선에서 벗어났다.
최근 전학련은 국민 여론을 양분하는 정치적 대사건이 발생하면 반드시 개입해 큰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최근 원자력 발전 운동에 대해서도 많은 원자력 발전 반대 운동가들이 "스스로 운동을 이끄는 것은 아무래도 전학련일 것" 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국제적으로도 젠가쿠렌(Zengakuren) 은 일본의 미래를 좌우하는 요인 중 하나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미일 안보조약을 두고 정부와 반대파가 정면 충돌한 안보투쟁 이후 1961년 17회 전학련 대회를 기점으로 전학련은 분열하기 시작했고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의 신좌익계 4파와 일본공산당을 추종하는 민청계열 전학련등 총 5개파로 나뉜 것이다.
일본 적군이 일으킨 아사마 산장 사건이나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의 미쓰비시 중공업 본사폭파사건 등으로 학생운동에 대한 국민의 평가와 기대는 땅바닥까지 덜어졌지만, 그 와중에도 민청 계열 전학련은 적어도 80 년대 이후 다른 전학련보다 한 자리수는 많은 회원 자치회를 보유한 최대의 전학련이었다.
이것은 민청이 다른 신좌익계와 달리 폭력 혁명 노선을 선택하지 않은 온건조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21세기 이후 호세이 대학 등 대학당국들은 신좌익 당파를 학내에서 추방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 왔지만 상기 사유로 인해 민청만은 이런 압력을 받지 않았다. 결국 그런 전학련의 소멸은 학생운동 역사의 종식과 같은 의미가 된다.

-반기를 든 리더들.

이제 동부 C자치회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도쿄대 교양학부에서는 이전부터 동부 C자치회의 운영에 민청계열 전학련의 영향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불만이 존재해 왔다. 2010년에는 회의에서 자치회 해산 제안까지 나올 정도다.
전학련에게 문제가 있긴 해도 자치회 해산까지는 필요없다는 이유로 해산제안은 부결되었지만 여전히 일본공산당과 민청에 대한 불만은 남아 있다. 결국 지난 3월에 동부 C자치회 상임위원회는 전학련 탈퇴를 결의할 수밖에 없었다.
전학련과 일본 공산당은 경악했다, 대대로 민청이 장악해온 전학련의 핵심인 동부 C자치회에서 얼마전까지 민청활동을 해오던 사람들이 대량으로 이탈하고 그 자리를 반민청-반공산 회원이 채우면서 급격히 탈퇴결의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과정을 주도한 리더는 동부 C자치위원회 위원장이자 전학련 중앙집해위원으로 근시일 내 전학련 위원장이 될 것이라고 예상되던 인물이었다.
필자는 전학련 탈튀운동을 주도한 카로쿠씨 (도쿄대학 교양학부 3학년) 를 인터뷰했다.
카로쿠는 본명으로, 야마구치현 출신이지만 국적은 중국이다. 약관상 일본공산당과 민청동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본 국적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원칙상 당원도 민청도 될 수 없지만 고등학교 재학중 공산당 지지자가 된 이후 대학에서 "당 회의에 나오지 않겠다" 며 활동만 함께 할 정도의 하드코어 공산주의자다.
도쿄대학 입시일에도 민청활동을 했고, 동부 C자치회활동도 열심이었으며 앞서 언급된 자치회 해산제안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 했다.
그런 카로쿠씨를 "반민청" "반공" 으로 돌린 것이 2011년 7월에 있었던 일본공산당 3중총결정 (제 3회 중앙위원회 총회 결정) 이라는 문서였다. 신문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적자 탈출을 목표로 기관지인 신문 적기의 가격을 인상하는 등 현실과 동떨어진 공상적 내용에 충격을 받고 "당 중앙위원회가 대체 제정신인가" 하는 의심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9월에는 일본 공산당 민청에 대한 위화감도 감지하게 된다. 동부 C자치회는 제1 도쿄대 교양부 학생 대표로 당연히 당이 아니라 학생을 우선시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전학련에서 가해오는 "지도"라는 이름의 자치회 개입은 지나치게 학생의 의사를 무시하고 있었다. 결국 카로쿠씨는 확신했다. "이것은 컬트다."

-당에서 나올 수 없다는 공포감을 극복했다.

일단 질문을 던졌다. "대학 입학 때 이미 민청 전단지를 나눠주셨고 그 후로 1년 반 동안 민청-공산당 활동에 매진하셨습니다만, 왜 지금까지 컬트라는 걸 깨닫지 못하신 겁니까?"
카로쿠씨는 잠시 고민하다 다음과 같이 답했다. 공산당의 주장은 형식적으로는 맞다. 그리고 당원을 비판하는 것에 대한 "운명론적 거부감" 을 가지고 있다-고. 운명론적 거부감이란 공산당은 처음부터 박해당할 운명이었다고 여기고 비판을 기피하는 자세를 말한다.
대정당이나 대기업에 반대하니 그들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의 공격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만큼 우리는 권력으로부터 위협적인 존재니까 비방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공산당원은 그런 교육을 받고 있다.
그래서 당외에서 가해지는 유치한 공산당 비판은 반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공산당원들이 많다.
그러나 공산당 비판자들 가운데는 지식적으로 우수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공산당 취미에 이르러서는 후와 테츠조나 시이 카즈오 (모두 일본 공산계 인사0 의 저술보다 마르크스, 레닌, 그람시, 네그리의 저작을 원서로 읽는 사람들이 널려 있다.
공산당이 선거에서 보여주는 독선적 자세를 고치면 세가 확장할 거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많다. 이런 비판은 당원도 "일리가 있다" 고 여긴다. 그러나 당이 그런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도 알고 있다. 따라서 뜻 있는 비판도 거절하고 만다.
그리고 폐쇄성도 크다. 당 활동을 본격적으로 진행하면 당의 사업만으로도 하루 전체를 소모하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당 내에서만 인간관계가 형성된다. 그리고 당 밖으로 나오면 고립무원이 되고 마는 압박에 휘말려 나가지 못하게 된다.
카로쿠씨 자신은 당에서 나오는 데 따른 고립의 공포를 극복하는데 3개월을 필요로 했다고 말했다. 물론 이 정도 되면 "컬트"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제가 이렇게 취재에 응하는 것도 말도 안되는 극악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비난할 겁니다. 비판 거부 체질은 정말 뿌리가 깊습니다."
"공산당원이나 민청 동맹원이 개인의 입장에서 자치회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일절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들과의 교제는 변화지 않았고요. 배제해야 할 것은 학생의 의향을 무시한 전학련과 공산당의 조직적 자치회 지배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습니다."
고립을 각오하고 당에 반대할 결심을 했지만, 정작 상임위원회에서는 출석 상임위원 전원이 탈퇴에 찬성했다. 여기에는 물론 민청동맹원과 당원들도 있었다. 많은 민청들도 예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해 왔던 셈이다.

-대학 자치회는 사회에 반응할 수 있는지
필자는 가장 중요한 부분, 즉 "대학 자치위원회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에 대해 그의 의견을 들었다. 다시말해 자치회는 "단순히 고등학교 학생회의 연장선상에 있는가, 아니면 그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 조직인가" 에 대한 질문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현재의 대학 자치회는 당파에 지배되고 있다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누구에게나 열린 자치회가 되어야 한다. 고등학교 학생회처럼 눈에 보이는 행동은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는 것이었다. 다만 고교 학생회의 연장선상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반응하지 않는 자치회는 의미가 없다" 는 것이 카로쿠씨의 의견이다.
그는 -아직 구체적 모델은 정립되지 않았지만- "공공성의 재평가" 를 목표로 꼽았다.
동부 C자치회는 도쿄 대학 교양학부에 속한 학생의 대표다. 그러나 학생의 총의로 결의를 제출해도 학내에서는 통용되지만 사회적 영향력은 없다. 게다가 학생의 요구도 다양하고 모든 학생이 일치할 수있는 논점도 찾기 어렵다.
학생의 의견이 일치하는 "학비인상 반대" 같은 주제라면 비교적 쉽다. "무조건 반대" 가 아니라 드러커를 인용해 경영학적 관점에서 당국과 협상하는 사례는 지금도 존재한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한발 더 나가서 사회에 반응해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대학 자치회가 되기 위해서는 공공성에 대해 지금과는 다른 발상으로 생각을 전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예를 들어 보다 전문적인 견해의 측면에서- 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즉 소수자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남자인데 자신은 여자라고 확신하는 성정체성 문제를 겪고 있는 학생이 입학했다고 하자. 그는 여자로서 여자 화장실과 탈의실을 사용하고 싶은데, 대학은 사용을 허가하지 않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그때 그(혹은 그녀)는 대학 자치회에 해결을 요청할까?
만약 자치회가 요청을 받을 경우 자치회는 그 요구를 "단 한명의 생각에 좌우될 수 없다"며 거부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만약 요구에 따라 대학측과 교섭해 타협을 끌어냈다면 그 활동을 사회에는 어떻게 파급시켜야 하는가?
이것은 대대로 대학 자치회 관계자 모두가 직면해온 대답이 없는 주제다. 학생자치회 위원장은 대게 1년 임기이며 유급까지 전제해도 2년밖에 활동하지 않는다. 그런 짧은 기간에 이 난제를 깨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공공성 재평가와 새로운 전학련의 탄생
카로쿠씨에 대한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지면, 카로쿠씨도 재학 중에 이 난제의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며 대학을 졸업하면 대학과는 다른 세계로 떠날 것이다. 언제 까지나 자치회에 참여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이전보다 이 벽을 돌파하기 쉬워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IT 발전은 전국의 학생 자치회 관계자에게 정보 공유를, 그것도 세대를 넘어서는 공유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항상 선인들의 업적을 발판으로 한 후진이 선인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발전 해왔다. 유명한 수학계의 난제였던 마지막 정리도 마찬가지이다. 360년에 달하는 선인의 축적이 있었기에 이 난제를 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카로쿠씨의 마지막 정리는 언제 쯤 풀릴까? 아마 360년까지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일본은 근시일 내로 종전이후 가치관 붕괴에 필적하는 정신적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 시점에서 공공성에 대한 정의는 지금과는 다른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시점에서 공공성은 어떤 가치관을 바탕으로 형성될까, 당연히 자치회의 바람직한 모습도 변화할 것이다 .이것이 카로쿠씨가 말하는 공공성의 재평가이며 이것이야말로 미래의 바람직한 대학 자치회 상을 규정하는 요소다.
엄밀히 생각해 보면 전학련도 종전 직후의 가치관 붕괴를 계기로 태어난 조직이다. 전학련의 붕괴도 전후 형성된 공공성에 대한 가치관 변화에 따라가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학련의 붕괴는 -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신 전학련" 결성의 단초가 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새로운 전학련이 사무실을 가질 것 같진 않다. 본부는 클라우드에 위치하며 집행부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국 자치회 관계자가 자신의 경험과 아이디어를 인터넷상에서 공유하고 그것을 다른 대학 누군가가 몇 년 후에 활용하고 새로운 노하우를 덧붙여 클라우드로 업로드하며 그것을 누군가가 활용하는 형태를 반복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해외 대학 자치회 관계자가 일본의 노하우를 배우고, 일본인에게는 생각할 수없는 노하우를 제공해 줄지도 모른다. 이런 형태라면 자치회 운영 노하우는 시공도 국경도 넘어 전해지지 않을까.
카로쿠씨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이웃 한국에서 학비 인상 반대로 학생 시위가 일어난 것은 바로 지난해입니다. 대학에서 1~2년간 배운 한국어를 살려 한국의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들으러 가고 싶습니다. 물론 그 성과는 웹에서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


덧글

  • 곤충 2012/05/27 11:54 # 삭제

    전공투부터 기억나는 저에게는 참(...)
    확실히 인터넷의 보급이 세상을 완전히 뒤바꾸는 군요.
  • 애쉬 2012/05/27 12:22 #

    일본의 학생운동은 전공투(벌써 사라졌지요? 일부는 하이재킹해서 북조선으로 망명했다죠?)
    전학련은 학생운동 조직이라기 보다는 일본공산당의 청년학생 조직 정도라고 알고있어요
    일본의 공산당은 이름이야 그래도 엄연한 제도권 정당이기에 건공투와는 아주 견원지간이였다고 하더군요
    우리나라로 치자면 80년대 NL그룹이 시간을 초월해 2000년대 민노당 학생분과랑 치고받던 그림이랄까요
    전공투는 압도적인 다수라서 각목 헬멧 비옷으로 무장한 전공투가 활보하는 캠퍼스에서 전학련의 전신인 일청 간부들은 조신하게 학교생활 할 정도였다는군요
    8공투가 체포 투옥 망명 와해되는 와중에 정권(?)잡은 전학련도 이렇게 사라지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아가는군요
  • 카린트세이 2012/05/27 20:18 #

    ... 뭔가 참 미묘한 느낌이군요...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면 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쩝...
  • 행인1 2012/05/27 22:09 #

    클라우드에 기반한 전학련이라...;;;
  • 지나가던과객 2012/05/28 00:48 # 삭제

    일본이나 우리나 좌파가 폐쇄적이라는 느낌을 주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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